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31일 화요일

2005.05.31.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교향악축제 개막 연주회 (브루크너 7번)

2005 교향악축제 개막 연주회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5월 31일 (화)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 정재동 / 협연: 신수정(Pf), 국립합창단, 부천시립합창단


쇼스타코비치 / 축전 서곡 작품 96
베토벤 / 코랄 판타지 작품 80
브루크너 / 교향곡 제7번 E 장조




"이야~ 오케스트라들이 거국적으로 미친 것이 분명합니다. ^^;"


내가 이번 교향악 축제 프로그램을 모 인터넷 동호회에서 보고 썼던 한 줄 답글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코리안심포니를 비롯한 4개 악단이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프로그램에 넣었고, 그 밖에도 버르토크(B. Bartok)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펜데레츠키 교향곡 5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정교향곡 등 저마다 굵직굵직한 작품을 하나쯤 연주하는 악단이 대부분이다. 이쯤 되면 말러 교향곡 1번 정도는 차라리 진부한 레퍼토리가 아닌가. 부천필이 불러일으킨 말러 신드롬에 자극을 받아서일까. 젊은 관객을 끌어들일 목적이라면 올해의 프로그램은 매우 좋다. 작품을 소화할 만한 기량과 체력(!)을 이들이 갖추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심스럽지만, 레퍼토리의 변화는 그 자체로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한편,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이번 프로그램은 '부천필 효과'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 코심의 행보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차라리 '바그너'다. 부천필의 말러 치클루스가 한창일 당시 해체 위기에 처해 있던 코심에 새로 이사장으로 취임하신 김민 선생님께서는 이들을 바그너교(敎)로 인도하셨고, 이후 코심은 2004년 3월 30일 귀네스 존스 내한 연주회, 2004년 4월 1일 교향악축제 개막 연주회 등에서 바그너를 본격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코심이 이번에 연주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은 이러한 맥락에서 '바그너 연습곡'의 의미가 있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7번 2악장을 작곡하면서 거장의 죽음을 예감했으며, 바그너의 서거 소식을 듣고 나서 코다에 애도의 뜻을 담았다고 한다. 그밖에 작품 곳곳에서 바그너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7번 교향곡은 어떤 면에서는 '바그너'라는 표제를 가진 3번 교향곡보다도 더 바그너적인 작품이다.


이날 연주회장은 좀 낯설었다. 보수공사로 달라진 외양 탓도 있지만, 로비를 채운 사람들의 연령대가 평소보다 너무 높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 연주회장에서 보던 얼굴이 거의 없었다. 평일인데다 개막 연주회라 각계의 인사들이 연주회장을 찾았던 것일까. 그래서인지 연주회장에 들어서면서 탤런트 유인촌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깜짝 놀랐던 것은 매표소에서 전석 매진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뿔싸. 일찌감치 표를 예매하지 않은 게으름을 탓해 봐야 무슨 소용이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축제기간 중의 매표상황을 확인한 다음 즉석에서 제주시향의 연주회 티켓을 샀다. 그리고는 매표소 주위를 서성이던 끝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종이에 큼지막하게 '표 구함'이라고 썼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마침 예매 취소된 표가 몇 장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제야 놀란 가슴을 다스릴 수 있었다.


