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오페라에는 어떤 불멸의 음악이, 무한함이 담겨 있다. 그대로 반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악보를 다 외울 정도로 수없이 반복해 들었고. […] 바그너를 들으러 가기 며칠 전부터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한다. 긴 시간 동안 집중하면서 바그너의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청중도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 한다."
– 피아니스트 프랑수아-프레데리크 기(François-Frédéric Guy) / 김나희, 「예술이라는 은하에서」 중에서
– 피아니스트 프랑수아-프레데리크 기(François-Frédéric Guy) / 김나희, 「예술이라는 은하에서」 중에서
…헐, 이 양반 바그네리안이었어…
"베를린에 있는 윤이상 선생 묘소를 고향 통영으로 이장한다는 계획이 속도를 내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어제 기사가 나오는 걸 보고 조심스러워서, 오늘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공유합니다.
"2018년 통영국제음악제 주제가 '귀향'이다. 선생이 통영으로 귀향하고 귀향을 주제로 국제음악제가 열리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독일 정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지휘자 라하브 샤니,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된다… 주빈 메타 후임으로 현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큐레이터이자 드라마터그가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호프 연주 영상을 짜깁기해서 19금 장난질 영상 제작 → 다니엘 호프, "당장 영상 안 내리면 고소" → 콘체르트하우스, "님 해고" → 독일 클덕 블로거, "다니엘 호프 너 때문이잖아!" → 다니엘 호프, "나님은 피해자였고 영상 제작자가 개인적으로 사과도 했는데 왜 날 갖고 그러냐능." http://slippedisc.com/…/daniel-hope-is-caught-in-berlin-sh…/
가십 뉴스: 지휘자 에사페카 살로넨이 이혼소송을 당했다네요.
와세다 대학교 학생 오케스트라가 무려 사이먼 래틀을 불러다 공개 리허설한 영상이라네요. 그런데 연주력이 대단합니다. 래틀이 슈트레제만과 오버랩. 치아키 사마 어디 있나요 덜덜덜;
조지 셸 시절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유진 오먼디 시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악장을 지냈던 안셀 브루실로우 타계, 향년 89세
윤이상 선생이 1952년경에 작곡한 관현악곡 ‹낙동강의 시(詩)›가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세계초연될 예정입니다. 자필 악보를 보면, 표지에 이어 나오는 목차에 악장 구성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 프롤로그
2. 黃昏(황혼)이 물들 때
3. 嘉俳節(가배절; 한가위)
4. 갈대밭
5. 豐年歌(풍년가)
6. 에필로그
2. 黃昏(황혼)이 물들 때
3. 嘉俳節(가배절; 한가위)
4. 갈대밭
5. 豐年歌(풍년가)
6. 에필로그
그런데 전문가가 사보 프로그램으로 옮긴 파일을 보니 악장 구성이 이상했습니다. 깜짝 놀라서 자필악보와 비교해 봤더니, 윤이상 선생이 실제로는 목차와 다르게 3악장 구성으로 작곡하셨더라고요. 작곡 도중에 생각이 바뀌신 듯해요.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洛東江(낙동강)의 저녁
3악장 舞曲(춤곡)
2악장 洛東江(낙동강)의 저녁
3악장 舞曲(춤곡)
한산신문에는 6악장 구성으로 소개한 칼럼이 이미 실렸고… 나님은 목차에 낚였을 뿐이고… 에헤라디야…
"보편적인 '모범'(Exemplum)이라 할 수 있는 이 역사적 사건을 넘어, 이 작품이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이자 온 세상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의 촉구가 되기를 바란다." (윤이상, 광주여 영원히)
"Über dieses historische Ereignis hinaus, das als ein »Exemplum«, als allgemeingültiges Beispiel verstanden werden kann, will das Werk ein Denkmal der Trauer um die Opfer und eine Mahnung zum Kampf um die Freiheit in aller Welt sein." (Isang Yun, Exemplum in memoriam Kwangju)
어설픈 독일어 실력으로 번역해 봤습니다만...
