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Yuri Bashmet
협연자 : Yuri Bashmet (va)
Schubert, Rosamunde Overture
Hoffmeister, Viola Concerto in D
Takemitsu, Three Film Scores for Strings : "Music of Training and Rest", "Funeral Music", "Waltz"
Schubert, Symphony No. 4 in c, D. 417 "Tragic"
화성법이나 대위법 같은 음악 이론을 다룰 때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말 번역어에 '법'자를 붙여 쓰지만 그것은 법칙이 아니다. 화성 진행 규칙은 성경에 기록된 것도 아니고 전설로 내려오는 것도 아니며 음악가 협회에서 신중한 논의를 거쳐 만들어 못박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름난 작곡가가 쓴 작품들을 음악학자가 두루 살펴보고 공통점을 뽑아 정리한 것일 뿐이다. 이론보다 작품이 먼저라는 말이다. 바흐나 모차르트가 쓴 작품에서도 '규칙'에 어긋나는 곳이 드물지 않게 있으며, 알고 보면 '규칙'을 어긴 곳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피어나곤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규칙에만 매달린다면 낡아빠진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
18세기 만하임 음악 전문가 이성률 박사는 카를 요제프 토에스키(C. J. Toeschi)의 실내악을 다룬 논문을 발표하면서 토에스키 작품에 지긋지긋하게 나오는 이른바 갈랑 종지(cadence galante)는 "귀에 한 번 꽂혀버리면 그 뒤로는 고문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호프마이스터 비올라 협주곡 D 장조를 듣던 나는 갈랑 종지를 비롯한 틀에 박힌 기법들에 진저리를 치며 이성률 박사가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대가 연주자 유리 바시메트의 테크닉이 워낙 뛰어나서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작품이 비올라 연주자들에게 주요 레퍼토리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비올라 작품이 얼마나 궁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20세기에는 좋은 비올라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이왕이면 버르토크, 슈니트케, 또는 구바이둘리나의 비올라 협주곡을 연주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만약 바시메트가 한국 관객 수준을 얕잡아보고 현대음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여긴 것이라면 화낼 일이다. 이날 연주한 <현을 위한 세 개의 영화음악>만해도 그렇다. 다케미쓰는 이름난 현대음악 작곡가이지만 하필 이 작품은 현대음악이라 부르기 민망한 그저 '영화음악'이다. 여보세요, 한국 관객이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연주회도 듣고 하면서 얼마나 현대음악에 단련되어 있는데!
슈베르트의 로자문데 서곡과 교향곡 4번은 호프마이스터, 다케미쓰와 마찬가지로 '지휘자' 바시메트에게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바시메트는 비올라 연주자답게 서울시향의 현악기 소리를 예쁘게 다듬는 솜씨가 남달라서 그윽한 파스텔 빛깔 현 소리를 뽐냈다.
그러나 예쁜 소리만으로는 그다지 훌륭한 연주가 되지 못했다. 주선율만이 너무 두드러져 평면적인 음악이 되었고, 관과 현과 팀파니가 어쩐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교향곡 4번 1악장에서 늘임표(fermata)는 있는지 없는지 표시가 안 났고 '매우 느리게(Adagio molto)'와 '빠르고 활기차게(Allegro vivace)'가 그다지 뚜렷한 차이가 없는 등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했다. 악보에 따로 지시가 없을 때에는 템포가 거의 바뀌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돌아온 토스카니니'같은 확신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건 그냥 나이브(naive)한 거다. 변함없는 템포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적어도 제2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무궁동(Perpetuum Mobile)이 주선율 뒤에 숨어서는 안 되었다.
1악장과 4악장 도돌이표를 따르지 않고 생략해버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요즘 유행하는 역사주의 연주 경향을 따른 것도 아니었다. 슈베르트 음악에서 반복은 그냥 관습에 따르는 단순 반복이 아니라 긴장과 갈등을 되먹여 키우는 과정이며, 특히 후기 작품에서는 음악 칼럼니스트 이정엽의 말을 빌자면 "고독의 자가증식"이다. 역사주의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더라도 슈베르트의 반복 지시는 웬만하면 지키는 것이 좋다고 본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했으니 대가 연주자의 교향곡 해석도 평범하지는 않을 것인데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아마도 지휘 테크닉이 모자란 탓이 아닐까 싶다. 지휘봉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지휘한 것은 모자란 테크닉을 감추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또 박자를 놓친 듯 손으로 동그라미를 자꾸 그려대었던 것은 세모, 네모를 그리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휘자가 시향 단원들과 손짓과 눈빛과 표정으로 대화한다는 느낌이 도무지 와 닿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단순한 템포로도 이따금 박자가 어긋나곤 했다. 교향곡 4번 1악장 서주에서 제1 주제로 넘어갈 때(마디 29) 지휘자가 예비박을 헷갈리기 딱 좋도록 아리송하게 주어서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버벅거리며 '만득이 사운드'를 냈던 것은 그 가운데서도 대형 사고에 가까웠다. 이런 실수는 지휘 전공 학부생도 하지 않는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같은 초일류 악단은 지휘자가 마음에 안 들면 알아서 지시한 것보다 더 아름답게 연주해버리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국내 오케스트라는 그런 수준이 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서 지휘자 능력에 따라 연주 수준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이른바 '말러 교향곡 2번 사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아주는 어떤 오케스트라가 아마추어이지만 이름난 음악학자이자 말러 교향곡 2번 전문 지휘자를 모셔다 말러 교향곡 2번을 연주했다. 결과는 끔찍했다. 연주자들은 마치 시장바닥인 양 꽥꽥거렸고 나중에는 팀파니마저 박자를 놓치고 헤매기도 했다. 작품 해석이 아무리 훌륭해도 지휘 솜씨가 엉터리라면 이렇게 된다.
유리 바시메트는 비올라 연주자로 그동안 쌓아온 어마어마한 이름값을 이용해 손쉽게 지휘자 수업을 받으려는 것은 아닌가. 물론 가진 것을 써먹겠다는데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러나 관객으로 하여금 연주가 아닌 연주자 이름에 박수 치게 만든다면 그것은 관객을 속이는 짓이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진심으로 훌륭한 지휘자가 되고 싶다면 콘서바토리로 가서 차근차근 수업을 받는 게 어떨까. 무엇보다 그 엉성한 지휘 동작부터 좀 고쳤으면 싶다.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