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흐라챠 아바네시안(Hrachya Avanesyan)은 아르메니아 출신 벨기에 사람으로 독일 쾰른 음대를 졸업하고 칼 닐센 콩쿠르, 예후디 메뉴힌 콩쿠르 등 세계 정상급 콩쿠르에서 우승한 떠오르는 스타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루크 쉬(Luke Hsu)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현재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이고, 콩쿠르 입상 경력은 흐라챠 아바네시안과 견주면 초라합니다.
이 두 사람이 2014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라이벌로 만났습니다.
저는 콩쿠르 참가자들의 이름과 경력을 얼핏 보기는 했지만, 다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선 경연을 지켜봤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람'이 줄곧 탁월한 연주를 했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중국 사람'은 어딘가 불안정한 모습과 동시에 번뜩이는 천재성을 내비치면서 감탄할 만한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2차 본선이 끝나고 나서, 이제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이 두 사람이 1위와 2위를 놓고 다투게 되리라 예상했습니다. 흐라챠 아바네시안이 근소한 차이로 루크 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결선에서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로 무대에 올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흐라챠 아바네시안이 큰 실수를 잇달아 저지르면서 연주가 엉망이 되고 말았지요. 그동안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무너질 줄 저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순서로 뽑히면 압박감이 어마어마해서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더니, 그래서였을까요.
두 번째 무대에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대단한 명연을 펼쳐 2위를 거머진 한국의 설민경 씨에 이어, 루크 쉬가 아바네시안과 같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첫 번째 무대에서 이미 승부는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지만, 다시 한 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루크 쉬가 들려준 연주가 너무나 엄청났던 것이지요. 연주를 듣는 내내 전율을 느끼던 저는 협주곡이 끝을 향해 달려갈 무렵에는 터질 듯이 뛰는 심장 고동과 함께 루크 쉬의 광기에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차분함을 되찾은 지금 돌이켜 보건대, 아바네시안이 실수 없이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더라도 우승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어딘가 불안정하다고 느낀 모습의 정체는, 말하자면 천재의 광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을 적나라하게 밝힐 줄 아는 소설가처럼, 멋지게 보일 생각을 버릴 줄 아는 배우처럼,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광인은 탁월한 예술가가 될 자격 하나를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기도 합니다.
루크 쉬가 바로 그런 천재였습니다. 입을 헤 벌린 채로 오케스트라 연주에 바보처럼 몸을 흔드는 모습과, 브람스 작품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격정적인 파토스가 겹치면서 광기와 예술의 접점이 만들어졌고, 그 연주를 듣던 저는 보통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한 발 디뎌 본 듯한 경험을 하게 되었지요.
돌이켜 보면 루크 쉬가 본선에서 연주한 윤이상 연주도 탁월했습니다. 특히 2차 본선에서 연주한 《대비》(對比; Kontraste)를 듣고 저는 이 사람이 윤이상 특별상을 받게 될 것이라 예상했고, 실제로 그랬지요. 어쩌면 이때 천운(天運)이 루크 쉬에게 깃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는 윤이상 특별상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 우승까지 해왔거든요.
마지막 순서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배원희 씨가 설민경 씨 못지 않은 명연을 펼치면서, 흐라챠 아바네시안은 끝내 4위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가 입상자 순위 밖으로 밀려난 것이지요.
음악 '비즈니스'에서는 실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루크 쉬가 앞으로 얼마나 성공한 음악가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루크 쉬보다 먼저 스타가 될 듯한 흐라챠 아바네시안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입상자 출신이라 자랑할 수 없게 되어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러나 루크 쉬가 이날 보여준 광기 어린 천재성을 앞으로도 계속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결국 음악사에 거장 연주자로 남을 겁니다. 그때 저는 자랑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우승자 출신이라고, 제가 이날 거장 연주자의 젊은 시절을 보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