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폴 메이어
협연자 : 유진 우고르스키 (바이올린) / 이한나 (오르간)
Chabrier, España
Lalo, Symphonie espagnol
Saint-Saens, Symphony No. 3 in c minor, Op. 78 "Organ"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은 제목과 달리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보통 협주곡과는 달리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주거니 받거니 하기보다는 독주 바이올린이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달린다고 하는 게 더 옳다. 협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쉴 틈도 없이 마구 달려야 하며 절대로 오케스트라에 뒤처지면 안 된다. 협연자는 선봉장이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라!" 그런데 문제가 있다. 빨리 달려야 하는데 음표가 너무 많다. 빠른 음표가 끝도 없이 나온다. 3악장짜리가 아니라 5악장짜리라 갈 길이 먼데 막판으로 갈수록 더 까다롭다. 발 한 번 삐끗하면 꼴사납게 넘어지게 생겼다. 음악에 긴장감을 잔뜩 쌓아 놨다가 크게 터트리는 맛도 없이 그저 얌전히 생글거리다 끝나버리니 고생한 것을 관객이 알아주지도 않는다.
이번 연주회에서 협연을 맡은 유진 우고르스키는 이 까다로운 곡을 큰 실수 없이 차분히 잘 연주했다. 이것만으로도 크게 칭찬해 줄 만하다. 이 작품을 실연으로 이만큼 연주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커도 너무 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오케스트라에 파묻히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낸 것도 대단하다. 그 때문인지 음 하나하나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꾹꾹 깊이 눌러 연주했다. 때때로 남다른 활놀림으로 색다른 맛을 내었고, 고음 현은 밝고 저음 현은 어둡게 하여 뚜렷한 음색 대비를 주기도 했다. 다만, 저음 현과 고음 현을 오가면서 음색이 차츰 바뀌지 않고 느닷없이 바뀌어 어색하게 들리곤 한 것은 옥에 티였다.
5악장에서 탬버린 대신 작은북(snare drum)을 쓴 것이 매우 참신했다. 악보 지시를 지키지 않은 것은 원칙적으로 좋지 않지만, 연주회장이 너무 커서 모든 악기 소리가 밋밋해지는 마당이라 오히려 작은북이 음악에 양념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탬버린보다 더 크고 찰기 있는 소리로 마치 고수가 판소리꾼 이끌듯 흥을 돋웠다.
1악장 마디 253에서 플루트가 악보에서 지시한 것보다 더 나서서 독주 바이올린과 완전히 대등하게 주고받은 것도 재미있었다. 악보에는 독주 바이올린이 매우 세고 또렷하게(ff ben marcato) 연주하는 동안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나란히 매우 여리게 연주하도록 지시하고 있지만, 플루트가 좀 더 앞으로 나서주면 독주 바이올린과 선율이 얽히면서 감칠맛을 낼 수도 있다. 서울시향 플루트 주자는 이것을 더욱 과장하고 협연자는 살짝 뒤로 물러나서 플루트가 살짝 선율을 이끌어가기까지 했다. 지휘자 폴 메이어가 관악기 연주자라 일부러 그렇게 시켰을까?
생상스 교향곡 3번은 실연으로 좋은 연주를 듣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바로 파이프 오르간 때문이다. 파이프 오르간은 원래 교회 음향에 어울리는 악기인데, 연주회장은 교회와는 음향이 많이 다르며 특히 잔향 시간이 짧다. 이런 까닭에 음반에 담을 때에는 파이프 오르간을 따로 녹음하곤 한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은 전문가가 인정하는 매우 훌륭한 악기이지만 연주회장 잔향이 너무 짧아서 장난감 같은 소리를 냈다. 중저음에 비해 중고음이 너무 세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 또한 잔향 좋은 성당에서라면 알맞게 들렸을 듯싶다. 다만, 오르간이 아니면 낼 수 없는 극저음은 아주 좋았다. 특히 1악장에서 달콤한 화음에 극저음을 더한 오르간 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오르간은 역시 극저음이 제맛이다.
오르간 음량이 너무 커서 오케스트라 소리가 묻혀 버린 것도 불만이었다. 오르간을 연주한 이한나에게 물어봤더니 오르간 소리가 큰 게 낫다는 의견이 많아서 그렇게 했단다. 하긴, 잔향도 짧은 데다가 파이프가 연주회장 오른쪽에 있어서 오케스트라와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노는 마당이라면 차라리 오르간이 소리를 꽉 움켜쥐고 끌고 가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
파이프와 콘솔이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를 오케스트라가 가로막고 있어서 오르간 주자가 박자 맞추는 데 애를 먹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케스트라 소리가 커질수록 더 그랬는데, 건반을 눌러 소리가 날 때까지 시간이 꽤 많이 걸리는 것 같았다. 오르간 주자가 박자를 미리 계산해서 한참 먼저 건반을 눌러야 했다는 말이다. 콘솔이 파이프 가까이 있었다면 이 문제는 해결되었겠지만, 지휘자와 멀리 떨어져 의사전달에 어려움이 생길 테니 그것도 좋지 않다. 연습실이 따로 있어서 연주회 당일에서야 부랴부랴 오르간 특성에 적응해야 했다니 지휘자가 예비박을 주기도 곤란했을 터다. 시향 전용 연주회장이 있어서 연주회장과 연습실이 다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고약한 것을 생각하면 오르간 주자는 사실 박자를 매우 잘 맞췄다. 오르간 전문 연주자들은 박자감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생상스 오르간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논 레가토(non legato), 즉 끊어치기다. 19세기 프랑스에는 이어치기가 크게 유행했는데, 생상스는 이것이 앞선 세대에 유행했던 과장된 끊어치기(détaché)에서 나온 반작용이며 좋지 않다고 보았다. 교향곡 3번은 오르간 곡이 아닌 오르간이 들어간 교향곡이므로 논 레가토를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으며, 필요할 때는 오르간 대신 오케스트라가 끊어 연주하도록 악보에서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2악장 마디 392 같은 곳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오르간 소리에 완전히 묻혀버렸기 때문에 오르간이 끊어 연주한 것이 매우 적절했다. 마디 419에서는 긴장감 넘치는 화성에 맑은 음색으로 너무 끊어 연주하니 뿅뿅거리는 소리가 되어버렸다. 잔향 탓이 크겠지만 음색을 좀 더 거칠게 만들어줬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생상스는 빠른 음형을 논 레가토로 연주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2악장 마에스토소 바로 뒤에 피아노 고음이 반짝반짝하는 음형(마디 384)도 원래는 오르간 논 레가토를 의도했다가 아예 피아노에 맡긴 것이 아닐까 싶은데, 실제로 잔향을 넉넉하게 잡고 녹음한 음반을 들어보면 오르간 소리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날 피아노는 오르간 콘솔 가까이 있어서 파이프와는 멀리 떨어졌는데다가 오케스트라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도 않았던 점이 안타까웠다. 피아노를 오르간 파이프 가까이 두려면 콘트라베이스를 밀어내야 할 판이라 오케스트라 배치가 엉망이 될 테니 그것도 문제다.
만약에 연주회장이 명동 성당이었다면 어땠을까. 글쎄, 오케스트라가 곤란하겠지?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