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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7일 목요일

2007.11.06.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IV - 김호정 / 홍웨이 황, 진민호 /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 / 서울시향

진은숙의 Ars Nova 4
2007년 11월 6일(화) 오후 8시
호암아트홀

지휘자 : François-Xavier Roth
협연자 : 김호정(첼로), 홍웨이 황/진민호(비올라)

Charles Ives(1874-1954), The Unanswered Question (1906)   5'
Giacinto Scelsi (1905-1988), Anagamin for 11 Strings (1965)    7'  
George Benjamin (1891-1945), Viola, Viola for two violas (1997) 12" Korean Premiere
Pierre Boulez (*1926)   Messagesquisse pour violoncelle solo et six violoncelles, sur le nom de Paul Sacher (1976)   8'
Chris Paul Harman       From the Cradle to the Grave for 16 strings   16' Asian Premiere
Uzong Choe (*1968) Love Song, chamber concerto for violoncello and strings(2006) 15'  (commission by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World Premiere)



아이브스는 <대답 없는 질문 The Unanswered Question>을 두고 "존재에 대한 해묵은 질문"이라 했는데, 제목이나 악곡 구성이 마치 20세기 음악사를 내다보는 듯해서 번스타인은 이 곡을 "조성적 갈등에 대한 생생한 묘사"라고도 했다. 조성이 흐릿한 트럼펫과 조성이 없는 플루트 앙상블의 '문답' 그리고 3화음을 쓰면서도 조성음악답지 않게 무심히 관조하는 듯 흘러가는 현 사이의 관계가 조성음악이 생명을 다한 20세기 서양음악이 맞이한 화두와도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지휘자는 플루트 앙상블이 무대 좌우 연주자 대기실 쪽에서 번갈아 또는 동시에 연주하게 하고 객석 2층에 자리한 트럼펫이 '질문'을 할 때마다 위치를 옮기게 하는 등 연극적인 요소를 더하여 '문답'을 더욱 뚜렷이 드러냈다. 또 트럼펫이 마지막에는 객석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마지 청중에게 이런 화두를 던지는 듯했다. 현악기로 어떻게 새 시대에 걸맞은 새 소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자친토 셸시(Giacinto Scelsi, 1905-1988)는 요즘 뒤늦게 인기를 얻는 사람으로 작곡 기법이나 그 바탕에 깔린 동양 사상 등이 윤이상과 거울상처럼 닮았으면서도 또한 정반대다. 셸시는 그가 살았던 로마가 동서양의 경계라고 생각했으며, 인도와 티베트 등을 여행하면서 명상을 배웠다. 이른바 '단음 음악(Single-note Music)'이라 불리는 작곡 기법은 이름처럼 음 하나로 끝나지 않고 트레몰로, 비브라토, 글리산도, 미분음(microtone) 등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그 원리는 윤이상의 중심음(Hauptton) 기법과 마찬가지로 정중동(靜中動)이다. 윤이상이 동아시아 음악의 음향 특징을 서양 악기로 표현하려고 중심음향(Hauptklang) 기법을 고안했다면, 셸시는 음 하나가 가진 배음(harmonics)을 원래 음으로부터 끄집어내 한 음이되 한 음이 아니게 했으니 이것은 윤이상과 닮았으면서도 또 다르다. 1965년 작품인 <아나가민 Anagamin>은 불교 수행 단계를 뜻하는 성문 4과(聲聞四果), 즉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多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가운데 아나함이며, 사바세계의 모든 번뇌를 끊고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래(不來)라고도 한다. 셸시가 그 속뜻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듣기로는 참된 아나함을 얻었다기보다는 깨달음을 눈앞에 두고 벼랑 끝에서 번뇌와 싸우는 듯했다. 그러나 작품 속 아나함은 <대답 없는 질문>처럼 음악 속에서 새 뜻을 찾을 수도 있겠다. 즉, 12음 기법으로 대표되는 주류 작곡 기법이 싫지만 조성음악으로 돌아갈 수도 없던 셸시가 마침내 찾아낸 돌파구를 그만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여 불래(不來)를 이룬 것이다.

