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1일 금요일

다차원적 폴리포니와 음악의 공간감, 그리고 돌비 애트모스 오디오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선율이 흐르면서 음색이 계속 바뀌게끔 하는 작곡 기법을 안톤 베베른의 용어로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전자음악 작곡가들은 컴퓨터 조작으로 간단하게 음색을 바꿀 수 있지요. 그러나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베베른은 ’음색선율’을 위해 일일이 악기와 연주법을 바꾸는 식으로 작곡했습니다. 베베른은 음색을 선율·리듬·화성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려 음악을 이루는 핵심 요소로 활용한 최초의 작곡가라 할 수 있습니다.

베베른이 1911년부터 1913년에 걸쳐 작곡한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Op.10’은 하프와 약음기 낀 트롬본, 하프와 첼레스타, 하프와 플루트가 차례로 한 음씩 연주하며 음악을 시작하고, 이때 플루트는 혀나 목젖을 떨어 ’아르르’ 하는 소리를 내는 이른바 ‘플러터 텅잉(flutter-tonguing)’ 주법을 씁니다. 이렇게 음이 바뀔 때마다 악기가 달라지지만 선율은 이어지는 식으로 음악이 흐르지요.

이 작품은 이른바 ’12음 기법’을 사용한 무조음악(無調音樂)입니다. 이런 음악은 그냥 편하게 들어서는 음악이 아닌 소음으로 들리기 쉽지요. 또 베베른은 음 하나하나에 음악적 의미를 고농도로 압축하는 음악 어법을 사용했는데, 워낙 고농도로 응축되어 있어서 길이가 짧다는 것이 이 작품의 장점 아닌 장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곡을 처음 익힐 때 그냥 악보를 통째로 외워버렸습니다. 길이가 짧아서 외우는 데 오래 걸리지 않던데요.

그러나 제가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을 깨달은 것은 공연장에서 실연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음이 바뀔 때마다 악기가 달라지면, 그냥 음색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나는 ’위치’가 계속 바뀌게 되지요. 집에서 오디오로 들을 때에는 경험하지 못한 3차원 공간 속 소리 알갱이의 ’운동 궤적’을 제가 생생하게 느꼈을 때, 그 음악은 제가 악보로 익힌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마치 요정이 빛을 뿌리면서 무대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듯했습니다!

헝가리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는 윤이상,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등과 함께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거장 작곡가로 손꼽히지요. 리게티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같은 대작의 악보를 보면 정교하고 장대한 짜임새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리게티 작품세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메조소프라노와 타악기 앙상블을 위한 14분짜리 작품 ‘피리, 북, 깽깽이로’(Síppal, dobbal, nádihegedüvel)를 최고 걸작으로 꼽더군요.

리게티 후기 양식을 설명하는 말로 ‘다차원적 폴리포니’라는 것이 있습니다. 짧은 글에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닌데, 다만 음악학자 이희경 선생의 표현을 짧게 빌리자면 “상이한 리듬층을 상상의 음향 공간 속에 다양하게 배치”하는 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1993)과 ’피리, 북, 깽깽이로’(2000) 모두 이런 양식으로 되어 있지요.

제가 실연으로 들어본 ’피리, 북, 깽깽이로’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상이한 리듬층’이 타악기 앙상블의 연주로 무대 위에서 실제로 구현되었을 때, ’상상의 음향 공간 속에 다양하게 배치’된 그 리듬층은 무대 위라는 3차원 공간이 초현실적인 음향 공간으로 확장된 마법의 시공간 속에서 저마다의 색깔로 반짝이는 듯했습니다. 그런 초월적인 경험을 하고 나니 어째서 이 작품이 바이올린 협주곡과 같은 대작보다 더 위대한지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가정용 2채널(스테레오) 오디오는 기본적으로 좌우로 펼쳐지는 1차원적 공간감을 재현할 수 있고, 좌우 스피커의 음상을 잘 맞추면 무대 앞뒤로도 펼쳐지는 2차원적 공간감을 제한적으로 재현할 수 있지요. 멀티채널 오디오로 구현되는 홈시어터는 2차원적 공간감을 좀 더 본격적으로 재현할 수 있고, 소리를 개별 단위로 객체화해서 위치 및 이동시키는 최신 기술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는 소리의 공간감을 더욱 정교하게 재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어쩌면 언젠가는 리게티 음악의 다차원적 공간감을 정말로 제대로 재생할 수 있는 대중화된 오디오 기술이 나올까요? 돌비 애트모스 오디오로 녹음된 음악을 듣고 깜짝 놀라서 베베른과 리게티를 불러 내 가며 호들갑을 떨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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