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2일 월요일

베토벤 교향곡 9번 초연 당시 반응

아래 글 읽고 씀:
http://blog.goclassic.co.kr/zenate/1222064347

이 작품을 수용사적으로 연구한 논문 잘 찾아보면 있지 싶은데, 학술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고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음악을 평가하는 일은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과 전문가 및 고급 청취자 집단의 반응, 그리고 전문가 집단이 여론을 이끌고 나서 대중의 반응이 각각 다를 때가 잦습니다. 그러니 관객 수가 적었다는 사실만으로 반응이 시원찮았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언론은 이렇게 써놨네요:

"나는 지금은 냉정함을 되찾아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영혼이 누리는 환희, 예술과 진실이 여기서 최고로 찬란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이 이상의 작품은 없다고." (라이프치히 음악 신문)

"베토벤의 거인적 열정이 낳은 최상의 예술 작품" "작곡가들은 넘기 어려운 큰 산을 만났다" (알게마이네 테아터차이퉁 Allgemeine Theaterzeitung)

"젊음의 힘" "영원한 정열의 불길" "머리는 눈으로 덮여 있으나 속에는 한없는 열정이 들끓는 불카누스(화산)" (자믈러 Sammler)


그리고 요즘처럼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써는 작품 평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실제 연주가 아닌 악보라 할 수 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악보가 출판된 것은 초연된 지 약 2년 뒤인 1826년입니다. 이 정도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니고 바그너가 아직 어린애였을 때이니 바그너의 노력 덕분에 이 작품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당시 악기 구조나 연주 기술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이 작품이 연주 불가능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할지라도 악보가 있는 한 전문가 집단으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은 낭만주의의 아버지라 할 만큼 당시 작곡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넘을 수 없는 벽이자 어떻게든 자신이 후계자임을 자처해야 할 위대한 작곡가였습니다. 그리고 베토벤 작품 가운데서도 교향곡 9번이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지요. 바그너가 했다는 노력 또한 레토릭(rhetoric)을 걷어내고 나면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실제로 바그너만큼 자신이 베토벤의 후계자임을 강력하게 주장한 작곡가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브람스를 옹호했던 한슬릭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기도 했지요.

베토벤 시대 악기와 현대 악기가 많이 다르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그너 시대 악기와 현대 악기는 많이 다르지 않지요. 그래서 바그너와 말러 등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당시 악기에 맞게 새로 편곡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역사주의가 유행하면서 그 흔적을 없애고 있지만요. 이를테면 4악장 도입부에서 (현대 악기로 연주할 때에도) 트럼펫 가필 없이 목관악기들만 주선율을 뿅뿅거리면서 연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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