재불 작곡가 조현화의 글입니다. 아르스노바에서 작품을 선보인 작곡가로서, 진은숙 작곡가의 사임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보내온 글을 공유합니다.
긴 글이지만 아르스노바의 위촉을 받은 젊은 작곡가로서의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연 4회 공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후배 작곡가 양성과 예술 생태계 조성에 기여한 아르스노바의 교육적,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진솔한 목소리입니다.
널리 읽힐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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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이지만 아르스노바의 위촉을 받은 젊은 작곡가로서의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연 4회 공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후배 작곡가 양성과 예술 생태계 조성에 기여한 아르스노바의 교육적,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진솔한 목소리입니다.
널리 읽힐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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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조현화 입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아르스노바와 관련한 작곡가 진은숙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망설이다가 이렇게 글을 씁니다. 아르스노바에서 젊은 작곡가로 선정되어 위촉을 받아 작품을 발표했던 수혜자의 한 사람으로서, 아르스노바라는 플랫폼 덕에 많은 기회를 누렸던 한 사람으로서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90년대 학번인 저 말고도 이후의 후배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지기를, 더 나은 환경에서 곡을 쓰고 창작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정말 바랐기 때문에 아르스노바를 떠나신 진은숙 선생님 소식에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
간단히 제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선화예술학교와 선화예고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이어서 서울대 작곡과에 95학번으로 입학해 강석희 선생님의 클래스에 속해 있었습니다. 제가 작곡가 진은숙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7년이었습니다. 당시 저희들에게 이미 진은숙이라는 이름은 매우 대단한 선배였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 등으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니었지만, 90년대초중반 부터 유럽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며, 그 활약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들 진은숙처럼 되기를 꿈꿨습니다. 어느날인가 진선생님이 한국을 찾았을 때, 강석희 선생님 클래스의 제자모임을 통해 실제로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저희는 모두 한자리에 모였고, 이름만 전해 듣던 선배인 진선생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인터넷이 흔하지 않아 해외의 신작을 듣거나, 아주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품이 아니라면 20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듣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실제 독일에서의 유학생활과 해외에서 작곡가로서 활동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정말 흔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강석희 선생님의 교수실에는 항상 갓 완성된 진선생님의 신작 악보가 있었습니다. 진은숙 선생님이 작품을 끝내면 바로 강선생님께 보내드렸던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저는 선배들, 교수님들을 통해 소문으로만 듣던 선배인 진은숙 선생님을 직접 만나 작곡가로 산다는 것이 어떤지,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겨우 대학교 3학년이었지만 슬슬 미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즈음이었으니까요. 부지런히 학과 과정을 따라가고 수업을 듣고 곡을 쓰면서도, 졸업 이후에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작곡가가 된다는 것, 예술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동네 피아노 선생님이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뜨거웠던 분께 레슨을 받았고, 선화예고에서 열심히 피아노를 치던 와중에 연주보다는 나만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본격적으로 작곡으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1997년 대학교 3학년의 저는 작곡과에서 부지런히 생활하면서도, 동시에 여러가지로 생각이 많아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딱 그 시기에, 운좋게 진은숙 선생님을 만나, 직접 독일에서의 유학과 유럽에서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만남만으로도 저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 역시, 진은숙 선생님을 통해 작곡가로서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유럽에서 주목받고 유명 출판사에서 악보가 나오기 시작한 분이 저희같은 어린 후배들의 이야기에도 귀기울여 주는 모습 자체가 저에게는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조현화 입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아르스노바와 관련한 작곡가 진은숙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망설이다가 이렇게 글을 씁니다. 