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25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 Andreas Delfs
협연 : Sharon Bezaly, flute
Kabalevsky, Colas Breugnon Overture
Khachaturian, Flute Concerto
Sibelius, Symphony No. 2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지휘자 안드레아스 델프스는 디에고 마테우스에 이은 '대타' 지휘자였다. 미코 프랑크가 몸이 아파서 잇따라 연주회를 취소했다는데, 디에고 마테우스가 대신 지휘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법 아쉬웠다. 이날 프로그램에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코 프랑크는 핀란드 사람인데다 지난 2008년 3월에 가슴 뭉클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을 들려준 일도 있어서 기대하고 있었으나, 대타로 나온 델프스는 호놀룰루 심포니 수석 지휘자라니 얄궂다. 오랫동안 밀워키 심포니 음악감독을 맡았다고는 하나 '하와이'라는 이름이 주는 햇볕 뜨거운 느낌이 도드라져서 시벨리우스와는 어딘가 안 맞을 듯하지 않은가!
지휘하는 품도 괄괄하고 서울시향이 내는 소리도 그다지 서늘하지 않았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뜻밖에 느리지 않은 템포에 제법 담백한 해석이었다. 그런데도 핀란드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이 그다지 또렷하게 느껴지지 않은 까닭은 교향곡 7번과는 달리 시벨리우스가 아직 핀란드 본색(?)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교향곡 2번인 까닭이었을까. 글쓴이는 지휘자가 실력을 제대로 내보이지 않고 소리를 건성으로 다듬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만하면 연주가 꽤 훌륭해서 한두 해 앞서 이런 연주를 들었다면 잘했다고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르지만, 서울시향이 그동안 놀랍게 발전한 만큼 이제는 이런 정도로는 만족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지휘자는 1악장 처음에 섬세하게 바뀌는 셈여림 기호를 꼼꼼하게 살리지도 못했고, 저음 현만으로 음형을 이어받는 대목에서 소리가 갑자기 줄어들기도 했다. 뒤이어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첫째 주제를 연주할 때에는 템포를 갑자기 조여서 '꿰맨 자국'을 드러냈다.
둘째 주제에 앞서 4분음 피치카토 음형을 되풀이하는 곳에서는 차츰 빠르고 세게 연주해야 하며, 이때 시벨리우스는 둘째 주제를 알리는 관악기 소리가 첫 박을 쉬던 관성과 부딪히며 속도감을 더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날은 관악기가 한 박자 쉬고 들어가 버렸고, 이것은 말할 나위 없이 지휘자가 일부러 악보 지시를 어긴 탓이다. 1악장을 소나타 형식으로 본다면 재현부에 해당하는 대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악장에서는 절정에 해당하는 곳에서 실수가 있었다. 관악기가 포르티시모―메조포르테―포르티시시모(fff)를 오르내리며 목 놓아 울부짖다가(마디 167) 모두쉼표를 만나 살짝 숨을 돌린 다음 마지막으로 한 차례 더 울부짖는 대목(마디 182)이었다. 이 숨 막히는 마디 182에서 지휘자가 예비박을 제대로 안 준 탓에 연주자들이 멈칫해 버렸고, 선율을 이끌어야 했던 트럼펫 연주자가 실수를 저지른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날 트럼펫 수석 노릇을 했던 연주자는 지난해 12월에도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었던 객원이었는데, 누군가 싶어 물어봤더니 알렉상드르 바티(Alexander Baty) 라디오 프랑스 수석이란다. 이 사람은 한때 서울시향 트럼펫 수석을 맡았던 가레스 플라워스 못지않게 훌륭한 연주자로 어떻게든 시향에 눌러 앉혔으면 싶은 사람이다. 이날 때때로 지휘자 등과 손발이 안 맞아 제 솜씨를 못 내는 듯싶을 때도 있었으나, 4악장에서 들려준 금빛 눈부신 팡파르는 너무나 훌륭했다.
트럼펫 못지않게 멋졌던 악기는 오보에였다. 제임스 버튼 부수석이 3악장 둘째 주제를 비롯한 곳곳에서 멋진 오보에 독주를 들려주었으며, 2악장 절정에 뒤이어 모든 악기가 소리를 차츰 줄이는 가운데 오보에가 홀로 소리를 키우는 마디 218에서는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이 솟아나는 듯했다.
하차투리안 플루트 협주곡은 관악기 및 타악기가 떠들썩한 데다가 본디 바이올린 협주곡이어서, 자칫 독주 악기가 오케스트라 소리에 묻혀 버리기 쉽다. 아닌 게 아니라 이날 때때로 위태로운 곳이 있었으며 1악장 맨 앞에서 더욱 그랬다. 협연을 맡은 샤론 베잘리는 처음에 한 옥타브 높여 연주하다가 마디 15에 이르러 도로 한 옥타브 낮추었고, 바로 이때 오케스트라 소리가 플루트 독주를 거의 덮다시피 했으나 지휘자와 악단이 손발이 안 맞았는지 그다지 재빨리 소리를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샤론 베잘리는 지난 2008년 11월에 모차르트 D 장조 협주곡 K.314를 서울시향과 협연한 일이 있다. 그날은 수많은 표정을 연주에 담아내어 듣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하더니, 이날 하차투리안 플루트 협주곡에서는 무시무시한 테크닉을 뽐냈으며 바이올린이 내는 카랑카랑한 소리가 아닌 맑은 플루트 소리로도 곡에 담긴 팽팽한 긴장감을 그럴싸하게 살려냈다.
바이올린 더블스톱(double stop) 주법이 쓰인 곳을 빠른 음형으로 메우는 등 원곡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1악장 카덴차에서는 처음에 클라리넷과 선율을 주고받는 대목이 멋졌으며, 3악장에서는 플루트와 다른 목관 악기가 어지럽게 얽히는 마디 529에서 마치 숲 속에서 새들이 뾰로롱 뾰로롱 지저귀는 듯했다.
무엇보다 샤론 베잘리는 외모가 돋보였다. 금발에 깜찍한 얼굴이 어찌 보면 영화 《해리 포터》에 나오는 '헤르미온느' 에마 왓슨을 닮았다. 그렇게 보니 플루트는 요술 지팡이 같다. 아니, 요술피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