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을 이루는 3요소로 꼽혀 왔지요.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음색'이 그 못지않게 중요해졌습니다. 전통적으로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 기법은 관현악법(orchestration), 즉 특정 선율 · 리듬 · 화성에 특정 악기를 지정하고 다른 악기와 섞어 소리를 빚는 방법이었고, 음악학자 달하우스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의 가능성을 제시한 말러 교향곡 1번과 R. 슈트라우스 《돈 쥬앙》을 가리켜 음악적 모더니즘의 뿌리라고도 했습니다.
1960년대에 오면, 전통적인 화음 개념을 확장한 이른바 음 덩어리(cluster)로 선율 · 리듬 · 화성을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음색 또는 '음향'을 전면에 내세운 음악이 나타납니다.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쓰여서 ― 사실은 감독이 도용해서 ― 더욱 유명한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그리고 음악보다 제목이 더 유명한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같은 작품이 그렇지요.
음을 덩어리로 쌓아 만든 '음향'으로 음악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작곡가 윤이상이 찾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응용하면 동아시아 음악의 '음향'을 서양 악기로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윤이상이 만들어 낸 '음향'은 리게티나 펜데레츠키 같은 서양 작곡가들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서양음악에서는 개별 음은 고정되어 있어 다른 음과 관계를 맺으면서 음악적 의미가 만들어지지만, 동아시아 음악에서는 음 하나만으로도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면서 음악을 이루거든요. 살아있는 음이 모여 살아있는 화음, 살아있는 음향층을 이루는 것이 윤이상 음악 어법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이 《예악》(禮樂)입니다. 1966년 독일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면서 윤이상은 국제적인 스타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해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라는 극찬이 따라붙었고, 작품 속에 녹아든 정중동(靜中動) 원리는 '음 덩어리'를 조직하고 움직이는 원리를 고민하던 서양 작곡가들에게 훌륭한 돌파구로 제시되었습니다.
주요음향 또는 중심음향(Hauptklang)이라 불리는 윤이상식 음향은, 그 구성요소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살리고 덜 살리느냐에 따라 한국 전통음악의 음향이 살아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점에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전통음악을 모르는 서양 지휘자가 윤이상 작품을 지휘하면 그냥 서양음악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움베르토 에코)라는 말처럼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수만도 없겠지요.
다만, 언젠가 롤란드 클루티히(Roland Kluttig)라는 독일 지휘자가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이 곡을 연주했을 때, 그 음향이 종묘제례악이나 수제천에서 들을 수 있는 바로 그것이라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원류'를 모르고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소리를 독일인 지휘자가 만들어 냈던 것이지요. 제가 기억하는 가장 탁월한 《예악》 연주였습니다.
재미난 사실. 《예악》에는 국악기가 하나 쓰입니다. 한국 궁중음악에서 곡의 시작과 끝, 각 절의 끝에 연주되는 악기인 박(拍)이지요. 이 글 초고를 보신 어떤 분이 '공간을 가르며 침묵을 정주(停住)시키'는 악기가 박이라 평하시더군요. 악보를 보면 작곡가는 이것을 채찍을 뜻하는 'Peitsche'라는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그 뒤에 괄호를 치고 'Bak'이라고도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한국 궁중음악처럼 《예악》 처음과 끝과 중간 중간에 박이 효과적으로 사용됩니다.
2015 통영국제음악제 폐막 공연에서는 크리스토프 포펜이 지휘하는 통영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예악》을 연주합니다. 이들이 빚어내는 음향은 어떤 느낌일까요? 포펜 선생께 미리 《수제천》을 들려드려야 할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