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오늘 타루스킨이 제 글을 공개 비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저는 공식적으로 음악학자예요.”
음악학자·음악평론가 윌 로빈이 박사과정 학생이던 10년쯤 전에 소셜미디어로 이렇게 썼습니다. 맥락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이상한 말인데요. 리처드 타루스킨이 미국 음악학계를 대표하는 대학자이면서 성격 까칠하기로 악명 높았던 사람이고, 그래서 영미권 음악학자 중에 타루스킨에게 된통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시피 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저 말이 꽤 재치 있는 농담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타루스킨이라는 ’통과의례’를 마친 윌 로빈은 무사히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메릴랜드 대학교 교수입니다. 그리고 지난 7월 1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리처드 타루스킨 부고 기사를 다름 아닌 윌 로빈이 썼습니다. 타루스킨이 식도암으로 투병 끝에 향년 77세로 타계한 당일이었지요. “압도적인 음악학자이자 공공의 지성이었으며, 논쟁적 학문과 평론으로 클래식 음악사의 통념을 뒤흔들었던 리처드 타루스킨이 금요일 새벽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타계했다.”
리처드 타루스킨은 제가 음대생 시절 학문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을 더 꼽자면 독일의 카를 달하우스 정도이겠고요. 지금도 저는 글을 쓰면서 학술적인 검증을 꼼꼼히 해야 할 필요를 느끼면 타루스킨이 쓴 다섯 권짜리 책 ’옥스퍼드 서양음악사’를 반드시 확인합니다. 윌 로빈이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에서 소개한 바로 그 책이지요.
위대한 음악학자였던 리처드 타루스킨을 추모하는 뜻에서, 제가 예전에 썼던 글 가운데 그를 중요하게 인용한 대목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운율(rhyme)과 보격(meter) 없이도 음악적이며, 영혼의 시적 충동과 몽환 세계의 넘실거림에 어우러질 만큼 유연하면서도 강약이 살아있는 시구(詩句)의 마법을 한때 꿈꿔보지 않은 이가 우리 가운데 누가 있는가?” ― 샤를 보들레르 (1862년)
“내가 추구하는 음악을 말하자면, 나는 그것이 영혼의 시적 충동과 몽환 세계의 자유분방함에 어우러질 만큼 유연하면서도 강약이 살아있는 음악이기를 바란다.” ― 클로드 드뷔시 (1886년)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은 보들레르와 드뷔시가 쓴 글을 나란히 인용하면서 1900년대 프랑스 음악을 설명했습니다. 드뷔시가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보들레르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예술관을 드러낸 일은 새삼 흥미롭군요. 충동, 자유분방함, 유연함은 드뷔시 음악을 설명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습니다.
[…]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 파리는 오스트리아 빈과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드뷔시에 이어 에릭 사티, 모리스 라벨 등이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한 세대 뒤에 나타난 작곡가들에게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은 ’라이프 스타일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지요.
– 한산신문 칼럼 “두 가지 아방가르드: 프랑스 파리와 오스트리아 빈” (2016년 1월)
리처드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은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 바그너 작품에서 화성적 해결이 지연되며 이어지는 것을 “화성의 바다”(The Sea of Harmony)라는 말로 설명했고, […] “화성의 바다”는 바그너 총체예술의 ‘본질’(noumenon)이다.
[…] 타루스킨은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 기법이 음악 외적 대상과 연결되므로 ’현상적 세계’에 속한다며 좀 더 엄밀한 입장을 보였다. 다시 말해, 바그너 총체예술의 ’본질’에 해당하는 화성과 리듬 등은 그 자체에 라이트모티프라는 ’현상적 세계’를 포함하고 있으며, 라이트모티프로부터 ’드라마’가 ’발현’된다고 할 수 있다.
[…] 바그너는 쇼펜하우어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총체예술’로 대표되는 자신의 예술관을 일부 수정했다. 그리고 타루스킨이 ’화성의 바다’라는 말로 요약한 바그너 후기 음악 어법의 핵심이 쇼펜하우어 사상의 핵심으로 연결된다.
– “물결치는 사랑과 바그너식 열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용숙·오희숙 책임편집, 『오페라 속의 미학 I』 (서울: 음악세계, 2017), pp. 77-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