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글 다시 보니 참 부끄럽네요.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올립니다. ^^
앗, 이제 보니 제가 ☞'이졸데 리듬'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지어내 쓴 글이 바로 이 글이네요. ^^y
평점:
고클래식에서 음반 정보를 퍼왔습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칼 뵘
음악을 듣는 것은 다른 일을 하면서 배경음악으로만 즐기지 않고 집중감상을 한다면
참으로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일종의 호사 취미인 것 같습니다.
특히나 바그너는 음악 이외의 텍스트를 이해하지 않으면 그 맛을 충분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동안 공부 욕심을 내느라 음악 감상에 투자할 여유가 많지 않아서
바그너는 그 음향만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바그너보다는 말러의 교향곡을
더 많이 듣게 되었지요. 이제 대학 생활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고 백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한가한 시절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이 기회를 빌어서
바그너를 집중 감상해보기로 했습니다. 원철이의 바그너 집중감상 시리즈 그 첫 번째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입니다. 바그너 최고의 문제작이자 퇴폐성의 정점인 이 작품은
수많은 마에스트로들로 하여금 저마다 명반을 낳게 하였고, 또 수많은 사람이
훌륭한 음반 평들을 남겼을 것입니다. 저의 감상 초점은 객관성에 대한 강박을 지양하고
제가 좋아하는 부분들 위주로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제가 다루는 연주들은 아래의 다섯 종입니다.
Bohm / Nilsson, Windgassen / Bayreuth 1966 (DG)
Furtwangler / Flagstad, Suthaus / Philharmonia Orchestra London 1952 (EMI)
Kleiber / Price, Kollo / Staatskapelle Dresden 1982 (DG)
Goodall / Gray, Mitchinson / Welsh National Opera 1981 (DECCA)
Metha / Meier, West / Bayerische Staatsoper 1998 (스펙트럼 DVD)
가장 먼저 뵘의 연주에 대해 쓰겠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이제까지 들어본
어떤 연주보다도 이 연주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1막
처음 세 개의 음을 첼로가 연주할 때 크레셴도의 폭이 매우 큽니다. 여기서부터
뵘의 스타일이 나타나는데, 음악에 의해 유발되는 감정의 동요가 크레셴도의
폭만큼 큽니다. 이어서 다소 성급하게 터져 나오는(사실은 이것도 음향효과가
주는 착각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 유명한 '트리스탄 화음'은 제가 이제까지
들어본 어떤 연주보다도 훌륭합니다. 다른 연주에 비해 목관이 약간 '오바'를 해서
확 터져 나오는 것이 특이한데, 충분한 크레셴도에 이은 신기한 음향이 매우
좋습니다. 비슷한 멜로디가 서서히 커지면서 반복되다가 마침내 터져 나오는
'트리스탄의 번민' 모티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합니다. 이후로 서서히 진행되는
크레셴도와 클라이맥스에서의 오케스트라 총주는 몸서리 치도록 강렬합니다.
말러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뵘의 연주 스타일에 대해 잘 모르는데(뵘이 말러 녹음을
좀 남겼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이 연주를 듣고 나니까 뵘이 진정한 거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주곡에 이어지는 젊은 선원의 노래는 무심하게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배를 떠올리게 합니다. 갈매기 한 마리가 끼룩끼룩 날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는 꼬꼬마 시절 포항의 바닷가 방파제에서 놀던 기억을 떠올리고야
맙니다. 거기서 가사 뜻도 모르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저 머나먼 바다 건너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수가 누군가 했더니 페터 슈라이어네요.
이졸데의 "Brangäne, du? Sag', wo sind wir?" 직후부터 나오는 현의 멜로디는
흡사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배의 느낌을 실감나게 전해주는데, 사실은
젊은 선원의 노래에서부터 나오는 이 멜로디를 저는 1막에서 특히 중요한 요소로
생각합니다. 거대한 바다에 일렁이는 물결과 바람에 몸을 맡기고 떠밀려가는
배의 양상은 흡사 운명의 물살에 떠밀려가는 등장인물의 처지와도 같습니다.
꼭 이 멜로디가 아니더라도 뵘의 연주에서는 1막 전체가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특유의 리듬은 묘하게 도취적인 느낌을 주는데, 2막과 3막에서는
이것이 또 다르게 변형되어 나타납니다.
"Hort meinen Willen, zagende Winde!"에서부터는 이졸데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비르기트 닐손의 노래가 매우 훌륭합니다.
닐손에 비하면 브랑게네 역의 크리스타 루트비히는 목소리가 좀 가늘군요. ^^
브랑게네의 하이라이트는 2막에서 있을 것이지만, 1막에서도 잘합니다.
