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21일 목요일

글 쉽게 쓰기

글을 쉽게 쓰라는 말은 참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때때로 무책임한 말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확률밀도함수를 유도하는 방법을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끔 쉽게 설명해 보라. 할 수 있는 사람? 어이, 당신?

확률밀도함수를 알려면 '확률'과 '밀도'와 '함수'를 알아야 한다. 또 '분포'를 알아야 하고, '무한' 개념을 알아야 하며 미분과 적분을 알아야 한다. 이쯤 되면 평범한 초등학생이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고작 해야 초등학생 인지능력에 맞는 사례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끝내 알맹이는 빠지고 그저 '재미난 이야기'가 된다. 나는 처음에 확률밀도함수를 "유도하는 방법을" 설명하라고 했다. 그러나 알맹이를 빼먹은 설명으로 확률밀도함수를 유도할 방법은 없다.

"아빠 오늘 과학 강연 너무 재미있었어."

"그래, 뭘 들었는데?"

"응, 옛날에 그리스의 시라쿠사란 섬의 왕이 순금으로 왕관을 새로 맞추었는데 (…) 아르키메데스란 과학자가 (…) 목욕하다가 '유레카!'를 외치면서 발가벗고 나왔어. 아르키메데스는 '부력'의 원리를 알아낸 거지."

"와! 재미있었겠다. 그런데 '부력'이 뭐야?"

"부력? 그건 얘기해주지 않던데."

- 이정모, "절대로 불후의 명작은 쓰지 않겠다!"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 웹 저널, 12호: 2006년 9월. <http://crossroads.apctp.org/article.php?number=74> (2006년 9월 21일 읽음.)

음악도 마찬가지다. '트리스탄 화음'을 알려면 프랑스 6화음과 감7화음과 전타음(appoggiatura) 따위를 알아야 하며, 그에 앞서 일반적인 화성 진행 원리를 알아야 한다. 화성법을 배운 일이 없는 사람에게 트리스탄 화음을 어찌 설명할까?

쉽게 설명하면서도 그 속에 알맹이 한 조각이라도 담으려면 그 분야에 대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대가가 아닌 사람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까?

알맹이를 빼먹지 않아서 내용이 어려워지더라도 글발이 어렵지 않게 쓸 수는 있다. 초등학생이 낱말 뜻을 몰라서 사전을 찾는 일이 없도록, 있더라도 찾는 낱말이 전문용어뿐이도록 쓸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 없이 쓰는 말이 국어사전에 나오는 말인지 알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2009년 7월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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