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국제음악당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프로그램 노트입니다.
바흐: G장조 모음곡 BWV 1007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1번'으로 알려진 바로 그 작품입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짜임새가 어떻다는 얘기는 그다지 필요 없을 듯해요. 대신, 널리 퍼진 오해 한 가지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바흐 첼로 모음곡은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가 '재발견'했다고 알려졌지요. 그러나 이 말은 오해와 달리 '재발견' 전까지 존재 자체가 완전히 잊혔다는 뜻은 아니에요. 단지 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그저 '연습용'으로만 여겨졌을 뿐이지요. 작품의 진가를 카살스 이전에 알아본 사람으로 이를테면 슈만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피아노 편곡해서 출판하려고 했다가 거절당했다고도 하지요.
최신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바흐가 '비올론첼로'(Violoncello)라고 했던 악기는 사실 첼로가 아니라, 첼로와 비슷하지만 어깨에 메고 연주하는 다른 악기였다고 합니다. 악기 이름에 혼선이 있지만 '비올론첼로 다 스팔라'(Violoncello da spala) 또는 '비올라 다 스팔라'(Viola da spala)로 굳어지는 추세라고 해요. 지휘자 · 바이올리시스트 · 비올리스트 시히스발트 카위컨이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고, 바흐 첼로 모음곡 전곡을 이 악기로 연주한 음반도 발표했지요. 카위컨의 제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테라카도 료 또한 이 악기로 바흐 첼로 모음곡 음반을 남겼습니다. 지난 3월 바흐 콜레기움 재팬과 바흐솔리스텐 서울이 통영에서 바흐 마태수난곡을 공연했을 때 악장으로 출연했던 바로 그 사람이지요!
브람스: 발라드 Op. 10 No. 1 & No. 2
발라드는 본디 14~15세기 프랑스 정형시가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말은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뜻으로 쓰이게 됐는데, 쇼팽은 기악곡이면서 그 속에 이야기가 있는 듯한 악곡 형태를 새로 만들어서 그것을 '발라드'라 이름 붙였지요. 쇼팽의 발라드는 한 곡 한 곡이 독립된 악곡 형태이며 변종 소타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브람스 발라드 Op. 10은 좀 더 단순한 형식으로 된 4곡짜리 모음곡입니다. 음악학자 파울 미스(Paul Mies)는 브람스가 처음에 성악곡을 쓰려고 했다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d단조로 된 제1곡은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가 엮은 『노래에 나타난 민중의 소리』(Stimmen der Völker in ihren Liedern) 중 스코틀랜드 발라드 '에드워드'를 읽고 영감을 받아 쓴 곡이라 하지요. 아버지를 죽인 아들 에드워드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내용인데, 브람스는 끔찍한 원작 내용과 달리 비극과 아이러니가 적당히 드러나도록 곡을 썼습니다. A-B-A 꼴 세도막 형식이고, 관점에 따라 단순화된 소나타 형식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제2주제'가 팡파르 풍으로 된 중간 대목에 숨어 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D장조로 된 제2곡은 브람스의 유명한 모토 "자유롭게, 그러나 즐겁게"(Frei, aber Froh)를 딴 F♯-A-F♯ 음형으로 시작합니다. 서정적인 선율과 화음이 마치 자장가처럼 들리는데요, 그러다 갑자기 b단조로 바뀌고 템포가 두 배로 빨라지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이 대목은 반복되는 리듬 패턴과 두터운 화음이 극적인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제1곡 중간 대목과 비슷하지만, 한편으로는 제1곡과 달리 강렬한 비극으로 가득합니다. 마침내 자장가 음형으로 돌아오면 평화로운 분위기로 곡이 끝납니다.