아르스노바에서 젊은 작곡가로 선정되어 위촉을 받아 작품을 발표했던 수혜자의 한 사람으로서, 아르스노바라는 플랫폼 덕에 많은 기회를 누렸던 한 사람으로서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90년대 학번인 저 말고도 이후의 후배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지기를, 더 나은 환경에서 곡을 쓰고 창작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정말 바랐기 때문에 아르스노바를 떠나신 진은숙 선생님 소식에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
간단히 제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선화예술학교와 선화예고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이어서 서울대 작곡과에 95학번으로 입학해 강석희 선생님의 클래스에 속해 있었습니다. 제가 작곡가 진은숙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7년이었습니다. 당시 저희들에게 이미 진은숙이라는 이름은 매우 대단한 선배였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 등으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니었지만, 90년대초중반 부터 유럽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며, 그 활약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들 진은숙처럼 되기를 꿈꿨습니다. 어느날인가 진선생님이 한국을 찾았을 때, 강석희 선생님 클래스의 제자모임을 통해 실제로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저희는 모두 한자리에 모였고, 이름만 전해 듣던 선배인 진선생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인터넷이 흔하지 않아 해외의 신작을 듣거나, 아주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품이 아니라면 20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듣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실제 독일에서의 유학생활과 해외에서 작곡가로서 활동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정말 흔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강석희 선생님의 교수실에는 항상 갓 완성된 진선생님의 신작 악보가 있었습니다. 진은숙 선생님이 작품을 끝내면 바로 강선생님께 보내드렸던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저는 선배들, 교수님들을 통해 소문으로만 듣던 선배인 진은숙 선생님을 직접 만나 작곡가로 산다는 것이 어떤지,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겨우 대학교 3학년이었지만 슬슬 미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즈음이었으니까요. 부지런히 학과 과정을 따라가고 수업을 듣고 곡을 쓰면서도, 졸업 이후에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작곡가가 된다는 것, 예술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동네 피아노 선생님이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뜨거웠던 분께 레슨을 받았고, 선화예고에서 열심히 피아노를 치던 와중에 연주보다는 나만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본격적으로 작곡으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1997년 대학교 3학년의 저는 작곡과에서 부지런히 생활하면서도, 동시에 여러가지로 생각이 많아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딱 그 시기에, 운좋게 진은숙 선생님을 만나, 직접 독일에서의 유학과 유럽에서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만남만으로도 저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 역시, 진은숙 선생님을 통해 작곡가로서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유럽에서 주목받고 유명 출판사에서 악보가 나오기 시작한 분이 저희같은 어린 후배들의 이야기에도 귀기울여 주는 모습 자체가 저에게는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자기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기에 바빠 곡을 쓰는 것만으로도, 자기 앞가림만으로도 정신이 없습니다. 작곡가가 그만한 인간적 도량을 갖춘다는 것이 굉장히 드문 자질입니다. 당시에 저는 작곡가 진은숙을 인간적으로 잘 알지는 못했지만 강석희 선생님을 통해, 그리고 늘상 발표되었던 작품들을 통해 그 음악세계를 쭉 따라갔습니다.
제가 인간적인 면모를 더욱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인, 2011년이었습니다.
저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을 왔고, 파리국립고등음악원 CNSM에서 학업을 마치고 IRCAM 전자음악연구소에서도 2년차 과정을 마무리하고, 피아노 반주와 오르간 전공으로도 디플롬을 받으며 바쁘게 시간을 보냈고, 각종 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도 활동하면서 꾸준히 음악을 업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아캉트에서 열리는 아카데미에 진은숙 선생님이 오신다는 걸 알게 되었고, 저는 그곳에 서류를 보내 학생 자격으로 갔습니다. 진은숙 선생님은 작품을 봐주시고 조언해 주시는 것 뿐 아니라, 저 뿐 아니라 배고프고 가난한 후배 작곡가들에게 선뜻 맛잇는 음식을 사주며 격려해주고, 생활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귀기울여 주기도 했습니다.
