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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4일 금요일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 브람스 교향곡 1번 ― 다비트 아프캄 / 바이바 스크리데 / 서울시향

2010-11-18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 다비트 아프캄 David Afkham, conductor
협연 : 바이바 스크리데 (바이올린) Baiba Skride, violin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Beethoven, Violin Concerto
브람스, 교향곡 1번 Brahms, Symphony No. 1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본디 이날 지휘자가 마크 위글스워스였는데, 이 인간이 일정 취소하고 인디애나폴리스 오케스트라로 갈아탔음. 공식 사유는 건강 문제. 잊지 않겠다. -_-^


서양음악에서 셈여림이 음악적 표현 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때는 대략 18세기 중반부터였다. 악기가 크게 개량되고 터키(오스만 튀르크)에서 타악기가 수입되었으며, 여기에 고전주의 음악 양식이 맞물려 나타났다. 오늘날 쓰이는 셈여림 기호는 대부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만들었다. 그리고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에도 이러한 흐름에 따른 뚜렷한 셈여림 대비가 나타난다.

협연자 바이바 스크리데는 독주 바이올린으로도 뚜렷한 셈여림 대비를 만들었고, 그 중심에 이른바 '소토 보체'(sotto voce)가 있었다. 소토 보체란 본디 성악에서 쓰는 말로 여린 목소리를 뜻한다. 그러나 '피아니시모' 등과는 달리 그저 소리를 작게 내라는 뜻이 아니라 여린 소리로도 음악적 긴장감을 잃지 말고 돋보이게 하라는 뜻이다.

바이올린으로 가장 멋진 소토 보체를 뽐내는 연주자로는 바딤 레핀이 있는데, 윗활을 곧잘 써서 매끄럽게 빛나는 음색에 어찌 들으면 능글맞은 포르타멘토를 곁들이곤 한다. 스크리데는 그와 달리 가냘프게 늘어지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며, '소토 보체'라는 말 그대로 연주가 아닌 '노래'를 하는 듯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1악장에서 발전부를 한참 지나 g단조로 바뀌는 마디 330부터였다. 스크리데는 이곳에서 템포를 뚝 떨어트려 여린 소리를 내다가 오케스트라가 피치카토로 연주하는 마디 361에 이르러서야 아첼레란도 및 크레셴도를 거쳐 재현부로 돌아왔고, 그로써 재현부 으뜸화음이 눈부시게 돋보이기도 했다.

2악장에서는 둘째 변주가 끝날 무렵 쉼표와 셋잇단음이 네 차례 이어지는 대목(마디 27)에서 소토 보체와 함께 디미누엔도, 랄렌탄도, 루바토를 알맞게 섞어서 마치 울먹이는 듯한 효과를 불러온 대목이 가슴 뭉클했다.

3악장에서는 소토 보체를 빼놓더라도 곳곳에서 성악적 감수성이 묻어나는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이 돋보였고, 코다에서 그동안 쌓인 음악적 긴장감이 으뜸화음을 만나 폭발하면서 그 에너지가 독주 바이올린 f# 음에 집중되는 마디 331이 가장 훌륭했다.

카덴차는 크라이슬러 것을 연주했으며, 다만 2악장 카덴차는 첫 마디 아르페지오만 연주하고 넘어갔다.

지휘자 다비트 아프캄은 지난 9월 베토벤 교향곡 3번을 지휘한 로렌스 르네스처럼 현을 6-5-4-3-2로 편성했고, 악기 배치도 유럽식으로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을 좌우로 나누고 첼로 등을 가운데로 모았다. 로렌스 르네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또한 역사주의 연주에 영향받은 바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브람스 교향곡 1번에서는 현을 7-7-6-5-4로 부풀렸으며, 다만 관악기는 호른을 한 대 더블링(doubling)한 것을 빼면 2관 편성을 지켰다. 저음 현으로 갈수록 가볍게 편성한 탓에 이를테면 1악장에서 때때로 저음 현 음형이 잘 안 들리는 등 단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으로는 장점이 되었고,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이 좌우로 나뉜 배치에서 오는 '스테레오 효과'가 두드러지게끔 했다.

