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7일 일요일

푸치니 《라 보엠》 해설

초연

1896년 2월 1일 토리노 레조 극장(Teatro Regio)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지휘로 초연되었다.

원작

《라 보엠》은 앙리 뮈르제(Henri Murger)가 쓴 소설 《보헤미안이 사는 모습》(Scènes de la vie de Bohème)을 바탕으로 주세페 자코사(Giuseppe Giacosa)와 루이지 일리카(Luigi Illica)가 대본을 썼다. 뮈르제는 같은 작품을 테오도르 바리에르(Théodore Barrière)와 함께 연극 대본으로도 썼으나, 돈 많은 로돌포 삼촌이 미미를 싫어하는 내용이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와 닮은꼴이라 작곡가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푸치니는 처음에 주세페 자코사에게 대본을 맡겼는데, 처음 구성은 1막과 2막이 한 막으로 이루어지고 무제타 집 정원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미미가 로돌포를 버리고 자작가로 떠나는 장면 등 최종본에는 없는 내용이 있었다. 푸치니는 플롯을 입맛에 맞게 바꾸고자 자코사와 격렬한 의견 대립을 벌였고, 루이지 일리카가 타협안을 내놓으면서 대본 작업에 참여하였다.

원작 소설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았으며, 로돌프(Rodolphe)는 앙리 뮈르제 자신이었다고 한다. 콜리네는 철학자 장 왈롱(Jean Wallon)과 마르크 트라파두(Marc Trapadoux)를 합친 인물로, 학구적인 성격은 장 왈롱을 본떴고 외투 주머니에 책과 논문 따위를 잔뜩 넣고 다니는 모습은 트라파두를 본떴다.

마르첼로는 소설 속에서 마르셀(Marcel)인데, 라자르(Lazare)와 타바르(Tabar)라는 화가를 참고했다. 타바르는 실제로 《홍해》를 그렸으며, 이 그림 제목을 《헤브라이 사람이 건너는 홍해 길》이라 했다가 전시회 응모에 여러 차례 실패하면서 《루비콘 강 건너기》라고 바꾸기도 했다.

쇼나르는 알렉상드르 샨(Alexandre Schanne)이었는데, 뮈르제는 샤나르(Shannard)로 고쳐 썼으나 소설을 신문에 연재할 때 인쇄 오류로 쇼나르(Schaunard)가 되었다. 샨은 본디 화가였으나 나중에 음악을 공부해 합창단에서 활동하다가 비올라 연주자가 되었다.

미미는 루시유(Lucille)라는 아가씨 이름과 별명을 땄다. 그러나 열쇠를 잃어버리는 사건과 병 들어 죽은 얘기는 조각가 자크(Jacques)의 아내 프랑신(Francine)을 모델로 삼았다. 프랑신은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프랑신이 입원한 다음 날 남편 자크는 병원에 갔다가 아내가 벌써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일주일 뒤 같은 병원 간호사로부터 사실은 착오가 있었으며 프랑신은 다른 병실로 옮겼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급히 찾아간 병원에서 프랑신이 이미 하루 앞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무제타는 소설 속 마르셀 부인으로 나오는 뮈제트(Musette)이며, 《라 보엠》에 나오는 무제타를 쏙 빼닮은 인물이다. '뮈제트'는 노래를 좋아한다는 뜻으로 붙인 장난스러운 이름으로 프랑스어로 '아코디언 음악'을 가리킨다. 실존 인물은 이름이 마리에트(Mariette)였고, 남편 몰래 돈을 훔쳐 다른 남자와 함께 배 타고 달아나다가 배가 가라앉는 바람에 죽었다.

배경

《라 보엠》을 감상할 때 몇 가지 배경 지식을 알아두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콜리네가 들먹이는 그리스·로마 시대 인물들은 자막으로 짧게 다루었으나 좀 더 긴 설명이 필요한 것들이 있다.

카르티에 라탱 (Quartier Latin)
소르본 대학 등 교육기관이 모여 있는 동네이다. 라틴 지구, 라탱 지구, 라틴 쿼터(Latin Quarter)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외국에서 온 유학생과 예술가들이 많아서 당시 이곳에서는 라틴어가 공용어처럼 쓰였다. 2막에서도 로돌포 친구들이 라틴어로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20세기 몽마르트처럼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다.

