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9일 금요일

여성 음악가와 음악계의 성 평등

『한산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


'지휘자의 본질은 힘이며 여성의 본질은 나약함이므로 여성 지휘자는 자연에 어긋난다.'

예전에 어떤 유명 지휘자가 이 말을 했다가 전 세계적 스캔들이 되었습니다. 다른 유명 지휘자가 성차별적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된 직후에 나온 발언이라 더욱 큰 문제가 되었지요. 또 어떤 유명 작곡가는 자신이 학장으로 있는 콘서바토리에 성차별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정치적인 답변을 했다가 지나치다 싶게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3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음악계에도 성차별을 줄이자는 목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휘나 작곡 등 여성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던 분야에서도 훌륭한 여성 음악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린 앨솝, 시모네 영, 수산나 말키 등 세계 정상급 지휘자가 나타났고, 한국인 중에서도 김은선, 성시연, 여자경 등 여성 지휘자가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지요. 2015 통영국제음악제에서 홍콩 신포니에타를 지휘했던 예용시(葉詠詩) 선생도 여성이었습니다.

작곡가는 그리스 시대 음유시인 사포(Sappho)나 12세기 작곡가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 등 여성 작곡가가 꾸준히 있었지만, 20세기 들어 남성 작곡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작곡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은숙, 올가 노이비르트, 카이야 사리아호, 이사벨 문드리, 레베카 사운더스,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등이 대표적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여성과 가장 관련 없을 듯한 금관악기 연주자 중에서도 여성이 있습니다. 호른 연주자는 제법 많고, 국내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도 여성 호른 연주자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요. 트럼펫 연주자 앨리슨 발솜(Alison Balsom)은 클래식 음악계의 섹시 스타로 이름이 높고, 국내 모 오케스트라 트럼펫 수석 단원도 여성입니다. 여성 트롬본 연주자도 있나 싶어서 검색해 봤더니 제법 있는 모양입니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때 하노버 체임버 오케스트라 객원으로 섭외했던 한국인 튜바 연주자도 여성이었지요.

서양에서 여성 오케스트라 단원이 일반화된 일은 의외로 불과 몇십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국내 오케스트라에 남성 단원이 많지 않은 사실과 견주면 더욱 뜻밖이지요. 이를테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97년이 되어서야 여성 단원을 받아들였고, 아직도 여성 차별로 꾸준히 구설에 오르곤 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라리네티스트인 자비네 마이어를 단원으로 데려오면서 기존 단원과 한바탕 크게 싸웠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요즘은 사람들의 인식이 더욱 크게 달라지는 중이지요. 지난해에는 한 유명 남성 지휘자가 인터뷰에서 여성 지휘자에 관한 의견을 말했다가 성차별 발언이라며 많은 비판을 받고 뒤늦게 사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휘자는 여성 지휘자를 대놓고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얼핏 멀쩡해 보이는 말 뒤에 숨은 편견이 엿보였기 때문이지요. 아래 발언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 이해되지 않으시는 분은 앞으로 말조심을 하셔야 할 듯합니다:

"흠, 뭐. 뭐 싫다는 건 아니고, 반대하지 않아요. 그걸 반대한다면 매우 잘못된 거죠. 세상이 바뀌었고, 이제 어떤 직업도 특정 성별에 제한되지 않지요. 이건 누가 무엇에 익숙하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자랐고, 여성이 포디엄에 서는 걸 보면… 뭐 그냥 나는 관심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또 여성 작곡가를 지칭할 때 퍼스트네임(first name)을 쓰곤 하는 언어 관습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지난해 미국 음악평론가들 사이에서 있었습니다. 남성 작곡가와 여성 작곡가를 부를 때 서로 다른 원칙을 사용하는 것이 성차별적이라는 얘기였지요. 무엇보다 베토벤을 '루트비히'라 쓰지는 않는다고요. (그런데 캐나다 밴쿠버에서 있었던 ISCM 세계현대음악제에 갔더니, 거기서는 정말로 프로그램 노트에 '루트비히'라고 쓰더군요!)

그런데 이쯤에서 드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한국에서 여성이 작곡가 협회의 수장을 맡은 일이 있습니까? 그런 걸 맡을 만큼 단단한 경력을 쌓은 여성 작곡가 가운데 외국이 아닌 한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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