이를테면 3악장 곳곳에서 '스테레오 효과'가 멋졌으며, 4악장 이른바 '알프스 호른' 대목에서는 좌우로 펼쳐진 바이올린 소리가 물결에 반짝이는 아침 햇살처럼 빛났다. 4악장 코다에서 절정을 바로 앞두고 '음 하나하나를 매우 또렷하게'(ben marcato) 지시가 있는 마디 395-406에서는 '스테레오 효과'와 함께 마치 벌판에서 말 달리는 듯한 현 소리가 가장 돋보였다.

템포는 조금 빨랐고, 그 가운데 3악장이 제법 빨랐다. 4악장에서는 '알프스 호른' 대목과 제1 주제를 지나 경과구(transition)로 넘어가기에 앞서 아첼레란도를 주었는데, 그 뒤로 웬만하면 템포를 늦추지 않고 꾸준히 달리면서 음악적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다가 마지막에 크게 터트렸다.

호른이 '알프스 호른' 대목을 비롯한 곳곳에서 깔끔한 연주를 들려주었고, 이 곡에서 제법 비중이 높은 악기인 오보에도 훌륭했다. 그 가운데 오보에 수석 이미성은 서울시향이 개편한 뒤로 악단과 함께 꾸준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더욱 칭찬할 만하다. 이미성은 처음부터 직책이 '수석'은 아니었다. 그러나 음악적 표현력이 나날이 좋아져서, 지난해 1월 연주회 리뷰에서 글쓴이는 이미성이 "벽을 넘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성은 수석 단원이 되었으며, 이날은 더욱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서울시향은 정명훈이 지휘할 때 가장 뛰어남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젊은 악단'이기 때문일까. 서울시향은 젊고 솜씨 있는 지휘자를 만났을 때 깜짝 놀랄 만한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또 요즘은 전 세계적으로 지휘자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어서 젊고 훌륭한 지휘자가 곧잘 눈에 띈다. 그리고 1983년생 다비트 아프캄 또한 이날 연주를 들어 보니 크게 될 사람이 틀림없다. 이름을 기억해 두시라.

2009년 7월 13일 월요일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6)

지난 글 읽기: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1)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2)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3)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4)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5)



화성법이라는 '밑밥'과 고전주의 양식이라는 '떡밥'과 근대적인 악기 체계까지 자리 잡아 가던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귀족 중심 음악 문화가 자리 잡고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음악회마저 싹트던 때에도 정작 프랑스 파리에서는 음악회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 런던의 음악회는 이런 배경에서 발전했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정부와 귀족이 이런 관계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 왕실은 귀족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모든 예술 제도를 통제하였다. 오페라와 출판 분야에서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통제가 상당히 약화되지만, 음악회 쪽에는 변화가 없었다. 귀족들이 자신의 저택에서 음악가의 공연을 후원하기도 했지만, 런던에서처럼 공공 음악회 제도 안에서 후원 활동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243-4쪽)

18세기 후반 동안 소수의 직업 음악가들이 음악회를 열었지만, 정부는 그 수를 철저히 제한했다. 오페라를 보호하고 독립적인 음악계가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정부가 이렇게 규제하지 않았다면, 파리는 런던만큼 음악회가 활발했을 것이다. (243쪽)

- 이경희, "18-19세기 공공 음악회의 발전 과정: 파리, 런던, 비엔나를 중심으로."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5), 제8권, pp.241-263.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을 앞두고 프리메이슨이 앞장서서 프랑스에 음악회를 퍼트리려 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증거가 있다.