쿠르베날이 마침내 트리스탄을 이졸데 앞으로 데려왔을 때 나오는 분노한 이졸데의
모티프(파 솔 시b 라b - 미b 미b 레 레b 레b 파b)는 얼음장과도 같이 싸늘한 눈빛을
연상시키는데, 바이올린의 고음을 좀 더 강조했으면 더욱 좋았겠습니다.
트리스탄이 약을 마시는 장면에서, 이졸데의 "Verrater! Ich trink' sie dir"
부분에서 관현악이 발작적으로 울부짖습니다. 이것은 뵘이 진정한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함을 예고하는 것으로, 전주곡의 재현에 이어 점점 빠르게 몰아치는
극의 진행이 엄청납니다. 서서히 힘을 더해간 '운명의 물살'은 국왕 만세를 외치는
대목에서는 거대한 파도로 변해있습니다.
2막
1막 전주곡에 이어 우리는 바그너의 위대한 음향효과를 또 한 번 체험하게 됩니다.
1막에서의 충격이 그 화성에 있었다면, 2막에서 놀라운 효과를 내게 하는 것은
그 리듬입니다. 베이스 클라리넷이 상승하는 멜로디를 연주할 때(조급한 이졸데의
동기) 제2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오르락내리락하는 8분음의 셋잇단음을 연주하는데,
이때 셋잇단음 가운데 첫 음은 쉼표입니다. 이 신기한 현은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서 볼 수 있는 음향효과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들어본 다섯 개의
음반 가운데 뵘의 것을 빼고는 모두 이것이 들릴듯 말듯 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베이스 클라리넷의 길게 늘어지는 '라b'와 그 직전의 리듬
때문입니다. 즉 현의 셋잇단음이 문제의 '라b' 직전에 멈추기 때문에 문제의 두 음
사이에 묘한 리듬의 불일치가 생깁니다. 베이스 클라리넷이 분명히 정상적인 리듬으로
연주했는데도 현악기들의 '방해'로 인해 반 박자 빠르게 연주해버린 것처럼 들리는데,
이것이야말로 1막 전주곡에서의 놀라운 '트리스탄 화음'에 비길 만한
'이졸데 리듬'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뵘을 제외한 네 명의 마에스트로들은 현 소리를
잔뜩 죽여놓음으로써 그 신비함을 거세시켜 놓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뵘이 음표 사이의
의미를 읽고 아이디어를 내어서 연주한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석연치 않아
악보를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손바닥으로 박자를 쳐가면서(머리는 쥐어뜯어 가면서)
연구한 결과 뵘은 분명히 악보에 있는 그대로 연주한 것이었습니다.
전주곡에서의 신비로운 음향은 목관 악기에 의한 몽환적인 울림으로 이어집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이졸데의 심리상태를 이토록 훌륭하게 표현한 것도 역시
뵘을 능가하는 녹음이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신경질적으로 긁어대는 현은
이졸데의 심리상태의 변화에 집중하는데 최적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졸데와 브랑게네 역시 감각적인 관현악 반주에 걸맞게 훌륭한 노래를 들려줍니다.
"... Nacht, Zur Warte du: dort wache treu!"로 시작하는 이졸데가 불 끄는 대목에서는
1막에서 본 것과 같은 마녀(?) 이졸데의 가슴 사무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트리스탄 등장하기 직전 전주곡과 링크되는 부분에서 '이졸데 리듬'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트리스탄이 등장할 때까지 점점 빠르게 휘몰아칩니다.
마침내 트리스탄이 등장하고 두 사람의 무지막지한 고음을 확실하게 받쳐주는 뵘의
발작적인 관현악을 속이 후련하도록 즐길 수 있습니다.
"O sink hernieder"부터의 달콤한 사랑노래에서도 오케스트라는 넘실거리는 음향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면서 통상적인 사랑놀음 대신에 어둠의 그림자를 확실히
드리워 놓습니다. 어둠의 이미지는 자꾸만 높아지는 두 사람의 음계에서 섬뜩해질
정도가 됩니다.
여기에다 브랑게네의 두 차례의 아리오소는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습니다.
바그너는 이 부분에서 영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장면의 오버랩과 시선의 이동을
음악으로 보여주는데, 관현악은 자연스럽게 서정성을 더합니다.
드디어 '사랑의 죽음'과 링크되는 부분(So stürben wir)이 시작되면서 비독일계
지휘자가 흉내 내기 힘들 것 같은 호흡이 긴 크레셴도의 진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가수와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져 점점 긴장감을 더해가다가 마침내
두 사람은 자신의 존재감을 잊고 영원함(죽음)을 찬양하기에 이릅니다.
