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클래식에 있는 어떤 글을 읽고
드는 생각이 있어 씁니다. 글에 나타난 세 개의 논점을 대변하는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말꼬리 잡는 방식과 비슷해 보여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군요. 원문을
읽지 않으신 분은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브루크너의 문제는'방법론'에
있어서의 다양성이 베토벤이나 브람스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
브루크너의 음악이 형식 논리로 보면 좀 엉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음악을 판단하려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서울과 의정부시가 맞붙은 곳에
자리잡은
이 집은 가난한 집이다
그래도 뜰은 볼 만하다
감나무와
버드나무와
무궁화꽃이
피며
이름도 모를 잡나무가 있다
장모님과
여고 삼 년인 영진과
마누라
그리고 셋방 든 홍씨와
합해서 일곱 명이 살고 있는 이 집은
뜰로서 부끄럽지
않다.
언제나 푸르고 녹색인 뜰
맑고 곱고 아담한 뜰
나는 생각나면
이
뜰에서 쉰다
그 포근함이며
깨끗한 공기여
이 시 어떻습니까? 뭔가 좀 엉성하다고요? 맞습니다. 제
집 뜰이 "언제나 푸르고 녹색"이라는데, 언제부터 감나무, 버드나무,
무궁화 따위가 상록수였습니까? 그리고 버드나무까지 있는 뜰이 아담하기는 뭐가
아담합니까? 그리고 시에 나타난 인물은 주인공까지 합해 다섯 명인데 엉뚱하게도
일곱 명이라고 우깁니다. 시를 쓴 사람은 간단한 산수도 할 줄 모른답니까? 뭐 이따위
엉터리 시를 인용했느냐고요? 네, 이야기 형태의 시에서 앞뒤 매무새가 맞지 않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볼까요?
"(…) 시인은
실제 뜰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2연을 보면 그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감나무는
장모님과 대응되고(감나무의 이미지, 특히 노인의 피부와 감나무 껍질의 질감의 유사성을
생각해 보라), 버드나무와 여고 삼 년생인 영진이 대응되고(버드나무는 옛부터 나긋나긋한
젊은 여자에 대한 비유로 흔히 사용된다), 무궁화꽃과 마누라가 대응되고(시인에게
꽃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식구는 마누라뿐이다. 그리고 나이든 마누라는 무궁화처럼
오래 된 꽃이다), 이름도 모를 잡나무는 셋방 식구들과 대응된다(셋방 식구들의 이름은
잘 모른다).
이러한 대응을 잘 살펴볼 때, 시인이 정말로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꽃나무로 이루어진 정원이 아니라 사랑스런 가족들로 이루어진 가정의 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셋방 식구들까지 잘 어울려 사는 훈훈한 가정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연에서 언제나 푸르고 밝고 곱고 아담한 집안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시인은 삶에 지치면 가족의 포근한 품안에서 쉰다고 말한다.
마지막 구절 "그 포근함이여 / 깨끗한 공기여"에서는 실제 포근함과 깨끗함에
언어의 껍질을 깨고 독자의 마음에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다. 변두리의 가난한
집이지만 그 집안의 분위기는 천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포근함과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 (이남호)
- 오탁번., "둥근 과일과 떠오르는 달", [현대시의 이해]. 서울: 나남신서 (1998). 40-41쪽.
참고로 위 시는 천상병의 <우리집 뜰>입니다. <귀천>은
다들 아시죠?
음악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형식논리를 잣대로 삼을 수도 있지만
상상력도 훌륭한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을 중요시할 것인지는
각자의 가치판단에 따를 일입니다만, 한 가지만을 절대시하려는 태도는 곤란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음악 전공자들이 기교는 뛰어나지만 음악적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곧잘 듣습니다.
*
"말러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구성력'입니다.
쉽게 말해 그의 곡은 '웅장하고 멋지게 쓰여진 여러 조각조각들의 모임'이죠."
-->
브루크너와는 달리 말러의 '구성력'과 관련해서는 위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
힘듭니다. 말러의 음악을 악식론적으로 분석하려면 곤란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석의 기준이 베토벤과 브람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브루크너는 너무
단순해서 탈이고 말러는 너무 변화가 커서 탈이니 적당한 것이 좋겠다면, 그 '적당함'의
기준은?) 왜 그래야 할까요? 바흐를 기준으로 하면 안 될까요? 옳거니, 바흐를 기준으로
하면 베토벤도 브람스도 뛰어난 작곡가입니다만, 말러를 그보다 못한 작곡가라 말하기는
힘들어집니다. 말러는 특히 교향곡 9번 3악장을 작곡하면서 말러의 작곡기법을 깔보는
사람을 조롱하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합니다. 대위법으로 말러 교향곡 9번 3악장과
견줄 작품은 과연?