조지 벤자민의 <비올라, 비올라>와 불레즈의 <메사줴스키스 Messagesquisse>는 '현 긁는 맛'을 잘 살린 곡이었다. <비올라, 비올라>가 투박하지만 담백한 비올라 음색을 잘 살리는 동시에 마치 도깨비 감투를 쓴 연주자가 옆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연주하는 듯 신기한 음향을 만들어냈다면, <메사줴스키스>는 첼로 일곱 대가 현을 박박 긁어대는 박력이 피부로 직접 느껴질 듯 짜릿했다.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박박 긁는 소리는 역시 첼로가 제맛이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근본적인 저음 한계 탓에 박력이 모자라며, 콘트라베이스는 악기가 너무 커서 굼뜨다. 서울시향의 연주는 썩 훌륭했지만 좀 더 미친 듯이 긁어줬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살짝 들기도 했다.

크리스 폴 하먼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우타>와 마찬가지로 만화 같은 과장과 풍자가 생생히 살아있는 작품이었는데, '하먼식 조각내기'에 웬만큼 익숙해져서인지 이제는 보통 변주곡을 듣는 듯한 느낌도 살짝 들었다. '조각 맞추기'를 하다가 엉뚱한 선율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여전했으며, 이를테면 오르간 음향에 얹은 바로크풍 선율은 제목을 의식한 탓인지 생일 축가를 떠올리게 했다.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것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음 덩어리(cluster)가 <전람회의 그림>의 '프롬나드'처럼 계속 변형되며 나타나는 것도 인상 깊었다.

최우정의 첼로 협주곡 <러브 송 Love Song>은 서울시향이 위촉하여 이번이 세계초연이라 더욱 뜻깊다. 그런데 '사랑 노래'라니 첼로 협주곡이라기에는 너무 통속적이고, 대중음악에 쓰기에도 낡아빠진 제목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흔한 사랑 노래와는 달리 그다지 달콤하거나 신파조이거나 하지 않았고, 대중음악에 어울리는 선율과 리듬이 이리저리 비틀려 있어서 남의 연애담 듣듯이 편하게 들을 수만은 없는 곡이었다. 중간에 박진감 넘치는 대목은 영화 <졸업>에서처럼 결혼식장에 쳐들어가 신부 납치라도 하는 듯했고, 또 어찌 들으면 싫다고 구박하는데도 열심히 쫓아다니는 바보스러운 사랑 같기도 했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우리 부모님들이다. 마침 이 곡 악보 첫머리에는 작은 글씨로 "à mon père"라고 쓰여 있다. 프랑스어로 '아버지께'라는 뜻이다. 작품 끝머리에 불안한 음형이 되풀이되다가 매우 여린(pppp) 16분음 스타카토 세 번으로 마치 시계가 멈춘 듯 끝나버린 것이 너무나 애틋해 나는 오랜만에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6일 수요일

2007.11.02.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III - 리처드 용재 오닐 /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 / 서울시향

진은숙의 Ars Nova 3
2007년 11월 2일(금) 오후 7시 30분
KBS 홀

지휘자 : François-Xavier Roth
협연자 : Richard Yongjae O'Neil (Viola)

Väinö Raitio: Moonlight on Jupiter op. 24 (12')
Brett Dean: Viola Concerto (27')
Chris Paul Harman: Uta for viola and orchestra (19'30")
Alexander Scriabin: Le poème de l'extase op.54 (22')



비올라는 참 애매한 악기다. 음색이 투박해서 독주 악기로도 주목받지 못했고, 앙상블에서도 흔히 내성부, 즉 화음의 뉘앙스에 작은 변화를 주는 역할이 고작이다. 그러나 애매함은 곧 유연함이기도 하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지닌 특징을 알맞게 나누어 가졌으면서 투박하지만 담백한 음색을 낼 수 있으니 새로운 소리를 원하는 20세기 작곡가들이 좋아할 만했다. 조성이 무너진 시대라 화음에 억눌리지 않아도 되니 더욱 좋았다. 비올라 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이런 새 시대가 만든 스타다. 브레트 딘(Brett Dean)의 비올라 협주곡과 크리스 폴 하먼(Chris Paul Harman)의 <우타>를 협연한 그가 들려준 소리는 그야말로 천 가지 색깔을 지닌 비올라였다.

브레트 딘의 비올라 협주곡은 용재 오닐이 솜씨를 뽐내기에 더없이 훌륭한 작품이었다. 하모닉스 글리산도가 어지럽게 얽히는 부분은 아찔했으며, '딴따다 딴따다 다다다다' 하는 폴카(?) 리듬 모티프에서는 묘한 중독성을 느꼈다. 또 느린 부분에서는 한겨울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햇빛이 부서지는 느낌과 비슷해서 작년 10월 연주회 때 소개된 조지 벤자민의 <겨울 마음> 생각도 잠시 들었다. 현악기가 잘근잘근 하는 소리를 약음기를 낀 금관이 흉내 내듯 하는 것과 타악기가 그에 맞추어 떠들썩하지만 싸늘하게 두드려대는 것 등은 역시 작년 10월에 소개된 <전원 교향곡>과 비슷했는데, 문득 브레트 딘의 관현악 어법이 비올라를 닮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작곡가가 비올라 주자 출신이기 때문일까.