1997년, 대학교 3학년 시절과는 달리 유학와서 이국땅에서 가정을 이루고 여러 역할에 정신없이, 생활에 치이고 있는 저에게, 이미 인생에서 비슷한 순간을 먼저 살아낸 선배로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이제서야 고백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고민은 물론, 음악적으로도 더 깊고 진지하게, 치열하고 처절하게 음악과 마주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진은숙 선생님은 이미 작품으로 그 자신의 말과 창작활동이 완벽히 일치하는 삶을 살아보이고 있는 작곡가였기에 그 작품 세계와 추구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곡가로서 흐트러지고 흔들리고는 했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저 뿐만 아니라 당시 아캉트에 왔던 다른 작곡가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심지어 이런 배려는 국적을 초월해, 일본, 중국 출신의 젊은 작곡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렇게 진은숙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당시 제 음악적 아이디어를 흥미롭게 생각해주신 선생님은 저와 연락을 해주셨고, 작품을 보고 조언해 주시는 것은 물론, 작품 위촉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유서깊은 유명 현대음악 페스티벌인 클랑슈푸렌 페스티벌에서 무려 6명의 젊은 한국 작곡가들이 초대되고, 팀프 앙상블이 연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상주 작곡가로 초대된 진은숙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바로 근처인 프랑스에 오래 거주해왔지만 독일어권과는 문화적 언어적 장벽이 있는 터라, 그닥 연이 닿지 않았던 제가, 숨죽인 채 뜨겁게 집중하는 클랑슈푸렌의 현대음악 마니아 청중들 앞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페스티벌 측에서 위촉 의뢰를 해왔을 때, 본인의 작품이 밀려 있어서 수락할 수 없었고 그 기회를 한국 출신 후배 작곡가들에게 나눠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참 찾아보기 드문 경우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작곡가들 역시 자기 자신의 커리어를 빛내는 데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름있는 작곡가들 역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취하기 쉽고 혼자만 그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하려는 야심에 차 있는데, 진은숙 선생님은 전혀 그렇지 않은 분입니다. 그 분에게는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음악이며, 오로지 진정한 작품을 쓰고자 하고, 예술에 헌신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작곡가들만을 찾고, 그들을 도와주고 기회를 주려고 하는 분입니다. 기회를 주었으나 아니다 싶거나, 세상에 꺼내놓는 음악의 수준이 함량 미달일 때에는 가차없이 혹독한 비판을 해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매우 따뜻한 분이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들에게는 사비를 털어 위촉료를 챙겨주시거나 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나 작은 일자리를 수소문해 주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분이지만, 서울시향의 아르스노바와 관련되어서라면, 공적인 역할에 철저히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완벽히 컨트롤하고 사적인 인연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철저히 공정하게 일을 진행하는 분입니다. 아주 여러명의 후배 작곡가들을 도와주셨지만 그 기회는 모두 공정하게 주어졌으며, 누구 하나에게 치우친 적이 없었습니다.
평가의 기준은 오로지 작품과 음악의 수준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친분과 사사로운 감정을 결코 공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음악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삶을 대하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작곡가로서 꾸준히 곡을 발표하고 각종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지만, 사실 이에 대한 진지한 피드백과 평을 받는 것은 무척 드물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악보를 그리는 대신 곡을 쓸 수 있으며, 프로그램으로 곡을 대략 들어볼 수 있지만 실제 악단이 내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근사한 레스토랑의 요리를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맛보는 것만큼 차원이 다른 경험입니다. 아르스노바를 통해, 서울시향 단원들의 연주를 통해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지휘자들의 지휘로 악보 리허설에서 “소리”를 들어볼 수 있는 것은 정말 귀한 기회였으며 유럽에서도 흔히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저는 아르스노바를 거쳐간 젊은 작곡가들 중에 아마도 가장 고학번일 것이고, 유럽에도 일찍 유학을 왔습니다. 그간 프랑스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과정들을 피나는 노력으로, 외국인으로서 불리한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어 매년 살벌한 경쟁을 통과해 졸업했지만, 학교와 다양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에도 작곡가로서 곡을 쓸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 드물었습니다.
