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디) 사발의 베토벤을 듣고 있으면 때로는 지척에서 때로는 멀리서 들리는 포성과 총성, 아스라한 연기와 매캐한 화약 냄새, 장병의 비명과 부상자의 신음과 인민의 함성과 군대의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뒤섞인 19세기 초 유럽의 혈향 어린 전장과 도시 한복판에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 유명한 연합뉴스 임화섭 기자가 페이스북에 쓴 말입니다. 지난 7월 조르디 사발과 ’르 콩세르 데 나시옹’이 베토벤 교향곡 1번부터 5번까지 녹음한 세트 음반이 발매되어 애호가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고 있지요. 옛날에는 새 음반이 나오면 수입, 주문, 배송까지 제법 시일이 걸렸지만, 요즘은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어서 음원이 풀리자마자 파란이 일더군요.
조르디 사발은 그가 창단한 악단인 ’르 콩세르 데 나시옹’과 함께 바로크 음악을 주로 지휘하는 사람입니다. 베토벤 곡은 1994년에 교향곡 3번과 코리올란 서곡을 녹음한 일이 있는 정도였지요. 사발의 베토벤 교향곡 3번이 명반으로 소문나기는 했지만, 저는 교향곡 하나만 녹음한 사람의 베토벤을 진지하게 들어볼 생각을 그동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나온 음원을 듣고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 음원을 듣고 있으면, 베토벤의 초기작으로 그다지 인기가 없는 교향곡 1번과 2번이 사실은 얼마나 혁신적인 작품이었는지를 깨닫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교향곡 3번, 4번, 5번 연주의 탁월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다섯 작품에 대한 내 마음속 최고의 연주는 이미 조르디 사발과 르 콩세르 데 나시옹의 녹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교향곡 6번부터 9번까지 녹음한 음원이 하루빨리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르디 사발과 그의 악단은 작곡 당시의 악기와 연주 관습 등을 살려 연주하기로 유명합니다. 이번에 나온 녹음에서도 베토벤 시대 현악기에 쓰이던 현의 소재와 활 구조 등에서 오는 ‘식물성 사운드’가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곡마다 55명에서 60명 정도의 연주자가 녹음에 참여했고, 이 가운데 ’르 콩세르 데 나시옹’ 단원이 35명에 나머지는 객원 연주자였다네요. 이런 소편성으로 베토벤을 연주하면 학자들이 고증한 베토벤 당시의 날렵한 템포가 가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새로 나온 음원을 들어 보면, 옛 악기를 사용한 다른 베토벤 연주와 견주어 한 가지 남다른 특징이 느껴집니다. ’식물성 사운드’이면서도 깜짝 놀랄 만큼 ’매운맛’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옛 악기로 베토벤을 연주하면 소리가 자칫 심심하게 들리기 쉽고, 그래서 현대 악기를 사용하면서도 스타카토와 비브라토 등을 옛날 연주법으로 한 절충주의적 베토벤 연주도 유행했지요. 그런데 조르디 사발은 현대 악기를 사용하지 않아 ’기름기’가 쫙 빠져 있으면서도 혀가 얼얼한 ’매운맛’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겁니다.
소리가 작은 옛 악기를 작은 편성으로 연주한 탓에, 아마도 녹음된 연주가 아닌 실제 연주에서 느껴지는 음량은 꽤 작을 듯합니다. 음원을 듣다 보면, 이를테면 때때로 목관 악기의 구멍을 마개가 막았다 열었다 하면서 찔꺽거리는 소리가 제법 또렷하게 들리기도 하더군요. 음질이 훌륭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악기 소리가 워낙 작아서 이런 소리까지 그대로 담긴 것이겠지요.
소리가 작은 대신 현악기는 아찔한 빠르기로 질주하며 박박 긁어댑니다. 관악기는 사납게 울부짖습니다. 팀파니는 곳곳에서 확실한 ’펀치감’을 만들어 냅니다. 듣고 있으면 입이 딱 벌어지는 테크닉이 연주 내내 이어집니다. 그야말로 포탄이 날아다니는 듯한 음향적 스펙터클이 가능했던 비결이 여기에 있을 겁니다.
임화섭 기자는 이런 연주가 스튜디오 녹음이 아닌 실제 연주회에서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저도 참 궁금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이들의 베토벤을 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 전에 코로나바이러스부터 ’매운맛’을 좀 보여 줬으면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