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인이 세계 정상급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하는 일이 잦습니다. 외국 유명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는 한국 오케스트라도 있지요. 통영국제음악당을 포함해 국제 표준에 근접해 가는 공연장도 생겼습니다. 그 밖에 여러 면에서 한국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한국에 서양음악이 도입된 지 100년이 넘은 오늘날 모습입니다.
한국 클래식 음악계가 오늘날 모습을 하기에 앞서, 말하자면 '근대화'라고 할 만한 흐름이 대략 1980년대 후반부터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유학한 음악가들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한국에 귀국하기 시작했거든요.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그 시간을 크게 앞당긴 사건이 있었습니다. 임헌정 지휘자가 이끌어낸 오케스트라 혁신입니다.
임헌정 지휘자는 1988년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창단해, 몇 해 지나지 않아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줬습니다. 그때까지 한국 오케스트라가 낼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던 소리를 들려주었던 것이지요. 무엇보다 뜨겁게 타오르는 현악기 소리가 압권이었는데, 부천필 내부인 의견을 좇자면 이른바 '사이토 키넨' 모델이 대성공을 거둔 사례라 할 만합니다.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가 창단한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는 같은 학교 학생으로 현악 파트를 꾸림으로써 음색과 연주법에 통일성을 높여 짧은 기간에 오케스트라 수준을 크게 높였지요. 임헌정 지휘자 또한 모 대학 교수 지위를 십분 활용해 비슷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학교 출신 연주자에게 차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할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론에 보도된 창단 직후 부천필 환경이 충격적으로 열악했다는 사정을 헤아리고 나면, 당시로써는 그것이 최선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임헌정 지휘자는 1999년부터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에 도전하여 클래식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말러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유명한 작곡가가 아니었고, 말러 교향곡을 좋아하는 사람이 염세주의자 취급을 받기도 했지요. 그러니까 국내 최초로 말러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 임헌정 지휘자와 부천필입니다.
부천필이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제가 처음 들은 때는 군복무를 시작하고 약 석 달이 흘렀을 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연주회 날짜에 맞춰 휴가를 가려고 했지만, 끝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억울한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휘자의 건강이 나빠져서 연주 일정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덕분에 저는 제대 후 말러 교향곡 5번부터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러 교향곡 5번 공연이 있던 날은 히딩크 감독이 이끌었던 월드컵 국가대표 축구팀이 이탈리아에 맞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부천필은 설마 한국 팀이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거두리라고는 예상치 못하고 연주회 날짜를 잡았다가 낭패를 당했지요. 그래서 약 일 년 만에 지휘자가 건강을 회복했음을 알리는 연주회치고는 초라한 객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월드컵 못지않은 기적이 그날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있었습니다. 연주의 기술적 · 예술적 완성도가 관객의 기대치를 크게 뛰어넘어 '역사적인 명연'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거든요. 연주가 끝나고 광분하는 관객에게 지휘자는 월드컵 보러 가시라는 농담을 하고 퇴장했고, 콘서트홀 로비에는 한국 팀이 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중계되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카페에서 오늘 연주 얘기 반, 축구 얘기 반으로 떠들던 가운데 다들 아시는 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 친구는 흥분해 날뛰다 실수로 휴대전화를 밟아 망가트렸고, 말러 광신도(?)를 자처하는 사람이 모인 모 동호회의 한 회원은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오늘 나온 사람이 참교도야!"
임헌정 지휘자는 최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코심'이라 줄여 부르기도 하는 이 오케스트라는 임헌정 선생보다 한 세대 위 지휘자인 홍연택 선생이 창단한 명문 오케스트라이지요. 임헌정과 함께 새로운 도약을 선언한 코심의 연주는 과연 어떨까요? 9월 12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리는 공연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