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6일 수요일

2007.11.02.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III - 리처드 용재 오닐 /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 / 서울시향

진은숙의 Ars Nova 3
2007년 11월 2일(금) 오후 7시 30분
KBS 홀

지휘자 : François-Xavier Roth
협연자 : Richard Yongjae O'Neil (Viola)

Väinö Raitio: Moonlight on Jupiter op. 24 (12')
Brett Dean: Viola Concerto (27')
Chris Paul Harman: Uta for viola and orchestra (19'30")
Alexander Scriabin: Le poème de l'extase op.54 (22')



비올라는 참 애매한 악기다. 음색이 투박해서 독주 악기로도 주목받지 못했고, 앙상블에서도 흔히 내성부, 즉 화음의 뉘앙스에 작은 변화를 주는 역할이 고작이다. 그러나 애매함은 곧 유연함이기도 하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지닌 특징을 알맞게 나누어 가졌으면서 투박하지만 담백한 음색을 낼 수 있으니 새로운 소리를 원하는 20세기 작곡가들이 좋아할 만했다. 조성이 무너진 시대라 화음에 억눌리지 않아도 되니 더욱 좋았다. 비올라 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이런 새 시대가 만든 스타다. 브레트 딘(Brett Dean)의 비올라 협주곡과 크리스 폴 하먼(Chris Paul Harman)의 <우타>를 협연한 그가 들려준 소리는 그야말로 천 가지 색깔을 지닌 비올라였다.

브레트 딘의 비올라 협주곡은 용재 오닐이 솜씨를 뽐내기에 더없이 훌륭한 작품이었다. 하모닉스 글리산도가 어지럽게 얽히는 부분은 아찔했으며, '딴따다 딴따다 다다다다' 하는 폴카(?) 리듬 모티프에서는 묘한 중독성을 느꼈다. 또 느린 부분에서는 한겨울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햇빛이 부서지는 느낌과 비슷해서 작년 10월 연주회 때 소개된 조지 벤자민의 <겨울 마음> 생각도 잠시 들었다. 현악기가 잘근잘근 하는 소리를 약음기를 낀 금관이 흉내 내듯 하는 것과 타악기가 그에 맞추어 떠들썩하지만 싸늘하게 두드려대는 것 등은 역시 작년 10월에 소개된 <전원 교향곡>과 비슷했는데, 문득 브레트 딘의 관현악 어법이 비올라를 닮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작곡가가 비올라 주자 출신이기 때문일까.

하먼의 <우타>는 '노래'라는 뜻으로 일본어 'うた'에서 제목을 따왔고 일본 동요집에서 재료를 따와서 조각내고 비틀어 새로 짜맞췄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조각조각 흩어진 느낌이 마치 만화를 보는 듯했다. 음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조각 맞추기'를 하다 보니 원래 재료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엉뚱한 선율로 튀는 느낌도 재미있었다. 이를테면 '학교 종이 땡땡땡'이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를 닮은 선율이 중간에 슬쩍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했다. 남이 쓴 음악을 잘라내고 흩트려 새로 짠다는 아이디어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 짤막한 이야기를 지어내 봤는데, 어쩌면 이것이 하먼의 작품세계에 대한 가장 진지한(?) 감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옛날에 오덕이라는 젊은이가 살았다. 하루는 장사꾼이 그를 반겨 말하기를,

여보게 덕, 당나라 악사 아루농굴이 온다네.
뭣이?
차에코풀었스키의 《쌍피 여왕》을 한다네.
오 벗이여 얼마면 돼?
마흔닷 냥이라네.

오덕이 신용카드를 내미는 순간 웬 여인이 오덕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외치기를,

훠이 지름귀신 물렀거라!
너, 누구냐?
이 녀석아 내가 니 애미다. 포스에 빛나는 회초리 맛 좀 보아라.
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살인을 면한다 하지 않습니까.
어허 무슨 소리냐, 옛말에 개처럼 날아서 정승처럼 쏜다 했다.
히익! 수위일로께서는 만인이여 서로 껴안으라 하셨습니다. 덥석! 일단 고정하시고...
호호호 유료 허그란다. 일 초에 열 냥.

오덕이 놀라 만세신공을 시전하니 만근거력이 담긴 회초리가 날아들더라.
삑! 체력이 바닥났습니다. 로그아웃합니다.

오덕은 '듣보르잡의 환장 교향곡은 조첨이 본좌'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의식을 잃었다.

써놓고 보니 지난 3월에 소개된 <행렬 풍자극>에 더 잘 어울릴 듯싶다. <우타>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작품은 아니었고 오히려 마지막에 착 가라앉은 일본풍 비올라 선율은 용재 오닐이 연주한 '섬집 아기'를 생각나게 했다.

베이뇌 라이티오(Väinö Eerikki Raitio, 1891-1945)는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작곡가인데, <목성의 달빛 Kuutamo Jupiterissa>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1922년 작품이라는데 도무지 20세기 초 작품 같지 않아 뭔가 속는 기분이었다. 무조음악이 아니면서도 조성음악 관습과는 꽤 동떨어진 소리가 어찌 들으면 20세기 후반 작품처럼 들리기도 했으며, 음악이 꽤 흐른 뒤에야 시대에 어울리는 감성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보다 몇 년 앞서 홀스트가 작곡한 <행성> 중 '목성'이 무척 고루하게 느껴지다니 시대를 너무 앞서간 가엾은 작곡가가 아닌가.

지휘자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François-Xavier Roth)는 다양한 음색으로 현대음악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모더니즘의 무표정함에 빠지지 않고 낭만주의의 '드라마'를 살려내는 균형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스크랴빈의 <법열의 시 Le Poeme de l'extase>에서 특히 그랬다. 이 작품을 연주할 때 그 특징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곳은 Allegro volando(빠르게 날듯이; 마디 39) 부분으로, 느린 앞부분과 템포 차이를 크게 벌리면 작품의 표제적 성격을 살리기에 좋지만 현대적인 느낌이 옅어질 위험이 있기도 하다. 지휘자는 느리기에 더욱 신비로운 앞부분을 아주 살짝 희생시켜 '알레그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템포 차이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자연스럽게 했다. 마디 95 이후 트럼펫에 맞서는 저음 현의 무게중심도 탄탄했고 햇빛이 구름을 뚫듯 강렬히 흩어지는 고음 현도 멋졌다. 금가루 날리는 트럼펫 소리와 끝에 금관이 밀어붙이는 '뒷심'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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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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