1769년 초 고섹(Gossec)이 창립한 '아마추어 음악회'(Concert des Amateurs)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것은 정기회원 기부자를 중심으로 한 기부 음악회였다. (...) 음악회는 대성공이었고 1781년까지 12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경희, 243쪽)

고섹(François-Joseph Gossec, 1734-1829)은 프리메이슨 ☞ 'Grand Orient de Belgique' 지부 회원이었으며 프랑스 혁명기를 주름잡은 작곡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별 주저없이 프랑스 혁명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프랑스와 조제프 고섹을 꼽을 것이다. 특별히 혁명의 불길이 거세게 번지고 있었던 1789년부터 1794년 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아무도 그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고섹의 위치는 확고했다. 흔히 그의 경쟁자로 지목되는 메율(Méhul)이나 르 쉬에(Le Sueur), 케루비니의 활동도 집정내각 시대에만 겨우 그와 겨룰 수 있을 뿐이다. (59쪽)

그는 음악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음색의 선택에 있어 매우 확실한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대중의 음악수준을 올려놓기에 적당한 그의 음악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선율은 딱딱하지 않으면서 절제되어 있고, 화성은 명확하고, 악기의 관용적인 처리는 항상 매우 정확하다. (60쪽)

- 민은기, "프랑스 대혁명의 음악사적 의의."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1997), 제2권, pp.33-85.

고섹 - 공화국의 승리(Le Triomphe de la République) 서곡 (c) Chandos

'아마추어 음악회'는 미국 독립전쟁을 맞아 돈 때문에 중단되었다. (미국과 프리메이슨이 어떤 관계인지는 ☞머리말에 있는 파토님 글 참고.) 그러나 음악회는 곧이어 프리메이슨 지부 이름을 딴 음악회로 되살아난다. 정황을 보아 음악회 후원자가 다른 프리메이슨 지부로 바뀌면서 좀 더 시민 중심으로 거듭난 듯하다.

'아마추어 음악회'가 중단된 지 얼마 안 되어, '올림픽 지부 음악회(Concert de la Loge Olympique)'가 시작되었다. 올림픽 지부 음악회의 모든 회원들은 프리메이슨 지부에 가입해야 했고, 입회는 기존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 1785년에는 남자 300명과 여자 102명이 회원이었고 점점 숫자가 증가했다. 회원의 출신 성분도 귀족에 한정되지 않았고, 은행가, 의사, 출판업자 등이 가입했고, 협력회원으로는 메훌(Méhul), 필리도르(Philidor)와 같은 음악가들도 있었다.

- James H. Johnson, Listening in Paris. A Cultural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p. 74. 재인용: 이경희, 243쪽.

프랑스 혁명기에 고섹의 경쟁자였다는 메율(Méhul)도 프리메이슨이었단다.

'올림픽 지부 음악회'를 만들고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던 사람은 고섹의 제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조제프 생조르주(Joseph Saint-George, 1745-1799)이다(Saint-Georges, Joseph Bologne,Chevalier de, NGD2). 생조르주는 이 음악회를 띄우려고 빈으로 가서 하이든에게 교향곡을 의뢰했으며(82, 84, 90, 91번)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이든도 프리메이슨이었는데 이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겠다.


생조르주는 흑인이어서 '검은 모차르트 Le Mozart noir'라 불렸단다.

다음 시간부터는 프리메이슨 음악가를 하나하나 알아보자.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5)

지난 글 읽기: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1)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2)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3)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4)



다시 프랑스 대혁명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때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노래가 오늘날 언론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말 기억하시는가? 혁명이 일어날 동안 노래는 어디에서나 들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노래가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곳은 아마도 광장일 터, 이때 흥을 돋우려면 악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프리메이슨이 혁명을 '기획'했다면, 그 얼개가 처음 마련되었을 1717년 즈음 악기는 어땠을까? 앞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어보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칸타타 BWV 80.
"내 주는 강한 성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조지 프리드릭 헨델, 샨도스 성가(Chandos Anthem) 제8번,
"와서 주님께 노래하자 O come, let us sing unto the Lord"

