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4일 화요일

에딕손 루이스와 꿈의 오케스트라 통영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잊어먹고 있다가 뒷북으로 블로그 백업.


에딕손 루이스(Edicson Ruiz). 나이 열일곱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최연소 단원이 되었던 천재 베이시스트.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빈민가 출신으로 무상 음악 교육 사업인 '엘 시스테마'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아 더블베이스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제 만33세가 된 젊은이. 그가 통영 공연을 앞두고 '한국형 엘 시스테마' 교육 사업인 '꿈의 오케스트라 통영' 수업을 참관했습니다.

파란 눈을 한 베네수엘라 청년과 갈색 눈을 한 한국 어린이들은 서로서로 신기해했습니다. 아이들이 합주하는 동안 에딕손 루이스는 합주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구경했습니다. 연주가 끝난 뒤에는 아이들이 악기를 배운지 얼마나 됐는지 물어보고, 배운 기간에 견주어 연주가 훌륭하다는 칭찬과 함께 전체 합주보다 파트별 연습 비중을 늘리는 게 좋겠다는 조언도 해줬습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악기를 처음 배우던 시절 얘기가 나왔습니다. 에딕손 루이스는 어렸을 때 질 나쁜 형들을 따라다니며 말썽을 피웠다고 해요. 경제 발전 수준이 낮은 나라의 빈민가에서 흔히 있을 법한 일이지요. 엘 시스테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곳에서는 등굣길에 총탄이 날아다니고 그 총탄에 사람이 맞아 죽는 일이 곧잘 일어났다고 합니다. 엘 시스테마가 한 아이의 인생을 바꾼 흔한 사례입니다.

악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연습을 얼마나 했느냐는 한 아이의 질문에 에딕손 루이스는 11시간 정도 연습했다고 답했습니다. 모르기는 해도 이론 교육 등을 포함한 전체 교육 시간을 다 합쳐서 과장되게 말했겠지요. 지금은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하루 5시간, 개인 연습을 1.5시간 정도 한다네요. 이렇게 연습을 많이 하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입단할 수 있다며 아이들에게 능청스러운 소리도 했습니다.

에딕손 루이스는 아이들을 만난 김에 즉석에서 연주까지 해 보였습니다. 신나는 곡 하나와 느리고 슬픈 곡 하나를 연주했는데, 느린 곡은 공연 때 연주할 에프라인 오스체르 ‹베네수엘라 풍의 바로크 4번› 중 2악장 '안단테 멜랑콜리코'이더군요. 이 곡이 어머니가 떠오르는 곡이라며 자신의 연주를 듣고 너무 슬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막상 연주를 시작하니 더블베이스가 아주 통곡을 했습니다.

다음날에는 경상남도교육청 주최 다문화교육 정책학교 워크숍이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렸고, 통영국제음악재단 플로리안 리임 대표님이 다문화 사회에서 음악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하셨습니다. 플로리안 리임 대표님은 '엘 시스테마'를 음악이 사회 갈등 해소에 기여한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하고, 다른 예로 이스라엘 유대인 청소년과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 아랍인 청소년들로 구성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소개했습니다.

플로리안 리임 대표님은 또한 한국·일본·홍콩의 전문 음악인을 중심으로 조직한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통영을 시작으로 일본과 홍콩에 투어 공연을 다녀왔던 일, 통영시립소년소녀합창단이 일본 교류 공연을 다녀오고 아이들이 현지 합창단 아이들 집에서 숙박하며 교류했던 일, 그리고 다문화 교육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일류 연주자를 초청할 때 통영의 초중고생을 위한 무료 공연을 추가하는 '스쿨 콘서트' 등을 통영국제음악재단의 음악 교육 프로그램으로 소개했습니다.

이른바 접촉 가설(Contact hypothesi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심리학, 사회학, 범죄학 등에서 집단간 갈등을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을 연구한 결과를 일컫는 말로 '집단내 접촉 이론(Intergroup Contact Theory)'라고도 부르지요. 서로 다른 두 집단 구성원이 자주 만날수록 갈등이 줄어든다는 이론인데,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 대등한 상황(Equal Status): 두 집단이 대등한 상황에 놓여 있어야 한다.
  • 공동 목표(Common Goals): 두 집단이 같은 목표를 실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 집단간 협력(Intergroup cooperation): 공동 목표 성취를 위해 두 집단이 협력해야 한다.
  • 권위, 규칙, 또는 관례의 뒷받침(Support of authorities, law or customs): 두 집단 구성원이 서로 접촉하고 상호작용하도록 두 집단이 모두 인정하는 권위자나 규칙이 뒷받침해야 한다.
  • 개인적 상호작용(Personal interaction): 두 집단 구성원 개개인이 다른 집단 구성원과 친밀해질 가능성이 다양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꿈의 오케스트라는 이런 점에서 '접촉 가설'에 딱 들어맞는 이상적인 환경이라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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