코심은 이번 연주회에서 크게 성장한 연주력을 보여주었다. 코심의 관악기 주자들이 훌륭하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번 연주회의 진짜 주인공은 현악기 주자들이었다. 지난 <라 보엠> 공연 때에도 현의 정교한 앙상블에 놀랐는데, 이날에는 현의 다이내믹이 매우 좋았고 저음 현과 고음 현이 모두 재빠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1악장 때에만 해도 이들의 체력에 의구심을 가졌지만, 연주자들은 예상을 깨고 곡이 끝날 때까지 힘을 짜내 주었다. 바그너 이후의 낭만주의 관현악곡에서 관악기가 포르티시시모(fff)로 불어 제칠 동안 그 소리를 치고 나오는 강력한 현은 그동안 KBS 향이나 부천필 이외의 국내 악단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작년까지만 해도 현의 음량 부족이 코심의 최대 문제점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대단한 일을 해냈다. 연주가 끝난 뒤에 지휘자께서는 바그너 튜바 주자를 일으켜 세우기 전에 차라리 악장과의 악수를 먼저 하셨어야 했다. 첫 번째 커튼콜 이후에 맨 먼저 관악기 주자들을 차례로 일으켜세우는 관행은 이럴 때에는 무시해도 좋지 않았을까.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현악기 주자에게도 힘든 곡이지만 관악기 주자에게는 더더욱 연주하기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다. 그런 점에서 이날 관악기 주자들은 썩 훌륭했다. 특히 트럼펫과 트롬본이 좋았는데, 트럼펫은 로터리 트럼펫이었다고 한다. 내가 로터리 트럼펫 소리를 실연으로 들은 것은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내한해서 말러 교향곡 5번을 연주했을 때 이후로 아마 두 번째일 것인데, 그때와 마찬가지로 함부로 들뜨지 않는 소리가 듣기에 썩 좋았다. 호른도 초반의 실수를 빼면 전체적으로 잘했다. 바그너 튜바 연주는 좀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자칭 바그네리안의 입장에서는 악기가 악기인지라 반갑기만 했다. 팀파니는 브루크너를 들을 때마다 참으로 위대한 악기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칭찬만 하자니 낯이 간지럽다. 아쉬웠던 부분을 말하자면, 현악기 주자들이 잘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더욱 힘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현이 강력할수록 관악기와 타악기가 궁극의 파워를 낼 수 있다. 그러고도 힘이 남는다면 프레이징에 생동감을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코심에게 유럽 악단의 실력을 바라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루어질지어다, 반지의 권능으로, 성배의 은총으로!


한편, 단원들의 열연과는 별개로 지휘자의 해석에는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더러 있었다. 젊은이가 노 지휘자에게서 느끼는 세대차이일까? 전체적으로 템포가 꽤 느렸는데, 1악장은 너무 느렸다. 그 때문인지 관악기 주자들이 초반에 힘을 아끼는 듯한 인상을 받았고, 1악장이 전체적으로 연주가 산만하다고 느꼈다. 금관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루바토(이를테면 3악장 트리오 부분)도 어색했다. 4악장 제1주제 크레셴도 끄트머리에서 수비토 피아노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가 다시 크레셴도를 쓴 것도 공감하기 힘들었다. 브루크너 크레셴도는 브루크너 다와야 하지 않을까. 4악장 중간에 몹시 긴 게네랄 파우제(General Pause)를 연출한 것도 어색하게 들렸다. 2악장 클라이맥스에서 심벌즈와 트라이앵글이 나오는 것을 보고 연주에 사용한 악보가 노바크 판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하스 판이었단다. 하스 판에는 브루크너의 원래 의도를 따라 그 부분에 타악기를 쓰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날 연주에서는 하스 판에 타악기만 추가한 것일까? 2악장의 타악기 첨가 문제는 논란거리라고 하는데, 사견으로는 심벌즈는 그렇다 쳐도 트라이앵글 첨가는 브루크너 답지 않은 허영인 것 같다.


코심은 브루크너 교향곡 7번으로 바그너 연습을 썩 잘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코심은 브루크너 교향곡 3번, 4번으로 소리를 더욱 다듬은 후 연말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 전곡을 연주할 것이라 한다. 또, <니벨룽의 반지>는 비록 국내 초연의 영광을 게르기예프에게 뺏기게 생겼지만, '짝퉁'이 아닌 오리지널 바그너 가수로 '반지'를 무대에 올릴 날이 머지않아 올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에게는 바이로이트 무대에 선 경험이 있는 한국인 바그너 가수가 네 명이나 있고, 바이로이트에서의 연주 경험이 풍부한 김민 선생님도 계시다.

2005년 6월 1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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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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