동영상에서 연주한 악기가 곡이 쓰였을 때 악기를 올바로 고증했는가 하는 문제를 제쳐놓더라도 저런 소리로 광장에서 혁명을 노래할 수는 없다.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빠졌거나 제 몫을 하지 못해서 기본적인 '음량'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에서의 하나의 혁명이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해 일어났다. 바로 오케스트라에 금관악기가 첨가되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관악기는 그 선명한 음색과 거대한 음량 덕분에 혁명기 가장 중요한 국가 행사였던 야외 축제에서 연주하기에 적당했다. 물론 대부분의 야외 축제 연주는 군악대 편성으로 (...) 무엇보다 혁명기의 야외축제가 오케스트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금관악기의 위상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혁명이전에는 간단한 군악대용 악기로 취급되던 금관악기는 혁명기의 대대적인 야외축제를 통해 그 음악적 표현 능력을 인정받았다. (...) 이 시기에 관악기 자체의 성능이 놀랍게 좋아진 것을 더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55-6쪽)

- 민은기, "프랑스 대혁명의 음악사적 의의."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1997), 제2권, pp.33-85.

악기는 옛날부터 꾸준히 변화 또는 발전해 왔으며, 표준 오케스트라 악기 체계가 뿌리내리려는 움직임은 대략 17세기 즈음부터 있었다.

그러면 과연 어떤 과정과 함께 바로크 시대의 혼합편성 오케스트라는 표준편성으로 넘어갔을까? 이러한 과정은 우선 오페라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수 계층을 대상으로 하던 초기 오페라는 베네치아를 거쳐 점차적으로 '대중화' 됨과 동시에 이태리를 벗어나 전 유럽에 확산된다. 유럽의 주요 도시 곳곳에는 곧 오페라 극장이 생겨났고 이 곳에서는 자국인의 작품 외에도 대량의 이태리 오페라 작품이 공연된다. 이러한 현상, 즉 작품들이 서로 교환되고 공연됨에 따라 오페라의 반주를 담당하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통일된 편성이 점점 더 필요시 되었던 것은 자유스러운 결과였다 할 수 있다. 즉 오페라의 특정 지역을 초월한 국제적 확산은 초창기 몬테베르디가 요구하였던 다양한 악기편성에 따른 비현실성에서 벗어나 점점 더 표준적 편성으로 자리잡아 가게 된다. 물론 원래부터 이 편성을 기준으로 작곡도 되었지만, 설사 다른 편성을 토대로 하는 작품일지라 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현실성에 맞게 악기를 바꿔 공연하는 것도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풍토였다. (123쪽)

- 연상춘, "바로크 오케스트라에서 고전 오케스트라로."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1999), 제2권, pp.115-135.

그러나 근대적인 오케스트라 악기 체계가 자리를 굳힌 때는 18세기 즈음이었으며, 이와 함께 악기가 '혁명적으로' 개량되었다.

18세기는 악기 제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피아노-포르테의 탄생과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개량은 작곡가와 연주가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또한 오케스트라 규모의 확대로 작곡가들은 더욱 다양한 음색을 자유롭게 표현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민은기, 55쪽)

또 18세기 중반 터키(오스만 튀르크)가 유럽을 침공하면서 타악기가 유럽에 수입되고 터키 음악이 유행하기도 했다.

터키 행진곡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지 싶은,
베토벤 교향곡 9번 (1824년 초연) 4악장 가운데 "alla Marcia"
유튜브에 요 대목만 딴 오케스트라 연주가 없어서 만돌린 독주를 올린다. -_-;

이 전쟁을 프리메이슨이 부추기지 않았을까를 의심할 수도 있겠으나 휴머니즘을 앞세운 단체가 이런 짓까지 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이 타악기 수입에 관여했을 수는 있겠고 관악기 개량에도 앞장섰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당시 악기 제작자를 아무리 캐 봐도 도무지 증거가 없다. 김원철이 염력으로 '뷔뷔뷔' 해보면 이 사람들 모조리 프리메이슨 맞는데 물증이 없으니 이거슨 음모가 틀림 엄따!


...응? 곱게 미치라고? 알았다. -_-;

사실은 하나 찾은 게 있기는 한데, 관악기가 아니라 현악기다.

