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1일 목요일

우리 안의 유토피아를 말하는 세 가지 음악

『클럽 발코니』 2016년 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2015년은 불행한 일이 많았던 한 해였으니 독자에게 위로가 될 만한 글을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원래 존댓말로 글을 썼지만, 신년 특집으로 여러 사람 글을 묶느라 편집장님께서 반말체로 고치셨습니다. 이곳에 올리는 글은 고치지 않은 원문입니다.


"어리석음과 폭력이 반복되는 잔인한 현실을 함께 바라보면서도 "만인은 만인에 대한 신(神)(homo homini deus)"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스피노자다. 고통받는 이들을 더 이상 동정하지 말라고, 동정이 아닌 사랑을 외친 자가 있으니 니체다. […] 오히려 가장 쓰디쓴 운명까지 모든 수동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니체), 갈기갈기 찢겨졌던 신은 죽음을 딛고 부활한다(디오니소스)."

미학자 이진 선생이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쓴 말입니다. "자비심으로 깨달으리라"(durch Mitleid wissend)라는 유명한 대사를 중심으로 쇼펜하우어 철학과 불교 사상을 아우르며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을 고찰한 멋진 글이지요. 자비심(Mitleid)이란 '함께 고통을 겪는 일'(mit-leiden)이자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이며, 거기서 그치지 말고 '함께 기뻐하는'(Mit-Freude)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의미를 헤아리고 나면, 《파르지팔》에 나오는 어딘가 이상한 마지막 대사 "구세주께 구원을!"(Erlösung dem Erlöser!)이 새롭게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새해부터 《파르지팔》을 듣기에는 음악이 조금 무겁지만, 저 마지막 대사가 나오는 피날레만큼은 매우 평화롭고 듣기 좋으니 꼭 추천하고 싶네요.

앞서 니체를 인용하고 나서 생각난 곡이 있습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예요. 니체가 말한 정신 발전의 3단계, 즉 권위와 주인에 의존하는 낙타의 단계,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자의 단계, 아이처럼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어린이의 단계가 음악으로 훌륭하게 나타나지요.

사자의 단계에서 어린이의 단계로, 그러니까 '춤의 노래'에서 '몽유병자의 노래'로 나아가면서 이 곡 전체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과 그 뒤에 평화롭고 아늑하게 바뀌는 음악이 아주 멋집니다. "그것이 바로 삶이었던가." 나는 죽음에다 대고 말하련다. "좋다! 그렇다면 한 번 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니체 철학은 결국 개인주의적인 기획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쇼펜하우어가 '본질적'(noumenal) 세계에서는 '현상적'(phenomenal) 세계와 달리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하나이며, 따라서 남의 고통과 나의 고통 또한 다르지 않다고 한 것과 대조적이지요.

구스타프 말러는 교향곡 3번에서 니체를 인용하면서도 인식의 지평을 세계 전체로 넓혔습니다. 구자범 지휘자의 해석을 빌리자면 "세계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1악장을 지나, 꽃(2악장), 동물(3악장), 사람(4악장), 천사(5악장), 사랑(6악장)이 바라보는 세계를 차례로 보여주는 짜임새이지요.

4악장 '인류가 내게 말하는 것'에서 말러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인용해 말합니다.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하고, 쾌락은 큰 고통보다 깊은 곳에 있다(Lust—tiefer noch als Herzeleid)라고요. 구자범 지휘자의 해석을 좀 더 빌리자면, 쾌락을 얻으려면 먼저 고통을 이겨야 하고, 고통을 이기고 행복을 얻으려면 '사랑'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6악장 '사랑이 내게 말하는 것'에서 말러는 세계 전체를 포용하는 커다란 사랑을 음악으로 그렸습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고민 끝에 시 한 편, 지면이 모자라서 일부만 인용할게요.

설레이는 신의 겨울,
그 길고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회잉(懷孕)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알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뢰(雨雷)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김종철, 「재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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