통영국제음악당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에 실린 인터뷰입니다.
Q. 피에르 불레즈와 함께 있는 사진을 페이스북 커버로 자랑스럽게 쓰고 계시네요. 베티나 에르하르트가 감독한 피에르 불레즈 다큐멘터리 주역으로 출연하셨고, 불레즈 작품 중 〈플리 슬롱 플리〉(Pli selon Pli)를 부른 뒤 불레즈에게 극찬을 받은 사연이 국내 언론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소프라노 서예리로서 작곡가 불레즈의 음악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불레즈는 처음 접할 때부터 현대음악의 생소함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어요. 일반인들에게 불편한 수준의 아방가르드 양식을 선도하는 작곡가가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정말 편안하게 해 주는 작곡가입니다. 성악가가 부를 수 있는 음의 높이와 길이, 성량 그리고 호흡을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어요. 이 점은 매우 중요하지요. 일반인들은 작곡가라면 누구나 그 정도는 감안하는 게 아니겠냐고 하시겠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뚜띠와 같이 노래를 하게 해 놓았는데 낮은음으로 계속되면 그야말로 중얼거림처럼만 들리고 음을 들을 수 없게 되지요. 도저히 정상적인 발성으로 부를 수 없는 높이로 점철된 음악도 흔하고요. 불레즈는 그런 무리한 작곡이 전혀 없습니다. 좋은 발성 그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표현을 할 수가 있어요. 기교에 신경 쓰느라 가사를 표현할 겨를이 없는, 그런 음악이 아닙니다. 제가 연주 후에 불레즈에게 “당신의 곡은 정말 편안하게 부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더니 자기가 정말 듣기 원하는 칭찬이라면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제가 불레즈의 다른 음악을 들어보아도 기악을 하는 독주자들에게도 편안히 음악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느껴져요. 독주자로서 바로 이 면도 불레즈를 대가로 일컫게 하는 또 하나의 덕목인 것 같이 생각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불레즈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동양적 정서 같은 것이에요. 정확한 분절과 음높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서정과 자연으로부터 음을 빌어와 무리가 없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 마치 동양의 작풍 같습니다. 때로는 동양에서 활용되는 음계만을 고집한 작품도 있고요. 악기만 서양악기일 뿐, 누가 들으면 종묘제례악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혹시 궁금해하실 분이라면 다른 곡도 많지만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 곡인 〈제의 (브루노 마데르나를 추모하며)〉 ‘Rituel in Memoriam Bruno Maderna’를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성악가도 그런 동양적인 정서를 느끼면서 노래를 하면 더 효과적인 작품을 만들 수가 있어요. 제 생각에는 불레즈도 제가 그와 같은 서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말년에 저와 작업을 하고 다른 단체에도 자신의 곡 연주자로서 저를 추천하곤 했습니다. 서양의 성악가들에게 말로 일일이 설명해도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는 그의 곡만의 방식이 있거든요. 저는 그의 음악만 들어도 어떤 방식으로 노래를 해야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점이 통했던 것 같아요.
인격적으로도 정말 겸손하시고 진지하시면서도 주위를 즐겁게 하실 수도 있는 훌륭한 분이시기에 생각할수록 돌아가신 것이 너무도 안타깝기만 합니다. 지난 세기 서양음악사의 종말을 상징하는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Q. 학생 때 피아노를 전공하려고 했다가 성악 전공으로 바꾸셨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가수들에게는 느끼기 어려운 '기악적 감성'이 특히 현대곡을 부를 때 노래에 묻어난다고 느껴집니다. 피아노를 배운 경험 가운데 어떤 부분이 노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악기든 연주경험이 성악에는 반드시 도움이 됩니다. 바이올린을 했던 사람은 정확한 음높이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집착이 있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피아노 연주는 수평적인 멜로디 흐름에 치중하지 아니하고 모든 파트의 음을 수직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을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도 거의 직관적으로 계속 진행되어야 하지요. 단순하게 초견으로 악보를 읽는 것에 도움을 받은 것은 물론입니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작품의 흐름과 함께 표현되는 노래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기악적 감성이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저는 많은 때에 저의 목소리가 하나의 악기와 같다고 여깁니다. 어떻게 곡 전체에 저의 발성이 악기처럼 스며들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합니다. 현대음악 중에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반주’로서 배경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성악을 ‘독주’라고 분리해서 튀어 드러나도록 노래를 했다가는 망쳐버리는 작품이 많습니다. 처음 현대음악을 부르는 성악도들이 잊기 쉬운 점이에요. 저는 현대곡 연주가 있을 때 오케스트라 측에서 성악파트만 있는 악보를 보내줄 때마다 오케스트라 악기가 모두 표시된 총보를 보며 노래 공부하는 게 훨씬 편하다고 말하여 굳이 총보를 요청해서 봅니다. 그래야 좋은 작품을 같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악보의 모든 파트를 동시에 바라보는 관심에는 피아노 전공의 경험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Q. 자신만의 발성법을 찾기 전에 흉내 내려 했던 가수가 있었나요?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 된 과정이나 계기가 궁금합니다. 더 나은 발성법을 고민 중인 성악도들에게 조언 한 마디 부탁합니다.