첼로가 표현력을 지닌 독주악기가 된 데에는 연주 테크닉의 개발로 악기의 기량을 충분히 드러내 줄 수 있게 해 주었던 뒤포르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빠리 국립음악원에서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훌륭한 첼로 연주자들을 길러냈을 뿐만아니라, 1815년에 출판된 <첼로의 운지법과 활의 사용법 Sur le doigté du violoncelle et sur la conduite de l'archet>이라는 논문에서 새로운 첼로 연주 테크닉을 소개하였다. (민은기, 56쪽)

뒤포르(Jean-Louis Duport, 1749-1819)는 후원자였던 Baron de Bagge(바그 남작?)과 더불어 프리메이슨이었단다(Jean-Louis Duport, NGD2). 바이올린 발전에 이바지했던 슈포어(Louis Spohr, 1784-1859) 또한 프리메이슨이었으나 이 양반은 프랑스 대혁명과는 시기가 안 맞는다.

이번 시간에는 헛소리가 많았다. 다음 시간에는 프랑스 대혁명을 앞두고 프리메이슨이 '본색'을 드러내던 정황을 살펴보겠다. 이건 증거가 제법 많고 구체적이다.


다음 글 읽기: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6)

2009년 7월 1일 수요일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2)

프리메이슨이 프랑스 대혁명을 '기획'했다는 주장을 '머리말'에서 소개한 바 있다. 생각이 안 나는 분은 머리말로 돌아가 읽어보시라. 이 글은 그 주장을 바탕으로 하기에 머리말을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으면 곤란하다.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1)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0/Freemasons.hall.london.arp.750pix.jpg
프리메이슨 그랜드 랏지. CopyLeft by Adrian Pingstone

영국으로 도망가 숨어 살던 그들은 1717년 런던에 그랜드 랏지(The United Grand Lodge of England)를 세우면서 조금씩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까지 72년 동안 그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질문을 바꿔보자. 혁명을 일으키려면 무슨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 계몽주의 사상?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대부분 프리메이슨이기는 했으나 그들이 조직의 '명령'에 따랐다기보다는 개인과 조직의 이해관계가 맞물렸다고 보는 게 옳겠다. '혁명 기획자'가 보기에 혁명이 성공하게 하려면 무엇이 실질적으로 가장 시급한 과제였을까?

계몽주의 사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지식인 계층뿐이다. 인터넷도 텔레비전도 없던 18세기 프랑스에서 글을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못살게 굴어도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못했다. 이들을 계몽시키려면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성을 먼저 파고들어야 한다. 무엇이 필요했을까? 바로 노래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이 곡을 작곡한 루제 드 릴(Claude Joseph Rouget de Lisle, 1760-1836) 또한 프리메이슨이었다고 한다.

즉 혁명노래를 분석 연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혁명노래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주도세력들은 혁명이 시작된 직후부터 자신들의 새로운 이상을 민중에게 전달하고, 보다 많은 수의 민중을 혁명에 동참시켜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다. (40쪽)

그러나 실제로 '잠자던' 민중들을 깨워서 혁명 투사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대로 그들은 노예상태에 이미 익숙해 있었고, 자율적인 사고능력은 물론 기본적으로 글을 읽거나 혁명법의 의의를 이해할 능력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너무나 수동적이어서 스스로 혁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주도세력에게 있어 혁명 노래는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민중교육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일반인의 언론의 자유를 허락했던 혁명은 정치노래들을 자유롭게 부르고 창작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를 적극 장려하였던 것이다. (41쪽)

프랑스대혁명기에 있어 노래가 차지했던 비중은 그 기간동안 출판된 노래의 수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특별히 1889년 혁명 100주년 기념 사업이었던 '프랑스 대혁명 관련자료의 출판 (Publications relatives à la Révolution française)'의 일환으로 꽁스땅 삐에르(Constant Pierre)가 정리한 혁명기 음악 목록에 따르면, 혁명기에 출판된 노래는 거의 3000개에 이른다. 제한된 시기(1789년-1800년)에 제한된 장소(프랑스)에서 이렇게 많은 숫자의 노래가 작곡된 예는 음악사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40쪽)

