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에서 개별음은 고정되어 있어 다른 음과 관계를 맺으면서 음악적 의미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동아시아 음악에서는 개별음이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소우주를 형성한다. 윤이상은 이것을 붓글씨와 펜글씨의 차이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고, 또 도교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동양에서는 사람이 혼자서 음악을 만들지 않으며, 음향이 이미 그곳에 먼저 존재합니다. […] 그러므로 동양 사람들이 말해오기를, 음악이란 작곡하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주에 작은 부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1960년대 유럽에서는 전통적인 화음 개념을 확장한 이른바 음 덩어리(cluster)로 선율·리듬·화성을 사실상 무력화하고 음색 또는 ’음향’을 전면에 내세운 음악이 나타난다. 윤이상은 이것을 받아들이되 음 덩어리를 이루는 개별음을 동아시아적 의미에서 ’살아있는 음’으로 바꿈으로써 헤테로포니를 폴리포니의 틀 속에 담아냈다. 살아있는 음이 모여 살아있는 화음, 살아있는 음향층을 이루는 것이 윤이상 음악 어법의 핵심이며, 이로써 작곡가는 동아시아 음악의 음향을 서양 악기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윤이상이 주목한 동아시아적인 아이디어를 서양음악 어법으로 옮기려면 수많은 장식음과 트릴, 글리산도, 속도가 변하는 비브라토, 셈여림의 복잡한 변화 등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윤이상 음악에서 음들이 살아 움직이는 ’양식’은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더 한국적인 울림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1960년대 윤이상 작품과 견주면, 1987년 작품인 ‹융단›(Tapis pour cordes)에서 살아있는 음은 더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때로는 뚜렷한 선율과 협화음을 앞세우기도 한다.
이 시기에 작곡가는 음악 외적인 ’메시지’를 음악에 담기 시작했고, 때로는 정치적인 신념을 담거나 음악으로 해탈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융단›은 음악 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곡 첫머리에 등장하는 단3도 상행 음형이 되풀이해 나타나고, 그 가운데 현악기가 연주하는 ’살아있는 음’이 다채로운 빛깔로 마치 실뜨기를 하듯 소리를 빚어내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