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글 다시 보니 참 부끄럽네요.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올립니다. ^^
고클래식에서 음반 정보를 퍼왔습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카를로스 클라이버
1막
처음 세 개의 음을 첼로가 연주할 때 크레셴도의 폭이 뵘에 비하면 좁습니다.
이어서 밋밋하게 시작하는 저 유명한 '트리스탄 화음'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마에스트로 클라이버에게 이 화음이 영 듣기 거북했는지 몰라도, 그 음향의 충격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 버립니다. 많은 사람이 칭찬하는
이 음반은 저에게는 여기서부터 불만이었습니다. 전주곡이 끝나도록 이것은 차라리
브람스의 교향곡 같았습니다.
이어지는 젊은 선원의 노래. 스튜디오로 달려가 이 가수를 때려주고 싶습니다. -_-;
이 인간은 대본과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본 적이 없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졸데의 "Brangäne, du? Sag', wo sind wir?" 직후부터 나오는 현의 멜로디와
관련한 상징성에 대해서는 뵘 편에서 제멋대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클라이버가 만들어내는 물살은 '운명' 운운할 것도 없이 쉽게 헤치고
나와버릴 수 있을 만큼 얕습니다. 마에스트로 클라이버는 배를 타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바다를 구경해본 적도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가렛 프라이스의 목소리는 참으로 맑고 아름답습니다. 이졸데와는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중간중간에 클라이버와 덩달아 분위기 파악을 못 하기도 하지만,
색다른 목소리로 좋게 봐주겠습니다.
르네 콜로의 트리스탄은 영 제 취향에 맞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그냥 오페레타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와중에 군계일학이 있으니 바로 쿠르베날입니다. 누군가 했더니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로군요. 역시!
쿠르베날이 마침내 트리스탄을 이졸데 앞으로 데려왔을 때 나오는 분노한 이졸데의
모티프(파 솔 시b 라b - 미b 미b 레 레b 레b 파b)는 얼음장과도 같이 싸늘한 눈빛을
연상시키는데, 클라이버의 연주에서는 이 역시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이졸데가
이 정도로 시시하게 노려봐서는 가볍게 무시해버리겠습니다.
둘이서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서로 쳐다볼 때 역시 전주곡의 재현으로 그저 밋밋합니다.
선원들이 국왕 만세를 외치는 부분에서도 주로 템포의 문제로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는 앞서 말한 '운명의 물살'의 표현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2막
전주곡 시작 부분에서의 신기한 '이졸데 리듬'에 대해서는 뵘 편에서 자세하게 기술한
바 있습니다. 이 리듬에 대한 배신(!)을 제외한다면 전주곡의 독특한 음향효과는
뵘이나 푸르트벵글러와는 다르면서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습니다.
1막에서 배신감에 분노하느라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브리짓 파스벤더의
브랑게네가 귀에 들어옵니다. 프라이스의 이졸데도 훌륭합니다. 이쯤 되면 콜로의
목소리도 들어줄 만합니다.
"... Nacht, Zur Warte du: dort wache treu!" 로 시작하는 이졸데가 불 끄는 대목이
훌륭합니다. 마가릿 프라이스가 이렇게 파워풀한 목소리도 낼 줄 아는군요. 1막에서도
좀 그랬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전주곡과 링크되는 부분 훌륭합니다. 트리스탄이 이졸데를 찾아오고 나서 무지막지한
고음처리는 잘하는데, 목소리에서 격정이 빠진 것 같습니다. 고음처리를 하느라
몸을 사리는 것일까요?
"O sink hernieder" 대목부터는 너무나 달콤합니다. 르네 콜로가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아는군요. 프라이스의 목소리는 환상입니다! 관현악도 디테일이 잘 살아서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어둠의 그림자가 퇴색되어 매우 밝게 들리는데,
덕분에 퇴폐적인 맛은 없습니다. 제 취향과는 좀 다르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브랑게네의 첫 번째 아리오소에서 바이올린의 디테일이 강조된 것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런 식의 연주도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제 취향은 뵘 판의 몽환적인 분위기입니다.
마르케와 멜롯이 등장하는 대목에서의 음향효과는 몹시 낯설게 들립니다.
첼로+콘트라바스의 저음군과 바이올린+비올라의 고음군이 따로 놀기 때문에
각각의 리듬들이 아수라장과도 같이 흩어져 들립니다. 역시 뵘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 하겠습니다.
쿠르트 몰의 마르케 왕은 잘하기는 하는데... 역시 이 부분은 지루합니다. -_-;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지막 대화는 사랑의 이중창에서와 같이 달콤합니다.
그러나 막이 내리기 직전 마지막 관현악은 영 약합니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_-;
3막
2막 마지막에서의 배신이 3막 전주곡에서도 이어집니다. 뵘의 연주로 3막 전주곡을
들었을 때에는 그 비통한 화음과 멜로디가 주는 충격이 대단했는데, 클라이버의
'모던한' 연주는 그저 싱겁습니다. 무엇보다 저음이 약한 것이 용서가 안 됩니다!
뿔피리(잉글리쉬 호른) 연주가 주는 과거로 침잠하는 듯한 느낌도 여기서는 별로입니다.
트리스탄의 기운 없는 목소리는 썩 좋습니다. 르네 콜로가 2막에서도 잘하더니
여기서도 이런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군요. 그러나 이윽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면서
좋은 분위기 망칩니다. -_-;
뿔피리 소리가 바뀌는 대목에서, 일단 처음에는 그 소리가 멀리서 들립니다.
이윽고 저 가슴 벅찬 멜로디를 연주할 때에는 악기가 잉글리쉬 호른 대신에 트럼펫으로
잠시 바뀐 것 같습니다. 이때 트럼펫이라 그런지 멀기는 해도 소리가 웬만큼 큽니다.
원래의 목적(?)과는 별개로 소리가 큰 것은 칭찬할 만합니다. 극도로 흥분한 트리스탄의
심리상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관현악의 힘찬 연주는 예의 이지적인 색채를 유지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긁어대기 때문에 꽤 괜찮게 들립니다. 이것은 쿠르베날의
전투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렛 프라이스의 마지막 '사랑의 죽음'은 별로입니다. 테크닉은 좋지만 죽음을 앞둔
이졸데의 마음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긴 호흡의 크레셴도도 없고 특유의 리듬을 잘
타지도 못합니다. 맑은 목소리와 영롱한 비브라토는 여기서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뵘 판에서의 비르기트 닐손이 뿜어내는 지독한 독기를 프라이스로부터는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습니다. 관현악 역시 깔끔하기만 합니다.
마가렛 프라이스는 말러 교향곡 8번에서 제2 소프라노(그레첸)을 하면 좋겠습니다.
맺는 말
큰 기대를 걸었던 이 음반의 1막을 듣고서 들었던 실망감이 분노로 바뀌고,
결국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에스트로 클라이버를 씹어대다 보니 예정에 없던
긴 감상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써놓고 보니 바그너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놓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글을
다 써놓은 다음에 음반을 하나씩 다시 들어보면서 수정을 할 생각도 했습니다만,
한 번씩 듣는 데만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이제는 지긋지긋합니다. ^^;
언젠가 뵘에 경도된 마음이 누그러들면 이 음반의 새로운 면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메타의 DVD는 오디오적인 문제로 갸우뚱하는 중이라 일단
다음에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엉터리 감상문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03년 7월 24일 씀.
김원철. 2004.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