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생활건강과 함께하는 서울시향 정기 연주회 진은숙의 Ars Nova Ⅱ
2006년 10월 13일 8:00 PM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J.S. 바흐 / A. 베베른, 6성부 리체르카레(<음악의 헌정> 중)
A. 베베른, 오케스트라를 위한 5개의 모음곡 작품
N. 그리니 / G. 벤자민, 3도 독주(17세기 오르간 곡)
브레트 딘, <카를로>
M. 라벨, <쿠프랭의 무덤>
작자 미상 / 진은숙,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14세기 사이프러스 섬의 사랑노래
중)
G. 벤자민,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겨울의 마음>
A. 비발디,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오페라 <그리셀다> 중)
I. 스트라빈스키, <풀치넬라> 모음곡
뤼디거 본(Rüdiger Bohn) 지휘
소프라노 서예리
아르스 노바(Ars Nova)는 원래 14세기 다성음악을 일컫는 음악용어로, 13세기
다성음악을 아르스 안티쿠아(Ars Antiqua)라 하여 이와 대비시킨 말이다. 그러나
이날 연주회 제목은 진은숙의 편곡 작품을 제외하고는 아르스 노바 양식과 별 관련이
없고, 다만 '새로운 예술'이라는 말뜻을 빌렸을 뿐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이 기존
작품과 비교해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관념은 신께 드리는 봉헌으로써 익명성이
장려되던 중세가 끝나면서부터 오늘날까지도 굳건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이데올로기다.
Avant garde, Neue Musik, Música Nova 등이 이를 반영하는데, 모두 아르스
노바와 관련이 없는 20세기 음악 용어들이지만 새로움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아르스
노바와 통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진은숙은 고음악 양식을 뜻하는 용어를 20세기
작품 위주의 연주회 프로그램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써 연주회의 특색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효과를 노린 듯하다. 즉, 새로움을 지향하면서도 전통과의 연결고리는 유지하려는
현대음악의 이상이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라는 제목으로 표현된 것이다. 연주회의
부제로 사용된 "EarlyNew"라는 조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연주회 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난다. 바흐와 그 이전 시대 작품이
현대 작품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것이다. 비슷한 구성의 연주회를 라디오로 들어본
적도 있는데, 2001년 브레멘 음악 축제에서는 리게티(György Ligeti)와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작품 사이에 바흐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이번 연주회는 바흐뿐 아니라
비발디, 그리니, 심지어 아르스 노바 시대의 작품까지도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유명
작곡가와의 연계성만이 아닌 시대가 낳은 전통 자체와의 연결고리를 부각시켰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현대음악과 시대적으로 인접한 낭만주의 및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과의 연계성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0월 17일에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가 있었지만,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날 연주된 작품 가운데 베토벤과의
양식적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홍성지의 작품뿐이며 나머지는 패러디나 콜라주
등의 기법을 위한 소재로만 베토벤을 다루었다. 20세기 이후의 음악이 바로크 시대
이전 양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이는 그것이 낭만주의
시대와 단절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음악학 논문이 아닌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이것을 보여주기는 곤란해 보이며, 따라서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 프로그램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음악의 3요소'로 선율, 리듬, 화성을 꼽는다. 그런데 20세기 이후의
음악에서는 여기에 음색을 더해서 '4요소'라고 한다. 그만큼 현대음악에 음색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뜻이다.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거대
편성보다는 고전주의 시대 이전과 같은 소편성이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연주회장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특히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처럼 울림이 많은 곳은
현대음악의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기에는 재앙과도 같은 환경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번
연주회를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귀로 전달된 느낌이 지휘자의
해석 때문인지 연주회장의 음향 탓인지도 헷갈릴 지경이었고, 이 때문에 시향의 연주에
대한 내 느낌은 그에 따른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바흐의 6성부 리체르카레가
