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글 다시 보니 참 부끄럽네요.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올립니다. ^^
고클래식에서 음반 정보를 퍼왔습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1막
첼로의 세 음에 의해 유도되는 '트리스탄 화음'은 음향효과만으로 보면 뵘보다 못합니다.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의 폭도 좁아서, 작품에 대한 해석의 관점이 여기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음향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호흡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라는 표현을 쓰시던데, 저는 '뭉게뭉게'까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대단히 완만한 곡선으로 서서히 진행되는 크레셴도는 푸르트벵글러의
트리스탄 연주에서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주곡에 이어지는 젊은 선원의 노래도 분위기를 잘 살렸습니다. 비브라토를 조금만
더 느리게 했으면 더 좋았겠습니다. 시작할 때 약간 삑사리를 내는 것이 옥의 티입니다.
이졸데의 "Brangäne, du? Sag', wo sind wir?" 직후부터 나오는 현의 멜로디와
관련한 상징성에 대해서는 뵘 편에서 제멋대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푸르트벵글러가 만들어내는 물살은 전주곡에서부터 예고한 바와 같이 아직은 완만합니다.
템포마저 완만하니 더욱 좋습니다. 부드러운 물살에 감춰진 거대한 심해가 느껴집니다.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의 이졸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입니다. "Hort meinen Willen,
zagende Winde!"에서부터는 녹음 당시의 나이에 걸맞은 마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루드비히 주트하우스의 트리스탄도 잘 어울립니다.
쿠르베날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훌륭합니다. 블랑셰 테봄의 브랑게네도 좋습니다.
쿠르베날이 마침내 트리스탄을 이졸데 앞으로 데려왔을 때 나오는 분노한 이졸데의
모티프(파 솔 시b 라b - 미b 미b 레 레b 레b 파b)는 얼음장과도 같이 싸늘한 눈빛을
연상시키는데, 여기서는 좀 약하군요. '뭉게뭉게'도 좋지만 이렇게 물러서야...
둘이서 사랑의 묘약을 마신 직후 길게 늘어지는 현악기들의 트레몰로는 기가 막힙니다.
배가 도착하고 국왕 만세를 외치면서 끝날 때까지도 매우 좋습니다. 전주곡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긴 호흡의 크레셴도는 1막 전체에 걸쳐서 계속 나타납니다.
2막
전주곡 시작 부분에서의 신기한 '이졸데 리듬'에 대해서는 뵘 편에서 자세하게 기술한
바 있습니다. 푸르트벵글러의 연주에서는 역시 뵘과 같은 음향효과는 없습니다.
느긋한 출발이라고 좋게 봐줄 수도 있겠습니다만, 역시 '약하다'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플락스타트와 주트하우스, 노래 정말 잘합니다! 주트하우스는 감정표현 등을 제외하면
뵘 판에서의 빈트가센보다 낫습니다. 플락스타트도 '하이 C'와 관련한 구설수를
무시하고 귀에 들리는 소리만으로 판단한다면, 50이 넘은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제 취향은 그래도 비르기트 닐손이지만, 목소리의 톤만큼은 그 어떤
이졸데보다도 훌륭합니다. 관현악은 이 두 사람의 명연을 위해 뒤로 살짝 물러나
'반주'에 충실한데, 이는 뵘 판에서 관현악이 중심적인 위치에 서서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절묘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토록 탐미적인 서정성은
뵘의 감각적인 연주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마르케 왕 일당(?)이 등장할 때의 음향효과는, 무거운 저음은 뵘보다 더 긁어대지만
첼로+콘트라바스의 저음군과 바이올린+비올라의 고음군이 그저 한 박자씩 주고받기만
하기 때문에 리듬이 단순하게 들립니다. 요제프 그라인들이 부르는 마르케 왕의
모놀로그는 훌륭하기는 하지만 역시 지루합니다. -_-;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지막
대화는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마지막 관현악은 약합니다.
3막
전주곡에서 역시 푸르트벵글러는 배신을 하지 않습니다. 저음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뿔피리(잉글리쉬 호른) 솔로는 발군입니다.
주트하우스와 피셔-디스카우가 엄청난 노래 대결을 펼칩니다. 착 가라앉은 관현악도
매우 좋습니다.
뿔피리 소리가 바뀌는 대목에서 잉글리쉬 호른은 멀리서 자그마하게 들립니다.
더군다나 (테크닉 문제겠지만) 덤덤한 표정으로 연주합니다. 이것은 제 취향은 아닙니다.
사실감보다는 큰 음량으로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이 저는 좋습니다. 점점 고조되는
관현악도 뵘 판에서와 같은 발작 없이 완만한 곡선을 유지한 채로 점차 상승합니다.
대단히 깊이 있는 연주이기 때문에 밋밋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뵘 보다는 못하다고
느낍니다.
트리스탄이 죽은 직후에 부르는 이졸데의 아리오소에서 관현악의 은은한 울림이
인상적입니다. 가사를 따라가느라 바빠서 처음에는 안 들리던 부분이 들리니
신기합니다. "Gebrochen der Blick!" 직전부터 시작되어 "Nur einmal, ach!
nur einmal noch!"에서 꺼질듯 꺼질듯 가늘게 그리고 점점 느리게 연주되는
오보에 등의 소리는 의식이 꺼진 트리스탄의 생명의 마지막 에너지가 소진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것을 제대로 표현한 것은 푸르트벵글러가 유일하며, 뵘 판에서조차
별로입니다. 악보에는 분명히 "Immer langsamer(점점 느리게)"라고 쓰여있습니다.
(New York : Broude Brothers)
쿠르베날의 전투 장면에서 관현악은 너무 싱겁습니다. '뭉게뭉게' 다 좋은데,
지금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입니다.
플락스타트의 마지막 '사랑의 죽음'은 매우 훌륭합니다. 비르기트 닐손과 같은 독기는
없지만, 절묘한 템포로 리듬을 타면서 서서히 고조시키는 능력은 닐손 못지않습니다.
'사랑의 죽음'에서 닐손을 제외한 다른 가수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명연입니다.
제가 들어본 다른 가수들은 이에 비하면 너무나 가소롭습니다. 그나마 발트라우테
마이어 정도가 플락스타트에 근접해 있습니다.
2003년 7월 24일 씀.
김원철. 2004.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