하먼의 <우타>는 '노래'라는 뜻으로 일본어 'うた'에서 제목을 따왔고 일본 동요집에서 재료를 따와서 조각내고 비틀어 새로 짜맞췄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조각조각 흩어진 느낌이 마치 만화를 보는 듯했다. 음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조각 맞추기'를 하다 보니 원래 재료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엉뚱한 선율로 튀는 느낌도 재미있었다. 이를테면 '학교 종이 땡땡땡'이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를 닮은 선율이 중간에 슬쩍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했다. 남이 쓴 음악을 잘라내고 흩트려 새로 짠다는 아이디어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 짤막한 이야기를 지어내 봤는데, 어쩌면 이것이 하먼의 작품세계에 대한 가장 진지한(?) 감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옛날에 오덕이라는 젊은이가 살았다. 하루는 장사꾼이 그를 반겨 말하기를,

여보게 덕, 당나라 악사 아루농굴이 온다네.
뭣이?
차에코풀었스키의 《쌍피 여왕》을 한다네.
오 벗이여 얼마면 돼?
마흔닷 냥이라네.

오덕이 신용카드를 내미는 순간 웬 여인이 오덕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외치기를,

훠이 지름귀신 물렀거라!
너, 누구냐?
이 녀석아 내가 니 애미다. 포스에 빛나는 회초리 맛 좀 보아라.
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살인을 면한다 하지 않습니까.
어허 무슨 소리냐, 옛말에 개처럼 날아서 정승처럼 쏜다 했다.
히익! 수위일로께서는 만인이여 서로 껴안으라 하셨습니다. 덥석! 일단 고정하시고...
호호호 유료 허그란다. 일 초에 열 냥.

오덕이 놀라 만세신공을 시전하니 만근거력이 담긴 회초리가 날아들더라.
삑! 체력이 바닥났습니다. 로그아웃합니다.

오덕은 '듣보르잡의 환장 교향곡은 조첨이 본좌'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의식을 잃었다.

써놓고 보니 지난 3월에 소개된 <행렬 풍자극>에 더 잘 어울릴 듯싶다. <우타>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작품은 아니었고 오히려 마지막에 착 가라앉은 일본풍 비올라 선율은 용재 오닐이 연주한 '섬집 아기'를 생각나게 했다.

베이뇌 라이티오(Väinö Eerikki Raitio, 1891-1945)는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작곡가인데, <목성의 달빛 Kuutamo Jupiterissa>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1922년 작품이라는데 도무지 20세기 초 작품 같지 않아 뭔가 속는 기분이었다. 무조음악이 아니면서도 조성음악 관습과는 꽤 동떨어진 소리가 어찌 들으면 20세기 후반 작품처럼 들리기도 했으며, 음악이 꽤 흐른 뒤에야 시대에 어울리는 감성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보다 몇 년 앞서 홀스트가 작곡한 <행성> 중 '목성'이 무척 고루하게 느껴지다니 시대를 너무 앞서간 가엾은 작곡가가 아닌가.

지휘자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François-Xavier Roth)는 다양한 음색으로 현대음악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모더니즘의 무표정함에 빠지지 않고 낭만주의의 '드라마'를 살려내는 균형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스크랴빈의 <법열의 시 Le Poeme de l'extase>에서 특히 그랬다. 이 작품을 연주할 때 그 특징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곳은 Allegro volando(빠르게 날듯이; 마디 39) 부분으로, 느린 앞부분과 템포 차이를 크게 벌리면 작품의 표제적 성격을 살리기에 좋지만 현대적인 느낌이 옅어질 위험이 있기도 하다. 지휘자는 느리기에 더욱 신비로운 앞부분을 아주 살짝 희생시켜 '알레그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템포 차이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자연스럽게 했다. 마디 95 이후 트럼펫에 맞서는 저음 현의 무게중심도 탄탄했고 햇빛이 구름을 뚫듯 강렬히 흩어지는 고음 현도 멋졌다. 금가루 날리는 트럼펫 소리와 끝에 금관이 밀어붙이는 '뒷심'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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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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