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구석구석에서 오페라적인 클리셰를 잔뜩 찾아내어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해석이 참신하고, 흥미진진하고, 특히 1악장이 충격적이었음. 클리셰를 경험적으로든 본능적으로든 이해하고 내러티브를 따라갈 수 있느냐, 아니면 이 곡을 그냥 순음악으로만 이해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듯.
* 구자범 선생은 공연을 앞두고 이 작품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글로 남긴 일이 있음:
https://koojahbom.tistory.com/23
* 링크한 글에 따르면 1악장과 2악장을 합쳐서 오페라 1막, 3악장과 4악장을 합쳐서 오페라 2막에 해당하며 4악장은 오라토리오 형식.
* 내가 연주를 감상하면서 청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러티브는 좀 달랐음. 그냥 4막짜리 오페라 같은 구성에 4막은 오페라로 시작했다가 오라토리오로 승화하는 짜임새. 악장과 악장 사이를 꽤 오래 쉬어 갔는데, 특히 1악장과 2악장 사이, 3악장과 4악장 사이를 좀 더 길게 쉬었음.
* 1악장 제시부는 (구자범의 해석이 들어간) 청각적 텍스처에서 오페라 서곡 느낌이 났음.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서곡보다 전주곡에 가깝기도. 발전부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느낌이었고, 재현부 시작 부분에서 갈등이 정점을 찍고 이후에는 등장인물들이 악전고투를 겪으며 1막 끝으로 나아가는 느낌. 재현부 시작 부분이 오페라적 맥락에서 특히 멋있었고, 코다도 만만치 않게 멋있었지만 기술적인 아쉬움이 좀 있었음.
* 2악장은 연주의 기술적 문제와 연주 공간의 음향적 문제가 겹쳐서 연주의 디테일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고 좀 손해를 본 듯한 아쉬움이 있었고, 오페라적 클리셰나 내러티브 없이 그냥 순음악으로, 인템포 위주로 연주해도 충분히 절박한 느낌이 잘 살아날텐데 싶어서 안타깝기도 했음. 다만, 충격적인 1악장을 들었으면 2악장이 이런 해석이라야 내적 일관성이 생긴다는 건 잘 알겠음. 폭력에 저항이 나타나지만 지리멸렬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진압되는 듯한 느낌.
* 3악장은 클라리넷 솔로부터 제2 바이올린이 주선율을 이어받는 대목까지가(연주가 삐걱거리기 시작하기 전까지가) 특히 멋있었음. 또 멋있었던 곳은 금관이 다이내믹스의 정점을 찍은 직후(정확히는 마디 133부터) 오케스트라 전체가 두터운 화음을 만들면서 포근한 느낌을 만들어 갔던 순간. 정명훈 선생은 이 대목에서 비올라를 강조해서 '피아니시모'를 오히려 '포르티시모'로 만드는 게 참신했는데, 구자범 선생은 그냥 화음만으로 다른 맥락에서 멋짐 작렬.
* 4악장에서는, 2악장에서도 느꼈지만, 대충 카라얀 시대 또는 그 이전 시대에 유행했던 금관악기 가필을 사용했음. 이런 건 요즘 지휘자들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 추세인데, '오페라'라는 새로운 맥락이 생긴 걸 고려하면 이게 또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 합창 주제에 의한 관현악 빌드업은 2악장과 비슷한 맥락에서 좀 손해를 보는 느낌이 있었고, 해석의 일관성 측면에서 마찬가지로 이해가 되기도. 바순 솔로가 특히 중간부터 관현악에 묻혀서 잘 안 들리게 처리한 게 특이하면서도 이걸 오페라적인 클리셰로 이해하면 충분히 그럴싸했음.
* 테너 솔로 직후의 관현악은 생각보다 전투적이지 않았고, 이어지는 'Freude' 합창은 템포가 좀 늘어지는 느낌이어서 갸우뚱했다가, 이게 결국 오페라에서 오라토리오로, 현실에서 초현실로 나아가기 위한 빌드업이라는 생각을 뒤늦게 했음. 이 대목에서 오페라적 효과를 좀 더 살리고 "Seid umschlungen, Millionen"부터 깔끔하게 오라토리오로 넘어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이렇게 하면 급작스러운 전환에서 오는 이질감을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문제가 있음.
* 국내 합창단은 'Freude' 합창의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대목에서 남성 합창단 소리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오는 괴상한 '전통'(?) 내지는 종특(...)이 있는데, 음악적으로 어색하고 가사 내용과도 맞지 않아서 웃긴다고 생각함. 이날 공연에서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었음. 오오 구마에 믿고 있었다고!
* 이중푸가까지 끝난 뒤에는 오라토리오적/초현실적 잔향이 남은 상태에서 오페라/현실로 돌아와서, 이제는 알 수 있는 지향점을 향해 다함께 나아가는 듯한 느낌. 멋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곳곳에서 기술적인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 오페라적인 클리셰가 커튼콜까지 이어짐.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합창단의 부분 부분을 차례로 일으켜 세운 것이나, 그 이후 솔리스트들과 지휘자가 손에 손을 잡고 인사한 것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