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일 일요일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인터뷰

통영국제음악재단이 발간하는 잡지 『Grand Wing』에 실린 글입니다.


Q. 시벨리우스 협주곡에 관한 해석이, 이를테면 1982년에 리카르도 무티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음반을 녹음했을 때와 견주어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나.

A. 이 작품을 두 번 음반으로 녹음했는데, 1977년에 로제스트벤스키, 그리고 나중에 무티와 함께 했다. 나는 내 음반을 들어본 일이 한 번도 없어서 만족스러운 답을 할 수 없다. 차라리 이번에 통영에서 연주할 '라이브' 연주가 두 음반과 어떻게 다를지 여.러.분.이. 발견하는 쪽이 흥미로울 듯하다.

[기돈 크레머는 자신의 음반이건 남의 음반이건 거의 듣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 정도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되었으며, 기돈 크레머가 답하지 않은 첫 번째 질문은 "나이가 들면서 바이올린 소리가 차분하고 유려하게 바뀐 듯하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였다. 위 답변으로 보아 이 질문은 기돈 크레머에게 마치 '당신의 얼굴이 나이가 들면서 이러이러하게 바뀌었는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와 비슷하게 느껴졌을 듯하다.]

Q. 2012년에 크레메라타 발티카(Kremerata Baltica)를 이끌고 서울에서 공연했을 때, 한 음악평론가는 "왼손 비브라토는 소리를 떠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넓게 공명시키기 위한 것"(박제성)이라는 통찰을 얻었다고 평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바이올린을 배우는 이들에게 조언하자면?

A. 내가 '예쁜 소리'(bella voce)를 위한 '예쁜 소리'라는 개념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아마 알 것이다. 나에게 바이올린이란 다른 악기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어떤 메시지, 때로는 작가(author)의 악보에 (때때로 숨어) 있는 어떤 담화(statement)를 전달하는 '도구'이다.

운지법(fingering)이나 운궁법(bowing)이 다양한 것만큼 비브라토 또한 다양하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음악에 맞느냐이다. 멋지지만 사실은 속 빈 소리를 내는 연주자가 너무나 많다. 비브라토는 단지 수많은 '전달 도구'(carrier)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양한 '논-비브라토' 또한 마찬가지다.) 연주자가 사용할 수 있는 비브라토가 다양할수록 더욱 흥미로운 연주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절대로 비브라토를 위한 비브라토를 하지 말라. 언제나 악보와 음악이 먼저다.

Q.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레퍼토리가 어마어마하기로 유명하다. 현대곡은 주로 살아있는 작곡가와 교류하면서 레퍼토리를 넓혀온 듯한데, 윤이상이나 진은숙 같은 한국 작곡가와 만난 일이 있나.

A. 두 사람을 당연히 알고 음악을 들어본 일도 있으며, 내가 감독하는 음악 페스티벌 프로그램에 위대한 작가(author)인 윤이상의 작품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작품을 직접 연주해 볼 기회는 없었다. [기돈 크레머는 '작곡가'(composer)라는 말보다 '작가'(author)라는 말을 선호하는 듯했다. 음악을 '메시지'나 '담화'로 보는 관점에서 온 표현으로 이해된다.]

언젠가 한국 작품도 연주해 보면 좋겠지만, 흥미로운 작품을 다 연주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라서 프로그램 성격에 맞는 곡을 고를 수밖에 없다. 현대 작가의 작품을 많이 연주해 왔는데도 다른 많은 작가에게 빚을 진 느낌이다.

요즘 미에치스와프 바인베르크(Mieczysław Weinberg, 1919 – 1996)라는 중요한 작곡가를 발굴하는 중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그를 온 세계에 알리는 일에 열정을 다 바치고 있다. 내 오케스트라인 크레메라타 발티카가 그 일에 도움이 된다.

Q. 음악이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되는 일을 싫어한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로저 노링턴은 모차르트가 '엔터테인먼트'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음악이 즐겁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가 요즘 좌우명이라고까지 하는데, 노링턴에게 어떤 반박을 하고 싶나.

A. 그 명제를 살펴보자. '즐거움' 그 자체는 아무 문제 없다. 그러나 음악가로서 주된 임무, 즉 관객의 상상력과 감성을 넓히는 일을 내팽개치고 '연예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즐거움'은 흔히 어떤 일의 표면에 놓여 있고 '즉각적 만족'에 가까운 개념이다. 많은 연주자가 유명세를 좇고 '스타'가 되려 한다. 박수와 감탄을 받는 일이 우선적인 목표가 된다. 작곡가도 마찬가지다. 유명해지기를 바라면서 관객과 광고주와 후원자를 기쁘게 하려 노력한다. 나는 그런 일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어떤 종류의 음악을 (재즈이건 팝 음악이건) 즐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당연히 이런 쪽에도 좋아하는 곡은 있다. 다만, 그 바닥을 잘 알아서 어떤 게 돈이 되고 안 되는지 잘 아는 속물들 틈에 끼고 싶지 않다. 나에게 음악은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다. 올바른 가치를 찾는 모험과 위험이 가득한 길이다. 엔터테인먼트는 마음 편하게 웃고 쉬기에는 좋다. 그래서 나도 농담과 유머 따위를 좋아한다. 그러나 편하게 음악을 듣거나 걸작을 놓고 '파도타기'를 하기는 싫다. 그런 것은 대개 우리를 (연주자이건 감상자이건) 더 먼 곳으로 이끄는 음악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우리를 끌어올리는 걸작은 정말로 '즐긴다.'

Q.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보나, 아니면 예술은 그저 사회를 거울처럼 반영할 뿐이라 생각하나. 최근에 쓴 글을 보면 음악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믿는 듯하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신문 사설이나 안나 폴리트코브스카야 추모 공연 등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표현한 일은 음악으로는 그게 안 되기 때문이 아닌가.

A. 음악가들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지만) 친구에게, 사회에,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정치인이 될 필요는 없지만, 불의에 저항하는 선택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독트린이나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한 사람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음악으로 자유를 누리는 만큼 그릇을 키워서 다른 사람과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소리를 빚어낼 수 있어야 한다. 티켓을 살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해 멋진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윤리적 책무를 져야 한다.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자기만 아는 제멋대로 연주자를 이렇게까지 자주 만나지는 않게 될 것이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표시'가 난다. 더 높은 가치와 공감력으로 일어설 줄 안다. 그래서 잘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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