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통영국제음악당의 음향에 관해 전부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지만, 오늘만큼 감탄스럽고 또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이 통영의 초중고생들 앞에서 진은숙, 리게티, 윤이상을 연주한 날. 역시 오디오로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음향에 감탄 또 감탄."
2016년 한 해 통영에서 있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공연 날 아침에 열렸던 '스쿨 콘서트'입니다. 그날 제가 페이스북에 위와 같은 말도 써놓았지요. 세계에서 으뜸가는 현대음악 앙상블이, 현대음악을 가장 탁월하게 전달하는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평소에 접할 기회가 없었을 현대음악을 들어보는 경험을 통영의 아이들에게 선사하는 일은 그만큼 뿌듯했습니다.
현대음악 중에는 음색이나 음향적 효과가 선율 · 리듬 · 화성보다 더 중요한 곡이 많지요. 그 효과가 오디오로는 재생이 잘 안 되는 음역까지 걸쳐 있고, 삼차원 공간을 매개로 하며, 때로는 마치 요정이 빛을 뿌리며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현대음악을 연주할 때 소리를 전달하는 공간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이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현대음악 공연장 가운데 하나로 손꼽을 만하다는 확신을 이번에 갖게 됐습니다.
요스 판 이메르세일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마치 포르테피아노같은 소리를 들려주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슈베르티아데' 공연, 피아니스트 서형민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탁월한 연주자인지 새삼 확인하고 '하규태'라는 천재 피아니스트를 새로 알게 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결선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밖에 샹젤리제 오케스트라, 바흐 콜레기움 재팬, 하노버 NDR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등 멋진 공연이 많았지만, 지면이 짧으니 여기까지만 쓸게요.
통영이 아닌 곳에서 보았던 공연 가운데는 루체른 페스티벌 개막공연이 다른 어떤 공연보다 강렬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지난 9월 9일 자 칼럼 「리카르도 샤이, 루체른 페스티벌의 말러 교향곡 8번」에서 썼다시피, "이렇게까지 탁월한 말러 교향곡 8번 연주를 공연장에서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지요."
서울에서 보았던 공연 가운데는 국립오페라단의 바그너 《로엔그린》과 서울시오페라단의 베르디 《맥베드》가 좋았습니다. 《로엔그린》은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왔다는 객원 연주자, 특히 금관이 대단한 명연주를 들려주었고, '대중의 열광을 업고 탄생한 독재자 로엔그린'으로 해석한 연출과 연기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로엔그린과 텔라문트 사이에서 이른바 '간 보기'를 하던 하인리히 왕이 대세가 기울자마자 태도를 바꾸어 로엔그린과 웃으며 악수하는 장면, 로엔그린의 선동으로 합창단이 엘자에게 삿대질하던 장면, 그리고 소총을 든 남성 합창단의 '받들어 총' 장면이 특히 인상 깊더군요.
《맥베드》에서는 구자범 지휘자의 탁월한 지휘가 돋보였고, 참신하다는 말로는 모자란 충격적인 곡 해석이 대단했습니다. 이를테면 지휘자는 1막 전주곡을 느린 템포로 시작해 트릴에 갑작스런 템포 변화를 주었고, 트릴과 함께 악보에서 지시하는 악센트는 차라리 마치 마녀의 지팡이에서 마법이 폭발한 듯한 음향적 충격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템포와 셈여림과 음색 등은 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마법'으로 기능했고, 《맥베드》를 작곡하던 젊은 베르디의 미숙함이 느껴지는 피날레에서마저 지휘자의 '마법'이 결정적인 '한 방'을 제대로 터트렸습니다.
4막에서 피난민들이 탄식하는 대목(Patria oppressa)은 여러 가지 의미로 가슴 뭉클했습니다. 구자범 지휘자가 직접 번역한 가사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 나라는 자식들의 무덤이 되어버렸다.
매일 유가족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허나 하늘은 무심하고, 사람들은 그저 종이나 계속해서 울려댈 뿐,
진정 눈물을 흘릴 용기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