곡을 쓴다고 한들, 한국에서 그에 걸맞는 위촉료를 받는 것 역시, 지원금 없이는 무척 드물고 힘든 일이라 작곡가가 직접 나서서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곡을 쓰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지원금을 먼저 알아보고 다니고 프로젝트를 기획, 구상해야 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모짜르트 뿐만 아니라 다수의 거장들이 평생을 곡을 쓰면서 생활고에 시달렸고, 필립 글래스도 뉴욕에서 택시 운전사를 겸했을 만큼 전업 작곡가로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제가 그런 거장들의 발끝에도 못미치는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저 역시 제대로 된 위촉보다는 “곡을 발표할 기회가 되는데 위촉료는 없지만 곡을 써주면 안 되겠느냐” 라는 부탁을 자주 받았습니다. 정중하고도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그건 동시에, 모두가 열악하고 어렵고 예산이 없는데도 무리해서 무대를 기획하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창작자에게 돌아가야 할 비용은 우선순위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촉료를 받지 않더라도, 작품 발표와 연주의 기회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작곡계에서는 얼마쯤 당연한 것으로 관행이 되어 있었습니다. 위촉료 뿐 아니라 당장 연주자를 모셔오는 것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질 좋은 현대음악을 실연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무척 드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누가 “돈 내고 티켓 사서 현대음악을 들으러 와?” 하는 것이 가차없는 현실이었고, 연주의 질이 떨어지는 만큼 청중들의 반응을 기대할 수 없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현대음악 연주회라고 하면, ‘연주하고 무대에 올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뿐, 높은 수준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습니다. 그만큼 열악한 현실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에만 익숙해져 있던 상황에서 <아르스노바>의 출현은 놀라운 변화였고, 그 자체로 큰 혁신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창작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제가 작곡가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을 때, 제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다고 느낍니다. 한 음, 한 음을 쓸 때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 했던 그 순간들이 무의미하지 않고 이렇게 진짜로 “댓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 마저 느낄 수 있었고 성의있는 연주를 통해 제 음악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파리의 시떼 드라 뮈지크에서처럼, 서울에 진지한 청중들이 생겨나 새로운 음악을 듣고자 하는 변화가 생겨난 것도 정말 고무적이었습니다.
진은숙 선생님께서는 저희에게 위촉을 의뢰하면서도, 처음에는 규모가 작은 곡을 통해 먼저 가능성을 보고, 그 이후에 규모가 있는 관현악 곡 위촉을 맡겨, 서울시에서 오는 서울시향의 예산이 위촉료로 사용될 때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합리적인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도 그에 걸맞게 최선을 다해 곡에 집중하고 음악적인 결실을 보여주기를 요구했습니다. 이제 아르스노바라는 플랫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더 젊은 작곡가들에게 아르스노바에서 제공하던 기회들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젊은 작곡가들은 이미 큰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플랫폼이 가지고 있던 훌륭한 교육적 측면과 후대의 작곡가를 양성하는 기능은, 100% 무료로 마스터 클래스를 운영하며 고마운 마음에 챙겨드리는 작고 소소한 선물조차 마다하는 진은숙이라는 작곡가 한 개인의 헌신과 노력으로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마음 뿐입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은 시간이고, 한 작곡가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큰 그림을 통해 계획을 세우지 않고서는 쉽게 투자할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지난 12년 동안 아낌없는 헌신으로 아르스노바를 이만큼 성장시킨 진은숙 선생님의 노력이 부디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목소리를 내지 말고 침묵하며, 가만히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것이 미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르스노바의 수혜자로서, 아르스노바가 생기기 10년 전부터 진은숙 선생님을 통해 조언을 들었던 서울대 작곡과 후배로서,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인 아르스노바가 어떻게 후배 작곡가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귀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는지 제 경험을 토대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작곡가로서 진은숙 선생님처럼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만큼, 재능도 그 치열함과 철저함도 타고나지 못했지만, 제가 보고 배운 대로, 꾸준히 정진해 세상에 의미있는 음악을 써낼 수 있도록, 제 작품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인간적인 면모를 더욱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인, 2011년이었습니다.
저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을 왔고, 파리국립고등음악원 CNSM에서 학업을 마치고 IRCAM 전자음악연구소에서도 2년차 과정을 마무리하고, 피아노 반주와 오르간 전공으로도 디플롬을 받으며 바쁘게 시간을 보냈고, 각종 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도 활동하면서 꾸준히 음악을 업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아캉트에서 열리는 아카데미에 진은숙 선생님이 오신다는 걸 알게 되었고, 저는 그곳에 서류를 보내 학생 자격으로 갔습니다. 진은숙 선생님은 작품을 봐주시고 조언해 주시는 것 뿐 아니라, 저 뿐 아니라 배고프고 가난한 후배 작곡가들에게 선뜻 맛잇는 음식을 사주며 격려해주고, 생활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귀기울여 주기도 했습니다.