카페 모뮈스 (Café Momus)
카르티에 라탱에 실제로 있던 찻집 겸 식당 이름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모모스(μῶμος) 신 이름을 따왔으나 프랑스식 발음은 '모뮈'에 가깝다. 원작 소설을 쓴 앙리 뮈르제가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라 보엠》에서 묘사된 바와는 달리 모뮈스 카페 앞은 실제로는 광장이 아닌 좁은 골목길이었다.

지마라 (Zimarra)
크고 낡고 허름한 남성용 외투를 이르는 말이며 콜리네가 입고 다닌다. 원작자 뮈르제는 이 외투에 매우 큰 주머니가 있어서 책과 논문 따위를 잔뜩 넣어 다녔다고 썼다. 콜리네가 4막에서 이 외투를 팔기에 앞서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까닭은 이 외투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이동식 책장'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2막에서는 콜리네가 이 옷을 몹시 아끼면서 수선 맡기는 모습도 나온다.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 d'Orléans)
1830년 '7월 혁명'으로 시민의 지지를 받아 '프랑스 시민의 왕'이 되었다. 루이 필리프 정권은 초기에는 프랑스 혁명 정신을 잊지 않았으나 나중에 왕정주의와 보수주의 정권으로 바뀌어 갔다. 영국 정치제도를 도입하고 금융업과 수공업을 장려하였으며, 이때 부르주아들이 빠르게 자본을 쌓아갔으나 노동자들은 비참하게 살았다. 루이 필리프는 1848년 '2월 혁명' 때 왕위를 잃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Pierre Guillaume Guizot)
역사학자이자 정치가로 7월 혁명 때 부르봉 왕가를 무너뜨리는 데 힘썼고, 1847년 9월부터 이듬해 2월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프랑스 수상으로 지냈다. 콜리네가 기조 수상을 들먹이는 대목으로 미루어 《라 보엠》은 1847년 12월 24일부터 1848년 3월 8일(재의 수요일)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2월 혁명은 22일부터 24일까지 일어났다.

푸른 수염 (Il Barbablù; La Barbe-Bleue)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1628~1703)가 쓴 동화 제목으로 중세 귀족이자 연쇄 살인마로부터 비롯한 이야기라고도 한다. 푸른 수염을 기른 돈 많은 귀족이 새 아내를 맞았는데, 잠시 집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지하에 있는 작은 방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한다. 아내가 호기심에 그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옛 아내들이 토막 난 시체가 되어 있었다. 《라 보엠》에서는 2막에서 무제타가 알친도로에게 '푸른 수염처럼 말하지 마!'라고 소리치는데, 냉혈한처럼 매정하게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버르토크가 《푸른 수염》 동화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쓰기도 했다.

베리스모 오페라

《라 보엠》은 '베리스모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베리스모(Verismo)라는 말은 본디 '사실주의'(realism)라는 뜻으로, 대략 1875년에서 1895년 사이에 일어난 이탈리아 문학 운동을 가리킨다. 사실주의는 자연주의(naturalism)와는 조금 다르나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며, 베리스모 문학에는 프랑스 자연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주의 철학은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중시하며 초자연적인 현상과 가설마저도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자연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사상이자 운동이다.

자연주의 문학은 낭만주의 문학에 반대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했던 사실주의 문학에서 파생했다.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환경이나 유전이 인물에 끼치는 영향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성적 욕망, 질병, 가난, 인종 차별 등 전통적인 아름다움이나 고상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을 그대로 작품에 담았다.

