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SPO』에 실린 글입니다. 출간본과는 제목과 인명 표기 등이 조금 다릅니다.
최근 10여 년간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지휘자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 21세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 되었던 1975년생 대니얼 하딩부터 최근 파리 오케스트라 차기 음악감독으로 선정된 1996년생 클라우스 마켈라까지, 어린 나이에 유명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가 요즘에는 드물지 않다. 주요 오케스트라의 만성적인 재정난, 음악 산업에 영상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 등이 그 배경으로 거론된다.
지휘자 세대교체 바람이 남성에게만 선택적으로 부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 지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낯설었던 지난 세대의 여성 지휘자들이 개인의 탁월한 능력으로 차별과 편견을 이겨나간 예외적 존재였다면, 성평등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자리 잡고 있는 오늘날 음악대학에는 여성 지휘 전공자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리고 사회적·제도적 변화에 힘입어 훌륭한 여성 지휘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음악계에 성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기는 물론 어렵다. (그리고 남성인 글쓴이가 이와 관련해 함부로 발언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만, 젊은 여성 지휘자들이 콘서트홀보다 오페라 극장에서 커리어를 키워나간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오페라 극장이 콘서트홀보다 성평등에 더 적극적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오페라 극장이 콘서트홀보다 더 많은 지휘자를 고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 지휘자 가운데 1980년 이후에 출생한 젊은 지휘자들을 소개한다. 또한 지휘자의 커리어와 관련한 이해를 돕기 위해 특히 독일어권의 오페라 극장 시스템을 함께 소개한다.
오페라 지휘자의 커리어 쌓기
우리에게 이름이 익숙한 유럽 대도시의 오페라 극장에서는 한 해에 300회 이상 공연이 열리는 것이 보통이다. 시즌과 시즌 사이의 휴식기를 제외하면 사실상 날마다 오페라 또는 발레 공연이 열리는 셈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극장은 지휘자와 악장 등을 여러 명 고용한다.
유럽에서 오페라 지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대개 오페라 극장에서 피아노 반주로 가수들의 연습을 돕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런 사람을 레페티토어(Répétiteur) 또는 코레페티토어(Korrepetitor)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흔히 ‘음악 코치’ 또는 ’오페라 코치’로 번역한다. 음악 코치는 많은 경우 지휘자의 리허설을 돕는 보조지휘자 역할을 겸하고, 보조지휘자로 경력이 쌓이면 지휘자로서 일회성 공연을 맡아 한 시즌에 한두 번 정도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음악 코치로 시작해 지휘자로 실력을 인정받으면 카펠마이스터(상임지휘자)가 될 수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이 되는 오페라 극장은 음악감독 외에 카펠마이스터를 2~3명 또는 그 이상 고용하고 있으며, 일부 특급 오페라 극장에서는 카펠마이스터를 고용하는 대신 객원 지휘자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식으로 극장을 운영하기도 한다. 각각의 카펠마이스터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 또는 발레 공연 시리즈를 프로덕션 단위로 맡아 이끌게 된다. 같은 프로덕션으로 여러 차례 공연하면서 일부 공연을 다른 지휘자가 맡기도 하는데, 이때 음악 코치에게 지휘 기회가 돌아갈 수도 있다.
오페라 극장에서 카펠마이스터로 명성이 쌓이면 음악감독이 될 수 있다. 음악감독은 때때로 스타 지휘자로서 극장의 얼굴마담 역할을 겸하게 되며, 여러 극장 및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겸직하는 일도 흔하다. (오페라 극장이 아닌 콘서트홀에 소속된 오케스트라에서는 음악감독과 카펠마이스터가 동의어인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카펠마이스터이다.)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 (Mirga Gražinytė-Tyla)
1986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는 지난 2016년 영국 버밍엄 시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선정되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으며 스타 지휘자로 도약했다. 13세 때 처음으로 합창단을 지휘했고, 오스트리아 그라츠 음대에서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뒤 독일 라이프치히 콘서바토리와 스위스 취리히 콘서바토리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보조지휘자 및 부지휘자, 독일 하이델베르크 오페라 극장 차석상임지휘자(카펠마이스터), 스위스 베른 오페라 극장 수석상임지휘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시립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 등을 역임했다.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는 결혼을 하지 않고 연애로 아들 둘을 낳아 기르고 있으며, 첫째는 2018년 8월생, 둘째는 2020년 9월생이다.
요아나 말비츠 (Joana Mallwitz)
1986년생이며 현재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이다. 하노버 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했고, 2006년 하이델베르크 오페라 극장의 음악 코치로 커리어를 시작해 ‘나비부인’ 공연으로 지휘자로 데뷔했으며, 이듬해 하이델베르크 극장의 차석상임지휘자가 되었다.
2014년에는 독일 에르푸르트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 됨으로써 에르푸르르트 극장 최초의 여성 지휘자이자 독일 오페라 극장을 통틀어 최연소 음악감독이 되었다. 2018년에 뉘른베르크 극장 음악감독이 되었고, 2020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 판 투테’를 지휘하면서 (대타 지휘자를 제외하고 오페라 프로덕션을 이끄는 정식 지휘자로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역사상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기록되었다.
김은선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음악감독이다. 정식 임기는 2021년부터이며, 메이저 오페라단으로서는 미국 역사상 첫 번째 여성 음악감독이자 정명훈을 제외하면 한국인 최초 메이저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이다. (정명훈 지휘자는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 시절에 미국 국적이었다가 나중에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에스파냐 마드리드 레알 오페라 극장 및 프랑스 리옹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보조지휘자로 커리어를 시작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에서 ’라 보엠’으로 지휘자 데뷔했다. 이후 유럽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객원 지휘자로 경력을 쌓았고,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이나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등 카펠마이스터를 고용하지 않는 특급 오페라 극장에서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비정규직 카펠마이스터’로 활약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선정되기에 앞서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 수석객원지휘자를 역임했다.
카리나 카넬라키스 (Karina Canellakis)
1981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리스-러시아계 미국인으로, 현재 네덜란드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이자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수석객원지휘자,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객원지휘자이다. 커티스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에서 사이먼 래틀의 눈에 띄어 지휘를 배우기 시작해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보조지휘자로 경력을 쌓다가 2014년 야프 판 즈베던의 긴급 대타로 데뷔했다. 2015년에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대타로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2016년에는 유리 테미르카노프 대타로 덴마크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했으며, 이후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며 명성을 얻었다.
알론드라 데 라 파라 (Alondra de la Parra)
1980년 뉴욕에서 태어난 멕시코계 미국인으로,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다. 멕시코에서 작곡을 공부했고 뉴욕 맨해튼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다. 뉴 암스테르담 심포니 오케스트라 보조지휘자로 경력을 쌓았고 2003년 멕시칸-아메리칸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멕시코 정부 기금을 지원받았다. 2012년에 멕시코 할리스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 되었고, 2015년에 퀸즐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 되었다.
엘림 찬 (Elim Chan)
1986년생 홍콩 지휘자로 중국식 이름은 천이린(陳以琳)이다. 현재 벨기에 안트베르펜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며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 수석객원지휘자를 역임했다.
제마 뉴 (Gemma New)
1986년 뉴질랜드 출생으로 현재 캐나다 해밀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자 미국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객원지휘자이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주 지휘자 겸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유스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장한나
설명이 필요 없는 스타 첼리스트 출신 지휘자로 1982년생이다. 현재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며,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아리안 마티아크 (Ariane Matiakh)
1980년 프랑스 태생으로 독일 할레 오페라 극장 및 할레 슈타츠카펠레 음악감독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