브람스: 소나타 f단조 Op. 120 No. 1
브람스는 만년에 클라리넷 소나타를 두 곡 썼습니다. Op. 120 제1번과 제2번 소나타이지요. 작곡가는 악보를 출판하면서 클라리넷 대신 비올라로도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된 악보를 추가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브람스 후기 음악 양식의 정수가 담긴 걸작으로, 피아노가 '반주'에 그치지 않고 비올라(클라리넷)와 대등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제1번 소나타 f단조는 특히 1악장 짜임새가 제법 복잡합니다. 도입부 피아노 독주부터 그냥 흘려듣지 말아야 해요. 1악장 전체가 알고 보면 이 음형에서 나온 것이거든요. 서늘하고 어두운 비올라 선율로 제시되는 제1주제가 지나면 두 번째 주제가 아늑한 느낌으로 나오고, 곧 이어 역동적인 리듬으로 세 번째 주제가 나옵니다. 소나타 형식을 아는 사람은 여기서 혼란에 빠질 수 있지요.
자세한 얘기를 하려면 이론적인 설명이 조금 필요합니다.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에서는 주제가 두 개뿐이고, 제1 주제가 f단조로 시작했으면 제2주제는 관계장조인 A♭장조여야 합니다. 그래서 D♭장조인 두 번째 주제를 그냥 경과구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세 번째 주제 또한 엉뚱한 c단조이기는 마찬가지예요. D♭장조 주제를 제2주제로 봐야 하는 까닭은, 첫째로 발전부가 이 주제로 시작하며 이때 조성이 바로 A♭장조이고, 둘째로 1악장의 뿌리가 되는 도입부 음형이 f단조와 D♭장소 사이에서 줄타기하면서 '복선'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골치 아픈 얘기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세 가지 주제를 귀로 듣고 파악할 수 있다면 위 단락을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괜찮아요. 2악장과 3악장은 A-B-A 꼴 세도막 형식이고, 4악장은 A-B-A'-C-B'-A'' 꼴 론도 형식입니다. 주제가 어떻게 바뀌면서 발전해 나가는지를 잘 따라가면 됩니다. 무엇보다 선율이 참 아름답지요!
아르보 패르트: 거울 속의 거울
단순하고 귀에 쏙 들어오는 선율과 화음이 반복됩니다. '침묵'이 음악과 함께 하며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거울 두 개를 마주 보게 하면 그 속에 무한히 많은 거울이 비쳐 보이지요. 작곡가는 마치 이런 거울처럼 'A' 음을 중심으로 오가는 음형을 단순한 화음과 함께 되풀이하면서 음악에 '영원'을 담아냈습니다.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은 현대 작곡가이면서 어마어마한 대중적 성공을 거둔 아르보 패르트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영화음악으로도 자주 쓰였는데, 이를테면 영화 '그래비티' 예고편에서 대사건이 일어나기 전 고요한 우주의 모습이 이 음악과 기막히게 어울리지요.
브람스: 소나타 E♭장조 Op. 120 No. 2
이 작품은 앞서 감상하신 f단조 소나타와 함께 브람스가 남긴 마지막 실내악곡입니다. 1악장 제1주제를 느리고 애수 가득한 선율로 시작하는 점이 특이하지요. 이 주제를 이루는 요소들이 정교한 논리로 변형 · 발전하면서 악곡이 이어지는데, 이것은 쇤베르크가 훗날 발전적 변주(developing variation)라 부른 기법으로 브람스 음악 언어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 설명한 '베토벤 딜레마'를 기억하시는 분이 제법 있을 듯합니다. 베토벤이 고전주의 음악 양식을 완성하고 그것을 해체함으로써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혔지만, 그가 남긴 음악 유산이 낭만주의 시대정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고요. E♭장조 소나타 1악장은 '베토벤스러운' 주제가 아닌 느리고 낭만적인 선율로 이 딜레마를 얼마나 탁월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베토벤 딜레마를 형식적인 측면에서 가장 완벽하게 해결한 사람이 브람스라는 데에는 학계에서 이견이 없지요.
1악장의 구조 자체는 비교적 깔끔한 소나타 형식으로 귀로 듣고 따라가는 데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2악장은 겹세도막 형식, 3악장은 변주곡 형식입니다. 그리고 브람스 음악 어법의 핵심이 '발전적 변주'임을 생각할 때,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인 3악장이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브람스가 남긴 더 대단한 변주곡도 여럿 있지만, 이 악장은 그리 길지 않은 곡으로도 브람스 변주 기법의 정수를 훌륭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걸작이라 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