자연주의 연극은 서민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인물 구성, 구어체 대사, 초자연적·신화적인 존재와 이국적인 요소를 배제하려는 경향, 3차원적 무대 장치, 실제 상황에 가까운 사건 전개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베리스모 오페라는 베리스모 문학 등과는 다르다. '베리스모'라는 말을 널리 퍼트린 작품은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인데, 이 작품은 베리스모 문학을 이끌었던 조반니 베르가(Giovanni Verga, 1840~1922)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했으나 오페라로 거듭나면서 사실주의적 성격이 크게 옅어졌다. 마스카니와 함께 대표적인 베리스모 오페라 작곡가로 꼽히는 푸치니와 레온카발로 등이 남긴 작품도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 문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음악학자 달하우스(Karl Dahlhaus, 1928~1989)가 한 말을 빌자면, 베리스모 오페라는 베리스모 문학과 달리 그 본질은 베르디 등으로부터 이어지는 '멜로드라마'가 발전한 형태이며, 자연주의 연극과 달리 이국적인 배경과 풍물을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달하우스는 베리스모 오페라 작곡가들이 이국적인 요소를 사용하여 두 가지 효과를 누렸다고 지적했다. 첫째로 다른 나라, 다른 시대 음악 양식을 써서 손쉽게 다채로운 짜임새를 노릴 수 있었다. 둘째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부터 베르크 《보체크》, 《룰루》까지 현대음악으로 나아가는 큰 흐름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던 마당에 이국적인 요소가 구식 작곡가라는 인상을 피할 수 있게끔 해주는 장치가 되어 주었다.

《라 보엠》은 《나비 부인》이나 《투란도트》 등과 견주면 지역색이 옅다. 그러나 이 작품 또한 이국적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오페라이면서도 이탈리아가 아닌 국제도시 파리, 그것도 라틴어를 공용어로 쓰던 대학가를, 그리고 작품이 발표된 1896년 당시가 아니라 1847~8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 영화가 새로 나온다고 생각해 보라.) 달하우스는 2막에 나오는 무제타의 왈츠와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은 '카르티에 라탱'을 중요한 이국적 요소로 꼽았고, 드뷔시는 3막 도입부를 두고 19세기 중반 파리 겨울 풍경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평했다.

베리스모 오페라는 베리스모 문학 등과는 맥락이 다르지만 사실주의·자연주의적 성격을 찾을 수는 있다. 무엇보다 《라 보엠》은 베리스모 오페라 가운데서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사가 주는 생생한 현장감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음악과 관련해 베리스모 오페라에 영향을 준 작곡가로는 마스네와 바그너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벨칸토 콜로라투라를 앞세우는 전통적인 오페라와 달리 성악과 관현악이 플롯 전개에 긴밀하게 얽히게 하고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가르는 경계를 흐리는 등 극적 현장감을 높이는 기법이 이와 관련이 있다.

당신의 사랑은 88만원보다 비싼가?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이미 일상어처럼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어느 신문에는 "사랑은 88만원보다 비싸다"라는 제목으로 돈이 없어 연애를 포기한 사연들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88만원 세대』 저자인 우석훈은 "한국전쟁 직후에도 서울의 청춘남녀가 남대문부터 동대문까지 거닐며 연애하는 재건 데이트가 유행했다"며 "지금이 경제적으로 당시보다 더 어렵진 않을 텐데, 무엇이 청춘의 열정마저 메마르게 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라 보엠》을 보라. 한겨울 옥탑방에서 불도 못 때고 살면서도 사랑과 예술과 학문을 얘기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까? 어째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즐거워 보일까? 자유롭기 때문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영혼을 뒤흔드는" (Fremon già nell'anima) 감동을 누리기 때문이다.

'보엠'(Bohème)이란 '보헤미안'에서 온 말로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예술가를 일컫는 말이다. 보헤미안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사랑과 예술과 학문이지 돈이나 '스펙'이 아니다. 우리는 보헤미안이 될 필요는 없고 일부러 가난하게 살 필요도 없다. 다만, 스스로 물어보자. 당신은 '돈'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당신의 사랑은 88만원보다 비싼가?

그래도 공감하기 어렵다면 구자범과 광주시립교향악단이 들려주는 《라 보엠》에 빠져 보자. 로돌포, 미미와 함께 보헤미안이 되어 사랑에 빠져 보자. 그리고 사람이건 예술이건 학문이건 사랑하며 살자. 비록 《라 보엠》은 비극으로 끝날지라도 그것이 인생의 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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