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7일(수)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Stravinsky: Divertimento from Fairy's Kiss (22')
Turnage: Trumpet Concerto (15')
Tchaikovsky: Symphony No. 6 in b minor, Op.74 'Pathetique' (46')
Misha Santora (cond.)
Håkan Hardenberger (tp)
올해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 레퍼토리는 놀랍다. 현대음악이 고전-낭만 시대 작품과 비슷한 비중으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미 '고전'으로 자리 잡은 20세기 작품뿐 아니라 아직 개인이 악보를 구할 수 없는 최신작도 꽤 있으며, 서울시향이 국내 작곡가에게 위촉한 작품도 연주될 모양이니 더욱 놀랍다. 그동안 현대곡이 자주 연주되지 않은 것은 대중에게 외면받아온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검증된 작품만을 연주하는 것은 클래식 음악을 점차 박제로 만드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외국 유수 악단의 공연에서는 현대음악이 심심치 않게 연주되며, 독일에서는 신작이 발표되는 연주회 티켓이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빨리 매진된다니 그에 비하면 우리 음악계는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가. 그런데 이제 서울시향이 (적어도 연주회 프로그램으로는) 외국 유수 악단과 발맞추게 된 것이다. 세계적인 작곡가 진은숙이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가 되고서 약 일 년만의 일이다.
2월 7일 있었던 정기연주회에서도 마찬가지로 19세기 작품(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과 20세기 작품(스트라빈스키 디베르티멘토), 그리고 21세기 작품(터니지 트럼펫 협주곡)이 함께 연주되었다. 터니지(Mark-Anthony Turnage)의 트럼펫 협주곡 "난파의 잔해로부터 From the Wreckage"는 재작년에 세계 초연된 작품으로 이날 협연을 맡은 호칸 하르덴베리에르(Håkan Hardenberger)를 위해 작곡되었다.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 듯했고, 플뤼겔혼(flügelhorn), C조 트럼펫, 피콜로 트럼펫이 각 부분의 독주에 사용되었다. 이 곡은 원래 작곡가의 어두운 시절에 대한 회상이며 '난파선'과의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첫째와 셋째 부분의 음울한 블루스 리듬은 묘하게 바다의 심상을 떠올리게 했다. 흐린 날 저녁 바다에 낡은 배 한 척이 파도에 흔들리고, 붉게 물든 하늘에 갈매기 한 마리가 외로이 날아가는 풍경을 상상해보라. 이렇게 보면 사나운 둘째 부분은 바다에 몰아치는 폭풍우 같고, 타악기와 금관의 뒤뚱거리는 부점 리듬은 거친 파도에 흔들리는 배 같기도 하다.
이날 연주회의 하이라이트는 하르덴베리에르가 반주 없이 들려준 두 곡의 앙코르였다. 첫 곡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 작곡의 저 유명한 재즈곡 "My Funny Valentine"이었고, 두 번째 곡은 원래 스웨덴 민요라고 하나 정확한 곡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두 곡 모두 쳇 베이커(Chet Baker)나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를 닮은 재즈 양식이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터니지의 트럼펫 협주곡과 통하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터니지가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르덴베리에르가 여기서 사용한 약음기는 스템(stem)을 제거한 하몬 뮤트(harmon mute)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마일스 데이비스가 즐겨 쓰던 종류의 약음기다. 약음기를 사용한 곡을 연주한 것은 사실 이날 하르덴베리에르의 윗입술 쪽에 상처가 있어서라고도 하는데, 그럼에도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가 시시하게 느껴질 만큼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준 것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극도로 여리면서도 거짓말처럼 또렷하게 귀에 감기는 소리, 꿈결처럼 잔잔한 비브라토, 홀린 듯한 관객들…. 유치하게도 나는 은은한 조명 아래서 와인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휴식 시간에 지인이 말했다. 이 분위기에서 '비창 교향곡'이 웬 말이냐!
서울시향의 앙상블은 뜻밖에 실망스러웠다. 터니지 트럼펫 협주곡이야 생소한 작품이니 일단 좋은 연주였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은 서울시향의 평소 실력을 고려할 때 아쉬움이 많았고, 스트라빈스키 디베르티멘토는 기껏해야 평균적인 국내 악단 수준이었다. 어쩌면 미샤 산토라(Misha Santora)의 지휘에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휘하는 품이 영 수상한 것이 연주자들과 사인이 맞지 않아 박자가 곧잘 어긋나기도 했다. 또 어쩌면 실력은 뛰어나지만 아직 젊어서 경험이 부족한 지휘자가 외국 유수 악단보다 많이 부족한 서울시향을 이끄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아니. 상당수 단원이 지휘자에게 눈길도 잘 주지 않고 악보를 따라가기에 급급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악보에 뻔히 있는 악센트나 헤어핀(hairpin; <>) 등은 제대로 지키지 않고 밋밋하게 연주할 때가 많았다. 무시해도 좋을 '사소한' 실수들은 쌓이고 쌓여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혹시 그동안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연습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나는 이른바 '찾아가는 음악회'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정기연주회에 지장을 줄 정도라면 곤란하다.
한국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자신의 연주를 스스로 즐기지 못하는 듯하다. 서울시향도 예외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연주가 관객을 감동시키기는 어렵다. 그런데 단원들과 동떨어져 홀로 연주를 즐기는 듯한 사람이 한 사람 있기는 했다. 객원으로 보이는 첼로 수석이다. 듣자 하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첼로 수석 루이지 피오바노인 모양인데, 이탈리아인 기질인지 과장된 몸짓과 앙상블을 무시하는 제멋대로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 첼로 파트를 혼자 맡은 것처럼 튀는 음량 등이 마냥 듣기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향은 그의 연주를 배워야 한다. 악장을 가볍게 압도하고 때로는 지휘자마저 이끌어 가던 카리스마, 그러면서도 악보 못지않게 지휘자를 열심히 올려다보면서 지휘자의 지시를 실시간으로 연주에 반영하려고 노력하던 성실함은 악장을 비롯한 각 파트 수석들이 본받아야 한다.
전부터 느끼던 것이지만 시향의 트롬본 주자들은 부점 리듬에 취약한 것 같다. 이날 연주에서도 이를테면 스트라빈스키 디베르티멘토 2악장 마디 9에서 제3 트롬본이 부점 리듬을 처리하느라 갑자기 템포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말았다. 몇 마디 뒤에 같은 음형을 연주하는 제1 트롬본의 템포 또한 살짝 느려졌으며 부점 리듬도 썩 깔끔하지는 않았다. 트롬본이라는 악기 특성상 재빠른 음형을 연주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세계적인 수준을 지향하는 악단이라면 그 정도의 어려움은 일찌감치 극복해야 한다.
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