너무 밋밋하게 들렸던 것, 베베른의 작품 10에서 베베른다운 음색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특히 3곡에서 특유의 리듬이 흐리멍덩하게 뭉쳐져 들렸던 것,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 피날레 연습기호 104와 114에 나타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롤러코스터 같은 상승 음형과 크레셴도가 영 제맛이 안 났던 것 등은 모두 일차적으로
연주회장 탓이라고 판단된다. 이날 연주회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대신에 LG 아트센터에서
열렸다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가 있었던
체임버홀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베베른(Anton Webern)이 편곡한 바흐의 <음악의 헌정> 중 6성부 리체르카레는
옛것과 새것이 교차하는 이번 연주회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리체르카레(ricercare; ricercar, ricercata, etc.)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있는 용어이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주제로 된 푸가(fugue) 정도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쉽게 말해 이 작품은 바흐 음악 양식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베른의 편곡에서는 베베른 특유의 음색이 녹아들어 있어서 모르고
들으면 베베른이 쓴 조성음악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 연주에서는 베베른의
그림자는 옅게 하고 바흐의 느낌을 더 살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앞서 말한
연주회장 문제도 있겠지만, 나중에 지휘자로부터 직접 들은 바로는 일부러 그렇게
해석한 측면도 있다고 한다. 나는 베베른보다 바흐의 특색을 더 살리는 것만이 연주회
성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정반대의 해석을 했다면 연주회장의
음향 때문에 소리가 듣기 싫게 뭉쳐서 오히려 난장판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안톤 베베른은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베르크(Alban Berg)와 함께
이른바 '제 2 빈 악파 (Second Viennese School)'의 일원으로('원조' 빈 악파는 물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다), 무조(無調; atonal)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본격적인 20세기 음악의 분수령이었으며, 현대음악이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대중의
머릿속에 단단히 심어놓은 장본인이다. 서양음악의 음계를 이루는 12개의 음을 모두
평등하게 다룬다는 이른바 '12음 기법'은 이후 현대음악의 절대적인 패러다임이 되었으며,
그 영향은 20세기 후반 이후 12음 기법이 작곡가들에게 극복의 대상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망령처럼 남아 있다. 한편, 인간이 12음 음악을 지각하고 인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혹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지각심리학과 정보이론
등 과학적 연구 방법에 의해 12음 음악을 구조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특별한 훈련이나
타고난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제시되기도 했다.
베베른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나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몹시 당황했던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던 나는 그래서 이번 연주회를 앞두고 베베른의 작품 10의 악보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만큼 열심히 연주회 감상 준비를
하지 않았을 대부분의 관객은 이 작품의 역사적인 한국 초연이 듣기 괴롭다는 의사를
온몸으로 표현했고, '요술의 전당'의 안타까운 음향 환경과 유난히 심했던 관객의
소음을 힘겹게 뚫고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느라 나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탓에 이른바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베베른
특유의 다양한 색채는 결국 내 귀에 이르기도 전에 흐릿하게 뭉쳐지는 비극을 맞았다.
그러나 소실된 소리를 상상해가며 들어본 결과 연주 자체는 매우 훌륭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나는 음반으로는 느낄 수 없던 신비로운 공간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요정이 빛을 뿌리면서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듯했다. 이런 식의 3차원적 공간감은
정상적인 가정용 2채널 오디오로는 재생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며, 나중에 고가의
오디오를 감상할 기회가 생기면 이 작품을 꼭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지 벤자민(George Benjamin)이 편곡한 그리니(Nicolas de Grigny)의 오르간
곡은 악기 편성이 특이했다. 트롬본 등의 저음 악기와 고음 목관악기를 사용하면서
중간 성부를 담당할 만한 악기를 쏙 빼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신기하게도
실제 오르간 소리와 매우 비슷했다. 연주회 프로그램에 나오는 하바쿡 트라버(이희경
옮김)의 설명을 보자. "옛 오르간 제작자들은 이미 한 음의 음색이 근음과 특정한
배음 스펙트럼에서 나온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오르간 제작에
적용했다. 그래서 단지 배음만을 포함하는 레지스터를 제작하여, 그것이 기본 레지스터와
