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6일 일요일

2009.06.05. 라벨 어릿광대의 새벽노래 / 히그던 타악기 협주곡 / 프랑크 교향곡 d단조 - 콜린 커리 / 성시연 / 서울시향

2009년 6월 5일(금)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성시연
협연자 : Colin Currie (percussion)

Ravel, Alborada del Gracioso
Higdon, Percussion Concerto
Franck, Symphony in d minor, Op. 48



성시연은 이미 여러 차례 서울시향을 객원 지휘했으며, 이번에 마침내 서울시향 부지휘자가 되어 이날 첫선을 보였다. 글쓴이는 지난 2월 19일 연주회 때부터 성시연이 참된 솜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쓴 바 있는데, 이날 라벨 <어릿광대의 새벽 노래>를 듣고 나서 내 생각이 맞았다는 믿음이 생겼다. 연주회 첫 곡을 이만큼 다듬었다면 시향 부지휘자로 모자람이 없다.

히그던 타악기 협주곡은 협주곡답지 않게 타악기와 오케스트라가 나란하지 않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타악기가 음악을 이끌어가는 동안 오케스트라는 '반주' 노릇에 그치며, 그 때문에 협주곡이라기보다는 '타악기를 위한 오페라 아리아'에 가까워 보였다. 더군다나 카덴차에 이르니 이제까지는 카덴차를 맞이하는 전주곡이었을 따름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작곡가가 뒤로 물러난 만큼 협연자를 앞세우고 있으니 콜린 커리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곡이라 하겠다. 콜린 커리는 지난 2007년 5월 24일에 제임스 맥밀런 <베니, 베니, 엠마누엘>을 협연하여 큰 박수를 받았는데, 이날도 현대음악치고는 듣기 어렵지 않고 음 소재가 적당히 신기한 곡으로 객석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프랑크 D 단조 교향곡이 초연된 1889년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과 말러 교향곡 1번이 초연된 해이기도 하며, 두 해 앞서 브루크너는 교향곡 9번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내놓은 지는 스무 해도 넘었다. 20세기 음악이 얼추 이 무렵부터 비롯하였음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은 몹시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프랑크는 브람스만큼 꼼꼼한 논리를 이 곡에 담아내지도 못했다. 차이콥스키처럼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선율도 없다. 그럼에도 프랑크 교향곡이 훌륭한 곡임은 틀림없다. 다만, 곡이 여러모로 무뚝뚝한 만큼 연주마저 어정쩡하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또한 지난 글에서 성시연이 '노력파 모범생'같은 지휘자라 여러 차례 쓴 바 있다. 이 말은 성시연이 잔꾀를 쓰기보다는 정직하게 음악을 풀어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날 프랑크 교향곡이 자칫 너무 맨송맨송할까 걱정했다. 그러나 웬걸, 잔꾀 없이 올곧은 해석만으로도 음악은 너무나 훌륨했다. 지휘자나 악단이나 기초 '내공'이 탄탄하여 소리를 야무지게 다듬어 풀어냈는데다가 연주회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동감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성시연의 정직함이 드러난 곳, 거꾸로 말하면 '꼼수'를 쓰기 좋은 곳을 몇 군데 살펴보자. 1악장 느린 도입부에서는 악보에 없는 아첼레란도를 크레셴도에 얹어서 '베토벤스러운' 도움닫기를 할 수 있으며 푸르트벵글러가 바로 그렇게 했다. 첫째 주제가 나타나는 마디 29에서는 도입부가 사나울수록 마르카토에 가깝게 박박 긁어댈 수 있다. 그러나 성시연은 넉넉하되 사납지 않은 크레셴도와 가파르지 않은 템포로 처음부터 '발작'하지는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보여주었다. 첫째 주제를 연주할 때에는 활놀림을 눈여겨보았더니 내림-내림-올림으로 모나지 않고 부드럽게 연주했다. 트롬본과 트럼펫 및 코넷이 선율을 되풀이해 주고받는 마디 331에서는 울부짖듯이 사납게 연주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떠벌리지 않고 알맞은 파토스를 뿜어냈다.

2악장 첫머리에서는 현 소리를 줄이고 하프를 앞세우면 맑은 하프 음색에 달콤쌉쌀한 감화음이 어우러져 '게르만스러운' 무뚝뚝함을 한결 부드럽게 녹여낼 수 있으며 첼리비다케와 몽퇴가 바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성시연은 하프와 현이 딱 알맞게 어울리도록 했다. 음반을 들어 봐도 이 대목에서 이토록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고른 소리를 내는 연주는 드문 듯한데 어쩌면 음반으로는 살리기 어려운 현장감 때문이었을까.

이 곡은 대위법이 썩 훌륭하다고 말하기 어려워서 부선율이나 장식음 따위를 잘못 살리면 그야말로 얕은꾀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를테면 2악장 마디 49 같은 곳에서 제2 바이올린과 비올라 16분음 음형을 잘 살리면 음악이 더욱 다채로워지기도 하며 몽퇴가 바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성시연은 제1 바이올린 주선율을 뚜렷이 살리고 16분음 음형은 뒤에서 어른어른하게 다스렸다.

딱 한 군데 갸우뚱했던 곳이 있다. 3악장 마디 227에는 늘임표가 있는데, 그 앞서 몇 차례 나오는 늘임표와는 달리 "매우 길게 très long"라는 나타냄말이 더 붙어 있다. 마지막 음을 매우 길게 늘일 수도 있겠고, 숨이 모자란다면 브루크너 음악에 곧잘 나오는 모두쉼표처럼 멈췄다 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시연은 앞서 나오는 다른 늘임표와 그다지 다르지 않게 적당히 늘여주고 넘어갔다.

화장은 한 듯 안 한 듯 티 나지 않게 하기가 어렵다 했던가. 성시연의 올곧은 마음가짐은 나이를 생각하면 매우 알맞으나 또한 피 끓는 나이에는 지키기 어렵기도 하다. 경험을 쌓을수록 융통성이 늘어날 테고, 그럴수록 성시연은 '화장발'에도 마음을 쏟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일구어놓은 바탕을 잊지만 않는다면 그 또한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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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9.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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