좋은 발성법을 몇 마디로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화가에게 ‘그리는 법’을 짧게 설명해달라는 것과 같지요. 성악을 시작할 때부터 늙어서 연주를 그만둘 때까지 평생을 생각하고 실험하고 연주하고 교정하는 것이 곧 발성입니다. 다 되었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한 번 불러보면 곧바로 또 교정할 것이 드러나지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성악가가 똑같을 거예요. 자신의 발성법이 완성되었다고 자신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발성은 우리나라에서는 조수미 선생님, 그리고 외국사람으로서는 그루베로바입니다. 자연스럽고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힘이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정말 좋은 발성이라고 생각해요. 유연하기만 하면 소리가 민들레 홀씨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힘과 박력만을 추구하면 굳은살처럼 딱딱하고 경직된 소리로 변질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고 둘을 모두 균형 있게 갖추는 것이 발성의 최종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좋은 발성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지하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건강한 목소리로 무대에 서는 것이 모든 성악가의 목표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결코 무리해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곡을 함부로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저에게도 유혹은 많았지요.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은 새털같이 가뿐한 소리를 가졌는데 바그너 오페라 배역이 들어올 수도 있고, 비브라토의 폭이 크고 메탈릭한 음색을 가진 사람이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를 해 달라고 부탁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들과 하는 작업이라고 해도 쉽게 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풀룻 연주자에게 튜바 소리를 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무리한 것이지요. 물론 자신의 소리가 갖지 못한 면을 보완하려는 노력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소리의 장점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살리기보다, 갖지 못한 단점을 숨기려고 또는 단지 단점을 뛰어넘는 시도를 한다는 차원에서 자기 목소리와 맞지 않는 레파토어, 맞지 않는 분야를 전전하는 것은 성악가로서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일 수도 있으므로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Q. 가수로서 느끼는 유럽 고음악계, 현대음악계, 오페라 극장의 최신 경향이나 판도를 국내 애호가 및 음악 전공 학생들에게 소개하자면?
이것은 모든 문화계에 공통된 현상 같은데, 소위 ‘유행’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1990년대 초에는 말러, 브루크너 등 대편성 교향곡, 1990년대 후반에는 고음악 원전연주 등과 같은 클래식 계의 키워드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게 없다는 거예요. 한 켠에서는 진은숙의 음악을, 동시에 다른 데에서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 그 옆에서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아무 특별한 시선을 받지 않고 연주됩니다. 문학이나 미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거의 모든 문화소비자가 인터넷을 통해서 아무 경계가 없는 대상을 계속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부추긴 것 같습니다. 모든 이들이 각자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것도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지요. 그 자체로서는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클릭을 반복하는 문화의 소비형태 때문에, 일정 정도의 참을성을 요구하는 분야는 쇠락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우려는 생깁니다. 곧바로 흥미를 끌 수가 없는 것이라면 이내 다른 것을 클릭함으로써 외면받게 되지요. 현대음악의 경우에 예전에는 거의 소리가 안 들릴 정도의 조용한 음향으로 1분 이상 지속하면서 시작하는 음악이 많았습니다. 요즘 젊은 작곡가들의 곡은 현란한 음색의 타악기 연주나 특이한 음향으로 시작하는 게 상대적으로 많더군요. 같은 현상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느껴졌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예요. 15초 광고와 같이 빨리 흐르는 영상에만 노출되었던 사람이라면 타르코프스키의 ‘구식’ 영화를 도저히 참고 볼 수가 없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대중의 성향 변화 때문에 클래식 음악계가 차츰 전반적으로 외면받는 흐름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Q. 요스 판 이메르세일의 '슈베르티아데' 음반 작업에 참여하셨고, 같은 제목으로 열리는 통영 무대에도 서게 되셨습니다. 바리톤 토마스 바우어와도 친하실 텐데요, 이와 관련해 독자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얘기 부탁합니다.