1997년, 대학교 3학년 시절과는 달리 유학와서 이국땅에서 가정을 이루고 여러 역할에 정신없이, 생활에 치이고 있는 저에게, 이미 인생에서 비슷한 순간을 먼저 살아낸 선배로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이제서야 고백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고민은 물론, 음악적으로도 더 깊고 진지하게, 치열하고 처절하게 음악과 마주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진은숙 선생님은 이미 작품으로 그 자신의 말과 창작활동이 완벽히 일치하는 삶을 살아보이고 있는 작곡가였기에 그 작품 세계와 추구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곡가로서 흐트러지고 흔들리고는 했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저 뿐만 아니라 당시 아캉트에 왔던 다른 작곡가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심지어 이런 배려는 국적을 초월해, 일본, 중국 출신의 젊은 작곡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렇게 진은숙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당시 제 음악적 아이디어를 흥미롭게 생각해주신 선생님은 저와 연락을 해주셨고, 작품을 보고 조언해 주시는 것은 물론, 작품 위촉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유서깊은 유명 현대음악 페스티벌인 클랑슈푸렌 페스티벌에서 무려 6명의 젊은 한국 작곡가들이 초대되고, 팀프 앙상블이 연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상주 작곡가로 초대된 진은숙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바로 근처인 프랑스에 오래 거주해왔지만 독일어권과는 문화적 언어적 장벽이 있는 터라, 그닥 연이 닿지 않았던 제가, 숨죽인 채 뜨겁게 집중하는 클랑슈푸렌의 현대음악 마니아 청중들 앞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페스티벌 측에서 위촉 의뢰를 해왔을 때, 본인의 작품이 밀려 있어서 수락할 수 없었고 그 기회를 한국 출신 후배 작곡가들에게 나눠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참 찾아보기 드문 경우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작곡가들 역시 자기 자신의 커리어를 빛내는 데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름있는 작곡가들 역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취하기 쉽고 혼자만 그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하려는 야심에 차 있는데, 진은숙 선생님은 전혀 그렇지 않은 분입니다. 그 분에게는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음악이며, 오로지 진정한 작품을 쓰고자 하고, 예술에 헌신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작곡가들만을 찾고, 그들을 도와주고 기회를 주려고 하는 분입니다. 기회를 주었으나 아니다 싶거나, 세상에 꺼내놓는 음악의 수준이 함량 미달일 때에는 가차없이 혹독한 비판을 해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매우 따뜻한 분이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들에게는 사비를 털어 위촉료를 챙겨주시거나 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나 작은 일자리를 수소문해 주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분이지만, 서울시향의 아르스노바와 관련되어서라면, 공적인 역할에 철저히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완벽히 컨트롤하고 사적인 인연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철저히 공정하게 일을 진행하는 분입니다. 아주 여러명의 후배 작곡가들을 도와주셨지만 그 기회는 모두 공정하게 주어졌으며, 누구 하나에게 치우친 적이 없었습니다.
평가의 기준은 오로지 작품과 음악의 수준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친분과 사사로운 감정을 결코 공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음악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삶을 대하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작곡가로서 꾸준히 곡을 발표하고 각종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지만, 사실 이에 대한 진지한 피드백과 평을 받는 것은 무척 드물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악보를 그리는 대신 곡을 쓸 수 있으며, 프로그램으로 곡을 대략 들어볼 수 있지만 실제 악단이 내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근사한 레스토랑의 요리를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맛보는 것만큼 차원이 다른 경험입니다. 아르스노바를 통해, 서울시향 단원들의 연주를 통해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지휘자들의 지휘로 악보 리허설에서 “소리”를 들어볼 수 있는 것은 정말 귀한 기회였으며 유럽에서도 흔히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저는 아르스노바를 거쳐간 젊은 작곡가들 중에 아마도 가장 고학번일 것이고, 유럽에도 일찍 유학을 왔습니다. 그간 프랑스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과정들을 피나는 노력으로, 외국인으로서 불리한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어 매년 살벌한 경쟁을 통과해 졸업했지만, 학교와 다양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에도 작곡가로서 곡을 쓸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 드물었습니다.