함께 연주될 때 독특한 음색을 낳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레지스터의 하나가 '티어스(tierce)',
제 5부분음인 '3도'다. 조지 벤자민의 편곡은 바로 이러한 오르간 음향구성을 토대로
한다. 우선 트롬본이 주 성부를 연주하고, 고음 목관들이 제2부분음에서 제9부분음에
이르는 배음스펙트럼을 연주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오보에가
4옥타브의 '라'를 불었을 때 이에 해당하는 소리의 주파수는 약 440헤르츠다. 그러나
실제 오보에 소리는 440헤르츠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그 두 배(즉, 880헤르츠),
네 배, 여덟 배 등에 해당하는 소리가 섞여 있다. (귀가 예민한 사람은 피아노로
'도'를 눌렀을 때 '솔'이나 '미' 소리가 섞여 있는 것을 듣기도 한다.) 여기서 실제
음고에 해당하는 440헤르츠 성분을 '근음(fundamental)'이라 하고 그 배수열을 이루는
성분들을 '배음(harmonics; 인용된 설명에서는 '부분음')'이라 한다. 같은 음고로
소리를 냈을 때 악기마다 음색이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배음의 구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지 벤자민은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고음 목관악기가 트롬본의 배음을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오르간 음향을 흉내 냈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로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내기를 즐겼던 19세기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가 이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음악 이론가 카츠(Jonathan Howard Katz)는 "당신이 음악 이론 광(狂; geek)임을
나타내는 75가지 징후"라는 우스개 글에서 다음을 그러한 '징후'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과제물 등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 것에 대해) '하지만 제수알도는
이렇게 했었단 말이에요!' 하고 자신을 변호한 적이 있다." 음대생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16세기 및 18세기 화성법과 대위법에서 금기로 여기는 선율 및 화성 진행을
16세기 작곡가인 제수알도(Carlo Gesualdo)는 곧잘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가능한데, 당시로써는 이것이 대단한 파격이었겠으나 요즘 시각으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19세기를 지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전통적 조성체계의 해체를 경험한 뒤로는
대중음악에도 특이한 불협화음이 곧잘 쓰이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브레트
딘(Brett Dean)은 제수알도의 마드리갈 <나를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 두오 Moro,
lasso al mio duolore>의 녹음을 샘플링하고 20세기 음악 어법으로 관현악을 더해
새로운 작품 <카를로>를 썼다. 그 결과는 제수알도가 살인을 저지르던 날을
소재로 하는 공포영화에 어울릴 만한 음악이었는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샤이닝
The Shining>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큐브릭은 이 영화에 리게티와 펜데레츠키
등의 음악을 사용했지만, 만약 그가 <카를로>를 알았다면 틀림없이 영화의
주요 장면, 특히 긴장감이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는 후반부에 효과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를로>는 이 영화가
나온 지 17년 뒤인 1997년에 발표되었다. 가만, 혹시 브레트 딘은 차라리 이 영화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고 제수알도는 단지 소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벨(Maurice Ravel)의 <쿠프랭의 무덤 Le tombeau de Couperin>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 쿠프랭(François Couperin, II)을 추모하는 작품이다. 원래는
여섯 악장으로 된 피아노곡이지만, 라벨은 이중 네 곡을 나중에 관현악으로 편곡해
발레 음악으로 만들었다. "tombeau"는 '무덤'을 뜻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추모하는 예술작품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라벨은 원곡을 구성하는 6곡을
자신이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전우들에게 바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부제로 사용했으므로 추모의 뜻을 이중으로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양식적 특징을
살펴보면, 모음곡 형식과 장식음 등이 바로크 시대의 것을 빌어온 것이고, 선율과
화성 등은 라벨 고유의 것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에 쓰였지만, 20세기 음악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다르므로 낭만주의 시대 작품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날 연주는 지휘자 뤼디거 본(Rüdiger Bohn)이 현대음악 전문가인 만큼 현대음악적
특징을 강조하는 해석을 보였다. 즉, 주선율 뒤에 숨어있는 선율들을 전면으로 부각시켜
색다른(또는, 무기질적인) 소리의 질감을 이끌어내곤 했다. 템포는 다소 빠른 편이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자칫 어수선하게 들리기 쉬우며, 특히 예술의 전당의 음향 환경에서는
그러한 위험도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다행히 이날 연주는 지휘자가
의도한 독특한 매력을 잃지 않는 데 성공했다.
