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8일 목요일

윤이상: 광주여 영원히 (1981)

"보편적인 '모범'(Exemplum)이라 할 수 있는 이 역사적 사건을 넘어, 이 작품이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이자 온 세상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의 촉구가 되기를 바란다." (윤이상)

이 작품의 원제목에 쓰인 "Exemplum"(엑셈플룸)은 라틴어로 표본, 사례, 모범 등을 뜻한다. 광주민중항쟁이 그저 동아시아라는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민주주의 역사를 말할 때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세계사적 '모범'이라는 인식에서 온 제목이다. 서양 전통 보편언어인 라틴어를 제목에 사용한 까닭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라틴어 제목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자면 ‹모범: 광주를 추모하며›가 적당하다.

음악학자 홍은미는 이 작품을 '사건 기록'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권한다. ‹모범›은 표제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이지만 실제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관현악이라는 추상적 언어로 쓰였다. 윤이상은 비극을 스펙터클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테면 타악기를 되도록 뒤쪽에 배치할 것과 셈여림이 극적이되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이어서는 안 된다고 악보에서 지시하고 있다.

'발포' 장면에서 총소리에 걸맞은 굉음 대신에 한국 전통 악기 박(拍)을 사용한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박(拍)은 공간을 가르며 침묵을 정주(停住)시키는 악기라 했다. 총격의 사실감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이 소리는 폭력의 스펙터클 대신에 정서적 효과를 높인다는 점에서 효과음을 제거 또는 왜곡한 슬로우모션 영상 기법을 닮았다.

단악장으로 된 이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연대하고 저항하는 동안 금관악기가 때때로 으르렁거리며 대립하는 식으로 갈등이 증폭되고, 끝내 아비규환에 이른다. 둘째 부분에서는 (음악학자 볼프강 슈파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학살 후의 음산한 고요함으로 시작해 마비 상태를 지나 금관과 팀파니 소리와 함께 깨어난다. 비탄이 이어진다.

셋째 부분에서 다시 저항이 시작된다. 첫째 부분과 달리 금관의 사나운 울부짖음도 개별 음이 모여 만들어 내는 거대한 흐름을 막지 못한다. 볼프강 슈파러는 이것을 환상 속의 행진이자 미래를 향한 전망 및 호소로 보았으며, 한스베르너 하이스터는 이 곡의 끝이 참된 끝이 아니라 이상향을 향해 계속되는 행렬이라 했다.

이 작품에 담긴 '드라마투르기'는 발전론적 역사관과 닿아 있다. 그러나 윤이상이 음을 다루는 방식은 동아시아적 세계관에서 온 것으로, 개별 음들은 각자의 생명력으로 생장하고 순환하고 소멸할 뿐 목표를 향해 발전하지 않는다. 하이스터는 윤이상이 "과거의 것은 아무것도 남김 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처리"한 것에서 "한국인에게 억압과 기아와 죽음을 가져온 자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읽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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