노래의 전달 파급 효과는 상당하였다. 노래는 어디에서나 불려졌다. 거리, 공원 등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노래가 불려졌다. 또한 속속 탄생한 새로운 노래는 순식간에 전국에 알려졌다. (68쪽)

혁명기의 노래의 주제는 그 연주장소 만큼 다양하다.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 주요한 법률내용, 정치적 군사적 사건 등 당시 노래는 혁명에 관한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노래는 모든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으며 문맹율이 매우 높았던 당시의 대중에게 오늘날의 언론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42쪽)

결국 혁명주도세력은 혁명이 진행되어 갈수록 음악을 매우 강력한 도덕적, 시민적, 공화주의적 교육수단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음악을 국민교육수단으로 사용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음악은 결국 화음이며, 음악이 갖는 환유작용을 통해 사회 속에 조화와 일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음악은 에너지라는 사실이다. 혁명을 일으켰고, 인권과 공화정을 방어함으로 혁명을 지속시키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바로 그 에너지가 음악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67쪽)

결론적으로, 음악을 도덕적, 시민적, 공화주의적 교육의 수단으로 사용한 혁명정부의 전략은 성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 건립된 음악교육기관이 양성해낸 음악가들, 새 음악출판소의 활발한 출판작업, 전 국민에게 확산된 노래운동, 대규모 화합의 장이 되었던 국가 축제 등이 혁명정부의 목표를 달성하는데에 결정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9쪽)

잦은 쿠테타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과 빈부격차가 확대되던 이 시기에 사회적 통합은 이루기 힘든 목표였으나 그것은 거의 국가적 강박관념의 정도로까지 강조되게 된다. 당시 이러한 국가적 필요를 음악만큼 훌륭히 수행할 분야가 없었다. (70쪽)

- 민은기, "프랑스 대혁명의 음악사적 의의."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1997), 제2권, pp.33-85.

그런데 문제가 있다. 수많은 노래가 생겨나 널리 퍼지려면 부르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나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프리메이슨이 '음모(?)'를 꾸미던 1717년 당시 음악이 과연 그랬을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칸타타 BWV 80.
"내 주는 강한 성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조지 프리드릭 헨델, 샨도스 성가(Chandos Anthem) 제8번,
"와서 주님께 노래하자 O come, let us sing unto the Lord"

이른바 '바로크 양식'으로 불리는 이러한 음악은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누구나 쉽게 따라부를 수 있고 아마추어도 조금만 배우면 어렵지 않게 작곡을 할 수 있게 하려면 먼저 바로크 양식이 다른 양식으로 바뀌어야만 했고, 그에 앞서 이론적인 바탕을 마련해야만 했다. 혁명이 닥치고 나면 이미 늦다.

프랑스 대혁명은 (...) 10년이라는 기간은 그것이 아무리 정치, 경제, 사회적 격변기라고 할지라도, 음악적 내용에 있어 '혁명적'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음악 역시 그 이전시대의 음악과 비교하여 볼 때 혁명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음악에도 만약 혁명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음악의 역할과 위치, 음악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작곡가들의 생각이나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민은기, 34쪽)

그래서 프리메이슨은 바로크 양식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고전주의 양식'으로 바꾸려고 1717년부터 '밑밥'을 뿌려둘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다섯 해 지나 '☞화성법'이라는 큼지막한 밑밥이 마련된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2/Rameau_Traite_de_l%E2%80%99harmonie.jpg

장-필리프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의 1722년 논문 <화성론 Treatise on Harmony>

18세기 프랑스 제일의 음악가 장 필립 라모는 짜를리노(Zarlino, 1517-1590)에서 가져온 12선법의 체계를 가지고 18세기 계몽주의의 실제와 근거를 바탕으로 음향학의 법칙으로부터 화성의 기초 원리를 이끌어 낸 최초의 이론가이며, 전통적으로 현대 화성이론의 창시자이다. (112쪽)

- 용정희, "라모의 화성이론에 나타난 음악사상과 배경."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2005), 제10권, pp.112-129.