곡을 쓴다고 한들, 한국에서 그에 걸맞는 위촉료를 받는 것 역시, 지원금 없이는 무척 드물고 힘든 일이라 작곡가가 직접 나서서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곡을 쓰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지원금을 먼저 알아보고 다니고 프로젝트를 기획, 구상해야 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모짜르트 뿐만 아니라 다수의 거장들이 평생을 곡을 쓰면서 생활고에 시달렸고, 필립 글래스도 뉴욕에서 택시 운전사를 겸했을 만큼 전업 작곡가로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제가 그런 거장들의 발끝에도 못미치는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저 역시 제대로 된 위촉보다는 “곡을 발표할 기회가 되는데 위촉료는 없지만 곡을 써주면 안 되겠느냐” 라는 부탁을 자주 받았습니다. 정중하고도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그건 동시에, 모두가 열악하고 어렵고 예산이 없는데도 무리해서 무대를 기획하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창작자에게 돌아가야 할 비용은 우선순위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촉료를 받지 않더라도, 작품 발표와 연주의 기회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작곡계에서는 얼마쯤 당연한 것으로 관행이 되어 있었습니다. 위촉료 뿐 아니라 당장 연주자를 모셔오는 것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질 좋은 현대음악을 실연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무척 드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누가 “돈 내고 티켓 사서 현대음악을 들으러 와?” 하는 것이 가차없는 현실이었고, 연주의 질이 떨어지는 만큼 청중들의 반응을 기대할 수 없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현대음악 연주회라고 하면, ‘연주하고 무대에 올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뿐, 높은 수준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습니다. 그만큼 열악한 현실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에만 익숙해져 있던 상황에서 <아르스노바>의 출현은 놀라운 변화였고, 그 자체로 큰 혁신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창작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제가 작곡가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을 때, 제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다고 느낍니다. 한 음, 한 음을 쓸 때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 했던 그 순간들이 무의미하지 않고 이렇게 진짜로 “댓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 마저 느낄 수 있었고 성의있는 연주를 통해 제 음악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파리의 시떼 드라 뮈지크에서처럼, 서울에 진지한 청중들이 생겨나 새로운 음악을 듣고자 하는 변화가 생겨난 것도 정말 고무적이었습니다.
진은숙 선생님께서는 저희에게 위촉을 의뢰하면서도, 처음에는 규모가 작은 곡을 통해 먼저 가능성을 보고, 그 이후에 규모가 있는 관현악 곡 위촉을 맡겨, 서울시에서 오는 서울시향의 예산이 위촉료로 사용될 때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합리적인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도 그에 걸맞게 최선을 다해 곡에 집중하고 음악적인 결실을 보여주기를 요구했습니다. 이제 아르스노바라는 플랫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더 젊은 작곡가들에게 아르스노바에서 제공하던 기회들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젊은 작곡가들은 이미 큰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플랫폼이 가지고 있던 훌륭한 교육적 측면과 후대의 작곡가를 양성하는 기능은, 100% 무료로 마스터 클래스를 운영하며 고마운 마음에 챙겨드리는 작고 소소한 선물조차 마다하는 진은숙이라는 작곡가 한 개인의 헌신과 노력으로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마음 뿐입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은 시간이고, 한 작곡가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큰 그림을 통해 계획을 세우지 않고서는 쉽게 투자할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지난 12년 동안 아낌없는 헌신으로 아르스노바를 이만큼 성장시킨 진은숙 선생님의 노력이 부디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목소리를 내지 말고 침묵하며, 가만히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것이 미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르스노바의 수혜자로서, 아르스노바가 생기기 10년 전부터 진은숙 선생님을 통해 조언을 들었던 서울대 작곡과 후배로서,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인 아르스노바가 어떻게 후배 작곡가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귀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는지 제 경험을 토대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작곡가로서 진은숙 선생님처럼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만큼, 재능도 그 치열함과 철저함도 타고나지 못했지만, 제가 보고 배운 대로, 꾸준히 정진해 세상에 의미있는 음악을 써낼 수 있도록, 제 작품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년 1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작곡가 조현화 올림
음악학자 이희경(Heekyung Lee) 선생님께서 '작곡을 전공한 서른 언저리의 이들은 무엇을 하는가' 공연,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Heterophony, 그리고 지난 연말결산 방송에서 언급하기도 했던 아츠 인큐베이터(Arts Incubator)의 현대음악 플랫폼 ATM과 함께 저희 팟캐스트를 소개해주셨어요!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경쾌함을 잃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 다음 방송도 기대해주세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지휘자 샤를 뒤투아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고발한 여성 가운데 한 명이 사실은 강간을 당한 거였다고 주장
베이스 알렉산드르 필리포비치 베데르니코프 타계, 향년 90세. 지휘자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베데르니코프가 아들.