진은숙이 편곡한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Je sui trestout d'amour raimpli"는
14세기 키프로스 지역의 노래다. 키프로스는 터키 남쪽에 있는 나라로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지배를 받은 기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종교 및 정치적 알력에 따라 네
지역으로 분단되어 있다. 14세기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프랑스의
다성음악, 즉 아르스 노바 양식이 이곳에도 전해졌으며,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는
그 가운데 비를레(Virelai)라는 형식에 속한다. 곡을 이루는 세 개의 성부가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탓에 매우 복잡한 곡이지만, 성악과 반주의 관계 때문에 사실은 편하게
들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진은숙의 편곡은 1999년 작품인 <시간의 거울 Miroirs
des Temps> 중 다섯 번째 곡으로 쓰였는데, 베베른이나 딘의 편곡 작품과는 달리
편곡자의 색채가 옅은 것이 특이했다. 프로그램에 있는 트라버의 해설을 인용하자면,
"옛 것을 우리 시대로 끌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
고유한 본질은 그대로 남겨둔 채" 현대 악기로 키프로스의 특색을 살렸다.
진은숙의 편곡보다 더욱 눈에 띈 것은 소프라노 서예리의 엄청난 실력이었다.
그녀는 비브라토를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정확한 음정과 투명하고도 풍부한 음색을
유지하여 고음악에 매우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런가 하면 벤자민의
<겨울의 마음>에서는 폭이 좁고 빠른 비브라토를 소름이 돋을 만큼 정교하게
구사했으며, 비발디의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Agitata da due venti"에서는
발성구의 탄력을 이용하여 여러 음을 빠르게 오르내리는 이른바 아질리타(agilita)
창법을 그야말로 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빠른 템포로 정교하게 소화했다. 성량이
그리 큰 편은 아니라는 것이 옥에 티라 하겠으나, 이 역시 고음악 스페셜리스트에게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한국에 이런 가수가 있었나 했더니 웬걸, 진은숙이 독일에서
발굴했단다. 프로필을 보니 깜짝 놀랄 만큼 화려한데, 이 정도면 고음악 마니아들은
이미 서예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도 같다.
조지 벤자민(George Benjamin)의 <겨울의 마음 Mind of Winter>은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의 시 <눈 사람 The Snow Man>에서 제목과
가사를 따온 작품이다. '눈사람(The Snowman)'이 아니라 '눈 사람(The Snow Man)'인
까닭은 겨울 풍경의 클리셰(Cliché)로서의 눈사람이 아니라 "겨울 마음"을
가지고 눈 덮인 겨울 풍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눈과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고 겨울의
공허(空虛) 그 자체가 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육사가 인식한 겨울의 모습이 "강철로
된 무지개"와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 등이었다면,
스티븐스가 그린 겨울의 모습은 앙상한 나뭇가지와 황량한 대지와 그 속의 공허(空虛)함이다.
The Snow Man |
눈 사람 |
그런가 하면 조지 벤자민이 그린 겨울의 모습은 날카로운 고음의 불협화음과 음산한
글리산도, 심벌즈의 차가운 울림 등으로 가득한 음악이었으며, 차라리 "강철로
된 무지개"의 심상과 더 잘 어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요술의 전당'에서
흐릿하게 뭉쳐진 음향 때문에 뜻하지 않게 스티븐스의 겨울에 더 어울리는 부분도
많았다. 또 끝 부분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은 시의 마지막 연과 매우 잘 맞았다.
그러나 영어 가사가 한국의 정가(正歌; 가곡, 가사, 시조)처럼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탓인지 내용을 알아듣기는 몹시 힘들었다.
비발디의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Agitata da due venti"는 오페라
<그리셀다 Griselda> 중에서 그리셀다의 딸 코스탄자가 부르는 아리아로, 아버지
구알티에로의 명령과 연인 로베르토와의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자신의 처지와
폭풍을 만나 흔들리는 배를 동일시하는 내용이다. 이 곡은 이날 연주된 작품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곡인 동시에 서예리의 기교를 뽐내기에 매우 적당한 곡이라 할 수
있으며, 지휘자는 역시 빠른 템포로 몰아쳐서 서예리의 눈부시게 아찔한 테크닉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게 했다. 그런가 하면 "임무 때문에 사랑 때문에 Dal
dovere da l'amore" 대목에서는 템포를 충분히 늦추어 계속되는 속도감에 청중이
숨 막혀 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앞뒤 부분과의 속도감의 대비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은 발레 곡으로 작곡한 <풀치넬라>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성악 부분을 기악으로 고친 작품이다. <풀치넬라>는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를 비롯한 18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는데, 스트라빈스키는 발레단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로부터 새로 발견된 페르골레지의
자필 악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퍼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이며,
실제로는 사진으로 복사된 인쇄 악보였다고 한다. 다만 스트라빈스키가 페르골레지
등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며, 남의 작품을 인용하고 개작하는 것은
스트라빈스키 작품세계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독일의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카덴(Christian
Kaden)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스트라빈스키가 추구했던 것은 자기 변신(Selbstverwandlung)이었다.