라모와 프리메이슨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라모가 프리메이슨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Stanley Sadie, "freemasonry and music." The Oxford Companion to Music.) 또 프리메이슨 집회(예배?)에서 라모가 쓴 오페라 아리아를 불렀다고도 한다. (Masonic music, NGD2)

프리메이슨 및 계몽주의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라모의 화성 이론이 서양음악사에 끼친 영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음악을 이루는 바탕이 ☞대위법에서 화성법으로 바뀌면서 근대적인 ☞호모포니가 뿌리내리게 했다. 주선율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화음이 뚜렷이 나뉘어 음악 짜임새가 단순해졌고, 그에 따라 비전문가가 작곡을 배우기가 더욱 쉬워졌다. 혁명기 10여 년 동안 프랑스에서만 3,000여 곡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직업 음악가뿐 아니라 아마추어 작곡가들도 앞다투어 혁명 노래를 썼기 때문이며, '라 마르세예즈'를 작곡한 루제 드 릴 또한 아마추어 작곡가였다. 그리고 그들이 있기에 앞서 라모가 마련한 이론적 바탕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둘째, 라모는 화성 진행 원리를 뉴턴 중력 이론에 빗대어 설명하고 음악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생각을 퍼트렸으며, 이에 따라 음악 이론과 계몽주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고전 역학에서 물체의 정지 또는 운동 둘 중 하나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처럼 조성음악도 두 개의 상태, 즉 협화음과 불협화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모의 역학적 표현에서 협화음은 역학의 평형과 같고 협화음은 완벽한 정지와 안정 상태를 구성한다. 불협화음은 바꾸려는 힘이며 이러한 경지를 파괴한다. (용정희, 116쪽)

라모가 생각하는 화성학의 진정한 가치는 각 화음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화성연결과 함께 보았다. 한 화음에서 다른 화음으로 연결을 지배하는 화성 진행의 원리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화성진행은 기초저음에서 출발한다. (126쪽)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베토벤에 이르러 "고난을 거쳐 별들의 나라로 per aspera ad astra"라는 말과 더불어 인류가 무한히 발전하고 진보하리라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오로지 예술과 학문만이 인간을 신의 경지로 들어 올린다."
"우리에게는 도덕규범이 그리고 우리 위에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 칸트!!"

- 루트비히 판 베토벤, 작곡 노트에서.

계몽주의적 음악관은 20세기에 들어 모더니즘으로 이어졌으며, 음악학자 카덴(C. Kaden)은 이를 두고 "일종의 역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비약적인 발전"이라 평가했다. 그리고 스트라빈스키가 그 믿음을 배신하고 목표지향적 발전을 거부한 음악을 내놓았을 때 다음과 같은 비난을 견뎌야만 했다.

"그는 지붕을 뜯어내 버렸고, 그래서 이제 그의 대머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 - T. 아도르노

"진실성 없는 음악" "속이 비어 있는 것으로는 피리를 불기 쉽다" - E. 블로흐

"근심이 없는 작곡가" - A. 베르크

- Christian Kaden, 나주리 옮김, "20세기의 음악과 세계관: 스트라빈스키의 경우."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2006), 제11권, pp.209-230.

다음 시간에는 화성법이라는 '밑밥'이 어떻게 고전주의라는 '떡밥'으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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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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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6)

2009년 6월 24일 수요일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음모론이라 하면 허무맹랑한 소리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모든 음모론이 헛소리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굳이 글 제목에 '재미로 보는'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먼저 음모론을 다룬 일반론을 살펴보자.