이름도 필요 없고,
헤어질 필요도 없으며,
새로운 느낌과
새로운 정열이
끝없이 영원히,
계속되고 느껴지며,
우리의 가슴속에는
불타는 사랑의 기쁨만이 계속되리라!
(번역: 허정윤, 출처: 고클래식)
이때 현악기들의 자꾸만 높아지는 음계와 자꾸만 빨라지는 리듬은 감정의 동요를
극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이 부분을 이토록 감각적으로 표현해낸 녹음
역시 뵘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마르케 왕 일당! 트럼펫이 마르케 왕의 등장을
알리고 이어 나오는 혼란스러운 리듬은 전주곡에 이은 2막의 또 하나의 묘미입니다.
뵘은 첼로와 콘트라바스의 저음을 확실히 강조하여 바그너식 음향을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바이올린, 비올라와도 마치 하나의 악기처럼 일체화되어서 그 리듬의
혼란스러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르티 탈벨라가 부르는 마르케 왕의 모놀로그는 울먹이듯 떨리는 목소리가
조금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역시 이 부분은 약간의 감동을 대가로 긴 지루함을
참아야 합니다. -_-;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지막 대화도 참 슬픕니다. "dem König, den ich verriet!"
부분에서 빈트가센은 감정 표현을 매우 격하게 했습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케스트라가 사정없이 휘몰아치다가 일시적으로 가라앉으면서
트럼펫 등에 의해 잠시 시선의 이동이 일어난 다음 다시 쾅! 하고 끝납니다.
사랑의 이중창 중에 나타나는 브랑게네의 아리오소와 비교할 만한 명장면입니다.
이 부분을 듣고 있으면 관객이 꽉 들어찬 오페라 무대보다는 차라리 카메라 워크가
역동적인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3막
전주곡 시작 부분의 모티프는 1막 전주곡에 나타나는 사랑의 동경 모티프를 단조로
바꾼 것으로, 처음 들었을 때 1막 전주곡 못지않은 충격을 준 신기한 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지독한 절망의 정서를 뼈 속 깊이 스며들게 하는 데에는
극의 흐름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단지 뵘이 만들어내는 음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뿔피리(잉글리쉬 호른) 솔로는 과거로 끝없이 침잠하여 마침내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 크게 앓아 누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만한 정서입니다.
지독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빈트가센의 트리스탄에서도 이어지며, 쿠르베날의
힘찬 목소리와 대조를 이룹니다.
뿔피리 소리가 바뀌는 대목에서는 악기가 트럼펫으로 바뀌어 있고, 이 때문에 멀리서
들려오는 뿔피리 소리치고는 꽤 큰 편입니다. 원래는 잉글리쉬 호른이 연주하도록
되어 있는 이 부분을 트럼펫으로 연주하기도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잉글리쉬 호른이라는 악기는 원래 이렇게 다이내믹한 연주를 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흔히 잉글리쉬 호른 하면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
2악장에 나오는 느릿한 민요 선율이지요. 원래의 속성이 이러한 악기로부터 팡파르와
같은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바그너는 연주자에게 '트럼펫처럼 연주하라'라고
했다는군요.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악기를 트럼펫으로 바꾸기도 한답니다.
뵘과 같이 발작적인 심리의 표현에 주력하는 해석이라면 트럼펫의 큰 음량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무대 밖에서 연주할 것도 없이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사실성이 너무 떨어지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뵘은
적당히 타협된 음량을 선택했습니다. 부족한 음량의 문제는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의
총주가 확실하게 메워줍니다. 쿠르베날의 '하이야! 하이 하하하하!'는 반전된 극의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이봐 디트리히, 자네는
나보다 한 수 아래라구!). 누군가 했더니 에버하르트 베히터랍니다. (이 사람 유명한
사람인가요? -,.-a) 뿔피리 소리가 바뀔 때부터 이졸데 등장 직전까지의 광분을
표현하는 데에는 역시 뵘에 필적할 만한 연주는 없습니다. 이것은 쿠르베날의 전투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졸데의 마지막 사랑의 죽음! 말이 필요 없습니다. 절묘한 템포와 도취적인 리듬,
긴 호흡의 크레셴도와 함께 자꾸만 상승하는 멜로디는 제가 이제까지 들어본 다른
어떤 연주보다도 감동적이며, 비르기트 닐손의 엄청난 독기는 한여름에도 몸에 소름이
돋게 합니다.
2003년 7월 24일 씀.
김원철. 2004.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