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공연기획자의 '엑셀' 사용 능력에 관한 항변

제가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지역 언론인 『한산신문』에 보낸 원고입니다. 진작에 써놓은 글인데, 만에 하나 우리 공연에 피해가 갈까 봐 묵혀 놨다가 토요일 저녁에 보냈습니다. 활자화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할 듯합니다만, 시의성을 놓칠까 싶어 블로그에 먼저 올립니다. 『한산신문』에 양해를 구합니다.


공연예술 실무자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좌석 등급을 결정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있다면 참 좋겠지만, 보통은 엑셀을 사용합니다. 셀 하나가 공연장 좌석 하나가 되도록 모양을 고칩니다. A석은 이를테면 빨간색, B석은 노란색 등으로 지정합니다. 상사의 결정에 따라, 또는 짧은 지면에 쓰지 못하는 수많은 변수에 따라서 셀마다 색깔을 여러 차례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A석은 총 몇 석이고 B석은 총 몇 석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한 칸 한 칸 셀을 세는 방법도 있겠지만, 특정 색으로 지정된 셀이 몇 개인지 셈해주는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를 엑셀 파일에 심으면 훨씬 편하게 작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본 함수를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비주얼 베이직 같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일수록 엑셀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를 활용한 엑셀 사용 예
(위 좌석배치도는 통영 관내 공연장과 무관함)

제가 뜬금없이 '엑셀' 얘기를 꺼낸 까닭은, 어떤 경영자가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단체를 무능한 조직으로 매도함으로써 자신의 얼굴에 스스로 먹칠을 했을 뿐 아니라 공연계 종사자 전체가 무능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맡은 업무에 따라 엑셀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도 있지만, 그에 앞서 '엑셀 할 줄 아는' 공연계 종사자가 얼마든지 있다고 항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걱정입니다. 제 엑셀 사용 능력이 그 '무능'하다는 예술단체 사무국 직원들보다 낫다고 자신하지 못하겠거든요. '엑셀 고수'가 넘쳐나는 대기업에 있었다는 그 높으신 분 눈에는 저 또한 '엑셀 하나도 못하는 직원'으로 보이지 않을는지요. 아무래도 저는 엑셀 활용 능력을 좀 더 쌓아야 할까 봅니다.

공연기획자는 어느 연주자가 어느 작품을 연주할지 연주자와 협의해서 결정해야 하고, 그 연주자에게 합당한 연주료 '시세'와 그 연주자의 실력과 '티켓 파워'까지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연주할 작품에 특수한 악기가 쓰인다면 그 악기를 어디서 빌리거나 구매할지, 악보가 출판되어 있는지 아니면 저작권료를 내고 '대여'해야 하는지 확인하고 그 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비자, 숙박, 항공, 세금 등 다른 수많은 변수에 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이 모든 일에 음악 및 공연과 관련한 전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공연예술에 관한 지식이 조금도 없다고 알려진 그 높으신 분은 이런 사정을 헤아리는 대신에 엑셀 활용 능력으로 직원을 평가한 모양이지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인 '프루크루스테스'가 침대 크기에 사람을 맞추려고 사람 몸을 잘라버리려 했다는 얘기가 떠오릅니다.

예술을 모르는 경영 전문가가 예술단체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공연예술로 돈을 벌 수 없어서 '돈 끌어올'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예로부터 공연예술가는 누군가에게 후원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교회, 왕, 귀족 등이 그런 역할을 해왔고, 현대 사회에서는 대개 정부나 기업이 그런 일을 합니다.

예술뿐 아니라 피겨 스케이트, 쇼트트랙, 양궁, 핸드볼 등 우리가 세계 정상급 수준을 자랑하는 '비인기 종목' 스포츠도 정부와 기업의 지원을 받아 운영된다지요. 그쪽도 지원금이 많지 않아 빠듯한 모양인데, 그나마라도 있었기에 김연아 같은 탁월한 선수가 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경제 사정이 나빠질수록 이런 사람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되지만, 그래도 그 일이 좋아서 참고 일하게 되나 봅니다.

무능하다고 매도당한 그 예술단체 사무국 직원들 인권이 짓밟혔다는 충격적인 고발을 듣고 가슴이 아픕니다. 그곳보다 훨씬 급여가 적은 제 직장에 감사하게도 됩니다. 음악칼럼니스트 노승림 씨가 쓴 글을 조금 인용하면서 넋두리를 마칠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건 예술계가 이처럼 인권의 사각지대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돈과 예술 사이에서 아직도 여전히 묵묵히 침묵하며 저런 상황을 견디고 자신들의 인권을 희생하고 있는 예술계 스텝들이다. 오죽이나 맷집들이 좋으신지, 어지간해서는 들고 '엎으려'하기보다 그냥 '덮고'들 간다. […] 다만 이번 사태가 그들이 목소리를 낼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뒤를 이을 또 다른 젊은 세대들이 최소한 자신들의 인격은 챙길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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