"이러한 음모이론이 불신과 냉소를 받는 것은 두가지의 다른 이유에서 기인한다. 첫째, 음모 이론은 그 진위 여부를 아예 검증할 수도 없도록 짜여진 논리 구조로 자의적인 인과 관계를 설정하는 비과학적 이론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들이 통념으로 갖고 있는 상식에 비추어 기상천외한 원인을 들먹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을 음모이론으로 몰아 잘못된 것으로 공박하는 주장들을 볼 적에 이 두 가지를 잘 구별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두 번째 종류의 이유에서의 비판은 자칫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통념과 다르다는 이유에서 무조건 기각해버리는 반대의 지적 오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론이 음모이론인지 아닌지는 첫 번째의 관점 즉 그 이론이 철저하게 "과학성"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3> I. '음모'에 대해 말해보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30326155444&Section=

1908년에 설립되었으며 서울 이태원에 있는 프리메이슨 '한양 롯지.' 부산과 경기도에도 프리메이슨 지부가 있다고 한다. 원래 단체 사진을 링크로 걸었다가 홈페이지 개편하면서 사진이 없어져서 약도로 바꿈. 태극 문양과 프리메이슨 컴퍼스가 합쳐진 로고가 신기하다. 그림 출처: 프리메이슨 한양 롯지 홈페이지 http://www.hanyang-masons.org

이제 '음모론'이 아닌 검증된 사실을 하나 살펴보자.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미국이 지난해 AIG에 지원한 공적 자금 1,730억 달러 가운데 500억 달러쯤이 올해 초 미국의 다른 금융기관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스위스,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으로 몰래 흘러들어 갔다고 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서는 AIG 공적자금 쓰임새를 밝힐 수 없다고 했단다.

AIG는 '그림자 정부'의 빨대? - 프레시안 2009-03-09 오후 2:46:35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309110805&section=05

위 기사에서 '그림자 정부'라 부른 비밀 집단 가운데 제법 겉으로 드러난 모임이 있다. '빌더버그 회의'라는 비밀 모임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문 기사 링크를 빌리겠다.

한국경제신문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6061288361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50605090844&Section=

민중언론 참세상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22079

링크한 기사를 보면 로스차일드 집안이 빌더버그 회의에 돈을 댔다고 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리메이슨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으며, 이 집안 자본이 IMF 사태를 계기로 한국에도 들어왔단다.

로스차일드 펀드에 놀아난 정부와 만도기계
- 이정환닷컴 http://www.leejeonghwan.com/media/archives/000660.html

인터넷 검색해 보니 삼성증권이 로스차일드와 손잡는다는 기사도 있다

머니투데이 기사
http://stock.mt.co.kr/view/mtview.php?type=1&no=2008110509533987940

이제 진짜 음모론을 하나 소개하겠다. 링크는 연재물 가운데 첫 글일 뿐이니 이어진 글을 모두 차분히 읽어보시라.

http://blog.naver.com/patomusic/120007969434
http://blog.naver.com/patomusic/120007970578
  ┗ 6회부터 그림이 깨져서 다른 링크를 덧붙인다:
http://www.nomad21.com/bbs/uboard.asp?id=nomad_gisa&u=2&u_no=43
http://www.nomad21.com/bbs/uboard.asp?id=nomad_gisa&u=2&u_no=78
http://www.nomad21.com/bbs/uboard.asp?id=nomad_gisa&u=2&u_no=152

김원철의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은 파토님 음모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파토님 음모론보다는 더 많은 억측이 들어갈 것이다. 처음에는 꼼꼼하게 자료를 모아 정리하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자료를 날려 먹었다. 아까운 자료에 묵념..;;

그래서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김원철이 귀차니즘을 얼마나 이겨내고 꼼꼼히 자료 조사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재미로 보는'이라고 미리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기다리시라, 커밍쑨~ ㅡ,.ㅡa


일러두기.

1. 사실이 음모론으로 잘못 알려지는 일을 막고자 앞으로 본문에서 사실과 추측을 구분해서 쓰겠다. 문장이 단정적이거나 참고 문헌을 밝힌 대목은 널리 알려진 음악사 문헌으로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있으니 그대로 믿어도 좋다.

2. 문헌 출처 가운데 'NGD2'라 줄여 쓴 것은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2nd Edition의 온라인판인 Grove Music Online을 가리킨다.

3. 문헌 출처 가운데 'MGG'라 줄여 쓴 것은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의 온라인판인 MGG-Online을 가리킨다. (그러나 김원철이 MGG를 인용할 일이 있을까 싶다. 독일어 읽기 귀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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