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이 음원을 듣고 있으면, 베토벤의 초기작으로 그다지 인기가 없는 교향곡 1번과 2번이 사실은 얼마나 혁신적인 작품이었는지를 깨닫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교향곡 3번, 4번, 5번 연주의 탁월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다섯 작품에 대한 내 마음속 최고의 연주는 이미 조르디 사발과 르 콩세르 데 나시옹의 녹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교향곡 6번부터 9번까지 녹음한 음원이 하루빨리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지난해 이맘때 칼럼에서 이렇게 썼지요. 1년이 지나 조르디 사발과 르 콩세르 데 나시옹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독일 본에서 지난 8월 20일부터 9월 10일까지 이어졌던 ’베토벤 페스티벌 본’의 개막 이튿날인 8월 21일에 있었던 공연이었습니다. 이날 공연은 유튜브로 생중계되었는데,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도 실황 영상을 감상할 수 있더군요.
연주 전에 누군지 모르겠는 어떤 남자가 축하 연설을 했습니다. 조금 엉뚱하게도 말러 교향곡 2번 얘기를 하더군요. 독일어 실력이 일천해서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코로나-19로 취소되었던 ’2020 베토벤 페스티벌 본’의 주제가 말러 교향곡 2번에 나오는 유명한 노랫말 “부활하라, 그래 부활하라!”(Aufersteh’n, ja aufersteh’n!)였던 모양이더군요. 페스티벌을 다시 치를 수 있게 된 올해 상황과 어울리는 주제라 할 수 있겠죠. 객석 띄어앉기를 하지 않고 연주회장을 가득 채운 관객을 보니 얼마나 부럽던지요!
이날 연주도 ‘부활’ 모토와 어울렸습니다. 환희(Freude)로 광분하는 연주가 아니라 ‘힐링’(Heilung)에 무게가 실린 연주였지요. 연주를 듣고 난 저는 베토벤 교향곡 9의 유명한 노랫말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와 ’오 벗이여, 이런 소리 말고’를 패러디해서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습니다. “Heilung, schöner Götterfunken, nicht diese Freude.”(위안이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 환희 말고.)
조르디 사발의 베토벤 교향곡 음반을 듣고 썼던 칼럼에서, 저는 음반에 담긴 ’음향적 스펙터클’이 실제 공연에서도 가능한지 궁금하다고 썼습니다. 이번에 들어본 실황 연주는 음반만큼의 ’매운맛’은 아니었고 자잘한 실수도 제법 있었지만, 그래도 저는 실연에서 꽤 그럴싸한 ’매운맛’이 베토벤 시대 악기로 가능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특히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가 불을 뿜었지요. 다만, 2악장에서 어째 ’독기’가 많이 빠져 있다 싶더니, 3악장을 지나 4악장이 되면서 ’환희’보다는 ’치유’와 ’위안’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습니다.
이번 연주에도 베토벤 시대 현악기에 쓰이던 현의 소재와 활 구조 등에서 오는 ’식물성 사운드’가 특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오케스트라 총주 때에도 현악기 소리가 관악기 등에 묻히지 않아서 평소에 잘 안 들리던 음형이 인지되는 참신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솔로 가수들은 다들 바로크 음악 전문인 듯했고, 특히 바리톤 마누엘 발저의 맑고 가녀린(!) 목소리와 바로크 음악에 어울릴 법한 장식음 사용에 놀랐습니다.
시대악기 연주가 흔히 가벼운 편성으로 날렵한 템포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이날 연주는 특히 4악장 템포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던 점도 특이했습니다. 특히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와 ’백만인이여 내게 안겨라’ 두 가지 노랫말이 동시에 진행되는 이른바 ’이중푸가’의 템포가 느려서 낯설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악보를 보니 메트로놈 지시가 84 BPM이었고, 이날 연주는 대략 86 BPM으로 오히려 악보 지시보다 살짝 빨랐더군요!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마지막 가사는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Götterfunken!”(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 신의 불꽃이여!)입니다. 이 대목에는 흔히 프레이즈 곳곳에 늘임표(페르마타)를 사용해 ‘환희’ 느낌을 강조하지만, 이날 연주는 음을 전혀 늘이지 않고 담백하게 악보 그대로였던 점이 신기했습니다. 악보에 늘임표가 없는 게 맞나 싶어서 확인해 보니, 정말로 없더라고요!
이쯤에서 새삼 궁금해지는 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올 조르디 사발 베토벤 교향곡 9번 음반에 담긴 연주는 이날 공연 실황 연주와 어떻게 다를까요?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