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0일 금요일

드뷔시 피아노 트리오 G장조, 윤이상 피아노 트리오,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E♭장조 D. 929

통영국제음악당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릴 글입니다.


드뷔시: 피아노 트리오 G장조

"말하자면 두 가지 아방가르드가 나란히 형성되고 있었다. 파리 사람들은 밝은 일상의 세계로 옮겨갔다. 빈 사람들은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성스러운 횃불로 무시무시한 심연을 밝혀 나갔다."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는 1900년대 유럽 음악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빈 사람들"은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등을 가리키고, "파리 사람들"은 드뷔시, 사티 등을 가리키지요. 그런데 드뷔시 G장조 트리오는 사실 '파리 아방가르드'의 떡잎 정도만 알아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18살 청년 드뷔시가 독자적인 음악 어법을 확립하기 전인 1880년에 쓴 수작으로, 100여 년이 지난 1982년에 악보가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지요.

이 작품은 낭만주의 시대에 탄생했지만, 짧은 선율 조각을 변형 · 발전시키면서 음악적 '논리'를 구축하는 베토벤-브람스 음악어법과는 조금 다릅니다. 호흡이 긴 선율이 음악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차라리 바로크 시대 프랑스 음악에 후기 낭만주의 화성을 입힌 듯해요. 때로는 주제 하나가 아닌 주제군(thematic group)이 음악을 이끌어 가기도 하는데, 특히 1악장 제1 주제군이 매우 길지요.

1악장은 단순화된 소나타 형식입니다. 발전부라고 할 만한 대목이 '제시부'를 반복하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대신 선율이 물처럼 흐르면서 변화하는 모습이 십여 년 뒤에 본격적으로 나타날 드뷔시 음악 어법을 내다보게 합니다. 2악장은 스케르초로 이 곡에서 가장 드뷔시답게 들리는 악장이고, 3악장은 단일 주제군이 음악을 이끌어가는 가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4악장은 소나타 형식이되 다양한 음악적 재료가 1악장처럼 자유롭게 흘러가는 짜임새입니다.

윤이상: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3중주 (1972/75)

서양음악에서는 음과 음이 모여 이루는 관계가 중요하고, 음을 하나씩 따지면 그냥 고정되어 있지요. 그러나 한국 전통음악에서 음은 살아서 움직입니다. 윤이상은 이 차이를 펜글씨와 붓글씨의 차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윤이상은 음을 고정된 채로 두지 않고 트릴, 장식음, 글리산도 등을 덧붙여 서양음악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작곡 기법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3중주'는 특이하게도 죽은 화음으로 시작합니다. 작곡가는 첫 음에 아예 비브라토를 쓰지 말다가 조금씩 여린 음으로 바뀌고 나면 비브라토를 조금만 쓰라고까지 악보에 지시해 놓았지요. 그 음향이 어찌 들으면 생황 소리와 비슷하다는 점을 빼고 나면, 이 작품의 앞부분은 완전한 서양 12음 음악입니다.

그렇게 죽어 있던 음들이 음악이 흐를수록 조금씩 깨어납니다. 그리고 갑자기 완전히 살아나서는, 튀어 오르고, 뛰어다니고, 날아다니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지요. 그러다가 다시 얌전해진 음들이 마치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짜임새입니다. 윤이상은 스승이었던 작곡가 보리스 블라허의 70세 생일을 기념하고자 이 곡을 쓰다가 절반만 완성했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 블라허 선생이 타계한 뒤에 나머지 반을 완성했다고 하네요.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D. 929

슈베르트가 31살로 요절하기 한 해 앞서 남긴 작품으로, 슈베르트의 '노래하는' 선율이 치밀한 음악적 '논리'와 결합해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독일-오스트리아 음악 전통을 훌륭하게 계승한 걸작입니다.

1악장은 주제가 셋 있는 소나타 형식이지만, 경과구 등을 별개로 쳐서 주제가 여섯 개라고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여섯째 주제 또는 소종결구에 해당하는 주제는 첫 번째 주제에서 온 것이며, 이것이 발전부를 이끌어 나갑니다. 슈베르트는 제시부의 중심에서 벗어난 음 소재로 발전부를 이끌어 가는 수법을 곧잘 썼지요. 베토벤이 남긴 음악적 유산이 낭만주의 시대정신과 맞지 않았던 딜레마를 슈베르트는 이렇게 해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악장은 영화와 방송 등에 자주 쓰여서 친숙하게 느껴지지요. 4개 주제가 있는 겹세도막 형식이지만, 마치 둘째 · 셋째 · 넷째 주제를 '제2 주제군'으로 하는 소나타 형식처럼 주제가 발전하는 짜임새입니다. 3악장은 스케르초와 트리오로 형식입니다. 세 가지 악기가 서로를 흉내 내는 '돌림노래'가 재미있습니다.

4악장은 론도-소나타 형식으로 다양한 재료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두 가지 주제군으로 나누어 생각하면서 따라가면 쉬울 듯해요. 두 번째 주제는 2악장을 연상시키는 음 소재로 되어 있는데, 나중에 진짜 2악장 주제가 나타나기도 하지요. 이것이 첫 번째 주제와 대비되면서 음악이 흥미진진하게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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