바이올리니스트 박혜윤, 영국의 대형 기획사 Hazard Chase와 계약
"반달리즘이란 고대 로마의 문명을 파괴한 게르만족 일파 반달족에게서 따온 말로, 문화나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세계 정상급 예술가에게 “장기 집권한다” “돈을 못 벌어 온다”고 타박해 내쫓는 행위를 칭하기 위해 반달리즘만큼 어울리는 말도 없다."
"지식이 없는 자는 독창적일 수 없다. 많은 것을 알고 또 그것에 관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 무엇을 자신의 예술적 중심 충동으로 삼아야 할지를 알고 있다." (작곡가 볼프강 림)
줄리아드 스트링 콰르텟의 창단 멤버였던 바이올리니스트 로버트 만 타계, 향년 97세 http://slippedisc.com/…/america-loses-a-string-quartet-mas…/
2016년에 첼리스트 조엘 크로스닉이 고별 연주했던 기억이 나네요:
조엘 크로스닉의 마지막 사중주
https://wagnerianwk.blogspot.kr/2016/06/blog-post_12.html
조엘 크로스닉의 마지막 사중주
https://wagnerianwk.blogspot.kr/2016/06/blog-post_12.html
윤이상 콩쿠르 우승자들도 있네요. 김홍기 서형민 이정란 송지원.
어찌됐든 오픈을 했다. 오늘.
전세계 콩쿠르의 우승자들 이름과 연주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뉴스.
사실은 우승 뿐 아니라 모든 입상을 아우르고 싶었으나...
...See More
서울시향 떠나는 작곡가 진은숙... “실적 부진” 시의회 압박 탓인가 (한국일보)
예술단체를 평가할 때 수치로 나타나는 실적을 결정적인 잣대로 삼는 관행 자체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기사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링크하는 기사:
지역공공문화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무력함 (한재섭 미술사, 민중의소리)
지역공공문화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무력함 (한재섭 미술사, 민중의소리)
"진심어린 순수한 마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진심과 마주하더라도 그 이면에 숨겨진 흑심과 저의가 있다고 믿으며 무리한 추측을 하기 마련이다."
진은숙 작곡가가 서울시향을 떠난다네요. 시의회의 압박이 있었던 듯하다고. 갑작스럽지만 예견된 일이기도 하지요. 그동안 굴욕을 참고 버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지난해 클래식 음악계 소식을 되돌아보다가 새삼 식겁한 대목:
- 정유라 예중 다닐 때 성악을 포기하도록 설득한 사람이 바로 '구타킹' 김인혜 전 서울대 교수
- 김 교수는 서울대 성악과 폐지 논의까지 갔던 극한 파벌 싸움의 사실상 시발점
- 정유라 예중 다닐 때 성악을 포기하도록 설득한 사람이 바로 '구타킹' 김인혜 전 서울대 교수
- 김 교수는 서울대 성악과 폐지 논의까지 갔던 극한 파벌 싸움의 사실상 시발점
‹2017 올해의 공연›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