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협주곡 1번 C장조 / 2번 B♭장조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을 6곡 작곡했다. 그러나 14살 때 작곡한 첫 번째 협주곡은 미출판 곡으로 오늘날 오케스트라 악보가 남아 있지 않다. 피아노 협주곡 2번 B♭장조는 작곡 시기를 따지자면 협주곡 1번 C장조보다 10년쯤 앞서지만, 복잡한 개작 과정을 거쳐 두 번째로 출판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이 되었다. 세 번째 협주곡인 협주곡 1번 C장조는 베토벤이 빈에서 활동하며 피아니스트로 주목받기 시작한 초기의 작품으로 발표 당시부터 성공을 거두었다.
협주곡 1번과 2번은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드러내면서도 독자적이고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담았다는 점에서 베토벤 초기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이든-모차르트의 아류라고 하기에는 이미 이때부터 작품 속에 번뜩이는 천재성이 대단하며, 기존의 협주곡 양식을 거의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주제를 발전시키는 솜씨가 이미 후기 양식을 내다보게 할 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두 작품 모두 1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세도막 형식, 3악장은 론도 형식이다.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에 따르면, 협주곡 양식과 관련해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계승한 것은 무엇보다 형식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바로크 시대로부터 이어져 오던 전통적 협주곡이 리토르넬로 형식을 기반으로 했다면, 모차르트는 그것을 “교향곡화”(symphonized)했고, 베토벤이 그것을 확장·완성함으로써 낭만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나타 형식에 편입된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가 비교적 정(靜)적인 화성 진행으로 제1 주제를 제시하고, 솔로 악기(피아노)가 더 역동적인 화성 진행으로 주제를 변형·반복하는 등의 짜임새는 베토벤 협주곡 1번 및 2번에서도 초기적 형태로 나타난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세도막 형식, 3악장은 론도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협주곡 3번의 전체 구조 또한 앞선 협주곡과 비슷하다.
그러나 베토벤이 완성한 협주곡 양식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타루스킨은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를 꼽는다. 달리 말하면, 피아노 협주곡 3번이야말로 낭만주의 협주곡의 모범이자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1악장에서 베토벤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 c단조 K. 491을 모델로 삼았고, 타루스킨은 모차르트 작품 중 가장 ‘베토벤스러운’ 곡이 c단조 협주곡이라고도 했다.
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
피아노 협주곡 3번이 형식적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면,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내용적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오케스트라가 아닌 피아노 독주로 곡을 시작하는 점, 오케스트라가 등장할 때 G장조가 아닌 엉뚱한 B장조(이어지는 맥락을 고려하면 관계단조의 딸림조[V/vi])로 나오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의 대조적 성격 등은 당시 기준으로 매우 파격적이었으며, 리처드 타루스킨의 표현을 빌리자면 “낭만주의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베토벤은 교향곡 3번 ‘에로이카’ 초연을 전후로 이 곡을 작곡했다.
2악장에서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조적 성격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 악장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지옥에 간 오르페우스가 그리스 신화의 복수와 징벌의 여신들인 에리니에스(또는 로마 신화의 푸리아) 앞에서 간청하는 모습을 피아노(오르페우스)와 에리니에스(현악기)의 대화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오웬 얀더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협주곡 4번 전체가 오르페우스 이야기에 근거한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1악장과 2악장이 서정적이고 때로는 장중한 느낌이라면, 깔끔한 론도 형식으로 된 3악장에서는 빠르고 리드미컬한 주제를 앞세워 환희를 향해 달려 나가는 짜임새이다.
피아노 협주곡 5번 E♭장조
베토벤은 인류가 예술과 학문으로 신의 광휘에 끝없이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교향곡 3번 ’에로이카’에서 E♭장조 화음이 장대한 투쟁을 거쳐 찬란함을 더해 가는 혁신적인 음악 언어를 보여주었고, 전통적으로 거룩한 음악에 곧잘 쓰이던 조성인 E♭장조는 베토벤 이후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E♭장조 교향곡에서 인류가 신에게 다가가는 과정에 파란만장한 투쟁이 필요했던 것과 견주면, E♭장조 협주곡에서는 음악에 갈등이 없다시피 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E♭장조 화음이 휘황찬란하게 쏟아지는 피아노 카덴차로 시작하며, 서정적이고 사색적인 2악장을 지나 3악장에서는 E♭장조 화음을 날개처럼 달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음악이 이어진다. 이 협주곡에서 인류는 이미 파르나소스 산에 올라 신의 광휘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 붙은 ‘황제’라는 표제는 출판업자가 붙였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황제’라는 표제는 작곡가의 의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인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의 표제를 ’보나파르트’라고 썼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격분해 그 표지를 찢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보나파르트’ 이름을 필사본 악보에 다시 썼으며, 악보를 출판하면서는 제목이 ’보나파르트’가 맞다고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베토벤이 E♭장조 협주곡을 완성할 즈음에 ‘현실의 에로이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군대가 빈을 침공해 베토벤을 극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작곡가의 내면에서 나폴레옹을 연상시키는 표제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가 ’황제’라는 표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