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국제음악당에서 발간하는 잡지 『Grand Wing』에 실린 글입니다. 약 보름 뒤에 제대로 난리를 겪을 것을 꿈에도 모르고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는 글 -_-;
출근하자마자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했습니다. 연주자가 타기로 했던 김포-부산행 항공편이 취소되어 있더군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비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태풍이 부산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첼리스트 레오나르트 엘셴브로이히와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그리니우크가 인천공항에 도착해 김포 쪽으로 막 출발한 참이었지요.
연주자들을 비행기 대신 기차에 태우기로 하고 서울역으로 이동했습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서울사무국 A대리님께서 고생해 주셨지요. 저는 밴을 타고 진주역으로 가서 연주자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제가 가진 운전면허로는 1종 차량을 운전할 수 없어서 다른 분이 운전하시기로 했는데, 마침 태풍으로 그분 댁 지붕이 손상되는 바람에 다른 운전자를 섭외해야 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차량을 점검해 봤더니 기름이 없더군요. 미리 확인하고 주유 카드를 받아두지 않았다면 곤란할 뻔했습니다. 주유소를 찾아 기름을 넣느라 생각보다 시간을 더 허비한 끝에 조금 아슬아슬하게 진주역에 도착했습니다. 아침에는 비바람이 그렇게 몰아치다가 출발 직전에 그치더니, 진주에 도착하니 햇볕이 얼마나 쨍하던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연주자를 태운 기차가 한 시간도 넘게 지연 도착할 예정이랍니다. 태풍 때문에 철로에 문제가 생겼다고요. 오다가 보니 고속도로 일부 구간이 산사태로 막혀 있던 생각도 납니다. 이번 공연을 제안한 일본 기획사를 통해 연주자에게 제 휴대전화 번호를 전달하기는 했지만, 돌발상황이 생긴 참이라 일본에 연락해 연주자들 휴대전화 번호를 받았습니다.
레오나르트 엘셴브로이히와 알렉세이 그리니우크는 기차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모양입니다. 전화해도 받지 않더군요. 도착 예정 시각만 생각하고 엉뚱한 곳에 내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엇갈리는 일 없이 연주자를 잘 만났습니다. 저는 평소 연주자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조금 다른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드디어 여러분을 만나서 너무 기쁩니다!"
큰일 없이 잘 도착해서 참 다행입니다. 본격적인 재난 상황이었다면 저나 연주자나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요. 하루가 지나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그리니우크가 음악당에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첼리스트 레오나르트 엘셴브로이히는 아직 잠을 자고 있어요. 저는 간밤에 잠을 잘못 잤는지 며칠 전부터 목이 뻐근하던 것이 오늘따라 더 아파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순조롭지 못했던 '연주자 수송 작전'을 겪고 나니 예전에 겪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통영국제음악제 폐막 공연 전후로 연주자들이 타야 할 비행기가 줄줄이 결항했던 일, 다른 이동 수단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마산에서 인천으로 가는 버스가 ○○○김밥집 앞을 지나느냐 아니냐를 확인해야 했던 일, 어떤 연주자는 항공 일정이 꼬여서 다른 항공편으로 바꿔야 했던 일, 짐이 공항에 제때 도착하지 않아서 곤란했던 일…
예전에 한 대선배 공연기획자한테 들은 조언이 생각납니다. 공연기획자는 눈은 '하늘'을 보면서도 발은 '땅'에 닿아 있어야 한다고요. 예술을 다루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잘 챙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사실 발이 '땅'에 살짝만 닿아 있어서 현실적인 문제를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이렇게나 훌륭한 공연장에서 좋은 공연을 만드는 일에 제가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연주를 듣고 있으면 일하면서 힘들었던 것들이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이에요. 자다가 일어나 피아노 앞에 앉은 알렉세이 그리니우크가 연습 중에 때로 실수를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면 본 실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공연도 참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