그는 발전과 진보, "목표지향적인 발전, 고난과 역경을 딛고 별에 다가가는
것,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거부했으며, 대신 순환을 통한 갱신, "선(線)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그리고 무(無)시간적이고 신화적인 시간 안에서 선조의 음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을 추구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이루는 것은 이러한 순환의 속성을
가진 "흔들리는 고요함, 역동적인 고요함, 프랑스어로 calme dynamique"이다.
<결혼 Les Noces> 등의 작품에서는 이것이 종소리의 정적인 울림으로 나타나며,
<풀치넬라>에서는 진동하는 형식 모델(schwingende Formmodell)로 나타난다.
조성과 악장 배치, 템포와 박자 등이 순환적/대칭적 속성을 가지며, 고전적 양식과
새로운 기악적 테크닉이 진동하는 형식 모델 속에서 갱생한다.
이날 연주에서는 주선율과 부선율을 차별하지 않는 뤼디거 본의 '무정부주의적'
해석이 신선한 매력을 주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정교한 대위법이 그에 의해 입체적
"진동"으로 나타났다. 템포는 빠른 편이었고, 이것이 독특한 악기 간 밸런스가
주는 매력을 더욱 잘 살렸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빠른 템포 때문에 세부적인
프레이징에 나타난 연주자의 표정들이 다소 흐릿해진 감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7악장 "비보 Vivo"에서 콘트라베이스의 매력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던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연주회장의 음향이 충분히 좋았다면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르는 단점이다. 한편, 2악장 세레나데에서는 오보에 주자가 템포를 다소 느긋하게
잡고 솔로 연주를 하다가 두 번째 박에서 지휘자의 비팅을 보고 재빨리 템포를 수정하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가엾은 연주자는 6악장 가보트에서는 반대로 템포를
너무 빠르게 잡았다가 역시 둘째 박 비팅을 보고 템포를 늦추기도 했다.
커튼콜로 연주된 곡은 파헬벨의 <캐논과 지그>였는데,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연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곡이다. 조지 윈스턴의 늘어지는 템포 대신 매우 빠른
템포로 연주되었고, 모든 성부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해체적인 성격도 여전했다. 다시
말해 '정격적인' 템포와 '현대적인' 밸런스가 절묘하게 만한, 이날 연주회 성격에
매우 잘 어울리는 연주였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는 낭만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있는 작곡가로,
쇤베르크와 베베른 등에게 많은 영향을 준 현대음악으로 향하는 다리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의 음악은 당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지만, 지금은 그의 작품이 베토벤보다 더
자주 연주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말러의 대중화 과정이 오디오의 발전과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러 시대부터 점차 음색이 선율이나 화성 못지않게 음악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지만, 오디오의 재생능력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음악은 아직도 평범한 가정용 오디오로는
제대로 된 감상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오디오 기술이 더 발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 그보다 전에 연주회장에서 현대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연주회처럼 '현대음악 특집'도 필요하지만, 대중에게 사랑받는 레퍼토리와 함께 현대음악이
나란히 연주회 프로그램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이 브람스나 말러를 들으러 왔다가
버르토크나 리게티, 펜데레츠키를 '우연히'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인 진은숙의 작품이 더 자주 '보통 연주회(?)' 프로그램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터놓고 말하자면, 그래서 나는 진은숙이 많은 돈을 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품활동만으로도 많은 수입을 올리는 작곡가가 생기기를 바란다. 그래서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그를 보고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야구 선수 지망생들이 박찬호나
이승엽을 꿈꾸는 것처럼.
2006년 10월 28일 씀.
2006년 10월 30일 고침.
김원철. 2006.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