그 사람들 모두 오랜 시간 정말 많은 연주를 같이 다녔기 때문에 가족같이 친한 모임입니다. 음악적으로는 서로를 완전히 믿는 사이라, 리허설 시간이 다른 연주 날과 겹쳐 당신 연주를 미안하지만 못 할 것 같다고 하면 비행기로 곧바로 날아와 리허설 없이 그 상태로 무대에 서라 할 만큼 음악적 신뢰가 두텁습니다. 가는 데마다 반주(?)를 곁들여가며 식사도 자주 함께하고 각자 사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누지요. 요스와 토마스는 회와 슈납스(소주)를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번에 통영으로 함께 가게 된 것을 너무도 기뻐했습니다.
Q. '슈베르티아데' 음반에서 슈베르트 가곡을 부르신 음반을 듣고 있으면 개인적인 추억이 노래에 묻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실 만한 사연이 있나요?
슈베르트의 가곡을 부르면서 개인적인 추억에 잠시라도 잠길 수 없는 우리나라 성악가가 있을까요? 저도 마찬가지이지요. 피아노과에서 성악과로 옮긴 뒤부터 사춘기 시절 내내 불렀던 것이 슈베르트의 가곡들입니다. 유럽이라는 데를 전혀 몰랐을 때도 그 가곡들을 들으면 독일, 오스트리아의 쓸쓸한 가을겨울과, 유럽 남부의 화사한 햇살이 상상으로 그려졌습니다. 슈베르트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정서가 반복되어 드러나는 것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이후에도 아무리 놓아주려 해도 일 년에 몇 번은 부르게 돼요. 그때마다 어릴 때의 그런 추억들이 생각나곤 합니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가곡을 추억만으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드러납니다. 설명은 쉽지 않지만 기교면에서도 부를수록 어렵기도 하고요. 쉽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정확한 독일어 딕션이나 가사를 통한 감정처리만으로는 완성해낼 수 없는 요소가 너무도 많습니다.
Q.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나요?
자랑이라 하기에는 그렇고, 그냥 제 연주 계획을 말씀드릴게요. 기간으로는 2019년 상반기까지 연주가 잡혀 있습니다. 그냥 생각나는 것만 말씀드리면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및 가곡들로 씨디 녹음 및 투어가 계획되어 있고, 말러 4번의 연주 및 씨디 녹음도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거슈윈의 노래들로 내년 크리스마스를 장식할 예정이고, 빈 필 단원들과 파리 샹제리제 극장에서 말러 뤼케르트 가곡집, 베르크의 일곱 개의 초기 가곡 등을 부르는 계획도 있어요. 현대음악으로는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과 안톤 베버른의 곡들로 불레즈 추모 연주회를 하고, 빈 방송교향악단, MDR 합창단과 함께 불레즈의 〈혼례의 얼굴〉 공연도 있습니다. 쾰른에서 진은숙 선생님의 〈말의 유희〉 연주도 있고요. 한국에서는 내년 10월에 예술의 전당 클래식 스타 시리즈에서 독창회가 있습니다.
Q. 2011년 통영국제음악제 레지던스 아티스트였고, 지난해에는 통영국제음악당 기획공연에 출연하셨습니다. 통영국제음악당 개관 전과 후 모두 통영에서 공연하셨던 만큼 통영과 인연이 남다른 음악가이신데요, 이번 '슈베르티아데' 공연을 앞두고 기대되는 점을 말씀해 주세요.
통영국제음악제는 저의 음악 여정에서 도저히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대상입니다. 2005년 스콜라 하이델베르크와 처음 연주하러 왔었는데, 초기부터 자주 초청되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통영국제음악제가, 곧 저의 현대음악에 대한 식견과 동시에 탄생하였고 또한 발전해왔다고 생각될 정도이니까요. 처음 음악제가 시작되어 제가 참여할 때에는 저 또한 현대음악의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제의 발전도상에서는 제가 유럽에서 활동 영역을 크게 확장하고 있었고요. 이제는 양쪽 모두 어느 정도 기량이 무르익어 인정받고 있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어느 한쪽 힘을 잃지 않고 둘 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해 청중들을 크게 만족시키는 음악제와 제 자신으로 남아서 계속 굳은 인연을 이어가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