베토벤을 절대 기준으로 놓고 보더라도 여전히 논란거리는
남습니다. 악식론적으로 따져서 곤란한 것은 말러 뿐 아니라 베토벤도 마찬가지거든요.
이를테면 "템페스트" 소나타 1악장에서 제시부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이에
대해 학자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화 하나:
김원철: 마디 20까지가 인트로(intro)이면서 그 속에 제시부에
사용된 주제가 다 들어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 나름대로 그럴 듯하기는
한데, 참 파격적인 악식론이로구나. 그렇다면 이것을 소나타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원철:
모르겠네요. ㅡ,.ㅡ (까짓 거 소나타 형식이 아니라고 해도 그만이죠, 뭐. ㅡㅡ;)
"템페스트"
소나타 악보 보기
*
"즉, 필요한 최소한의 소리를
쓰는게 아니라 그의 곡 특유의 '표현력'을 위한다는 목적 아래 가급적 많은 악기(쓸데없지
않은 이상인 부분이 더 많긴 하지만..)가 매 순간 사용되죠."
-->
역시 기준점의 문제입니다. 말러의 관현악법에 낭비가 있다면 그 기준은? (아아,
여기서 말러의 초기 교향곡을 예로 들지는 마세요. 젊은 작곡가는 누구나 허영심이
있기 마련입니다. 허영심을 따지자면 바그너의 <리엔치>야 말로.. ^^;)
*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제기. 서양음악의 형식론은 음악에 유기성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할까요? 길게 쓰기 귀찮으니 예전에 썼던 글
하나만 링크 걸고 도망갑니다. 음악의 눈 (樂眼)
덧글 모음:
pheid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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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클의 그 글을 봤었는데, 교향곡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교향곡이 내포하는 것이 어떤것이던
결국 형식과 구조라는 것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교향곡을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브루크너와 말러에
대해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것도 어느정도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은 됩니다... 물론 그런 측면에서 그들의 작품의 우열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교향곡이라는 음악을 담는 그릇에대해 가지고 있는 각 작곡가의 생각자체가
다르다고 할수 있으니..
특
히 그 글에서 말러의 관현악법의 낭비라는 것과 말러의 구성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동의할수 없군요...^^ 님의 말대로 말러의
초기작이야 그렇다해도 후기 교향곡의 스코어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수 있을지... 그리고 말러의 대위법적 자질을 접어두고라도 3번
교향곡 1악장 같은곡을, 정말 중구난방의 음악조각들을 소나타 형식(?)에 담아낸 능력은 어찌 보는지...
간만에 좋은 글을 읽어 쓸데없는 말 남긴것 같습니다...^^
2005/07/12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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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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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블로그질 사흘 만에 첫 덧글입니다! 고맙습니다~~ >_<
2005/07/12 20:25 |
schnittke: 글을 참 맛나게 쓰셨네요.
^ㅡ^ | 05/07/13 08:04 | tpch3:
상당히 깊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 군요^^ 제가 나름대로 짧게 간단한 반박을 다시 해보자면 일단 저는 브루크너와 말러의
'교향곡'을 재료로 해서 말을 한 것입니다. 이는 앞글의 내용을 보시면 잘 알것입니다. 최소한 '교향곡'이란 장르의 특성과
그것이 '절대음악'이란 것을 생각한다면 과연 상상력과 논리력 중 어느것이 선택되어야 할지는 금방 분명해 질 것입니다. 반대로
'판타지'를 쓰는데 논리력을 논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가곡 등 기타 양식을 논할때 말러와 브람스의의 가곡 중 누가 더
뛰어나냐는 정말로 힘든 논쟁거리가 될 것입니다. 또하나, 형식의 명확성을 말하고 계시는데 저는 그 명확성을 논한것이 아닙니다^^
작곡가라면 그 의도에 따라 각 부분부분의 구분을 명확히 할 수도,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오버랩해서 다소 모호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부분부분관의 논리적인 관계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또는 앞과 뒤에 있어서 그 이유가
불분명하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관현악법 낭비에 대한 문제는 저도 사실 매우 조심스러운 것인데 실은 님처럼 후기보단 초기의
곡을 노린 것이 더 크다고 고백합니다. 그 분야의 최고자(?)는 역시 님의 말씀처럼 바그너가 되겠지요^^ | 05/07/13 11:25 | 김원철 (wagnerian):
제가 원래 글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곽태평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향곡'이라는 개념 자체가 베토벤 등의 음악적 유산에
종속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전통적' 교향곡 개념을 고수한다면 말러의 교향곡은 더 이상 '교향곡'일 수
없습니다. 말러는 단지 'Symphonie'라는 말의 어원적 개념을 빌어 자신의 작품을 '교향곡(Symphonie)'이라고 했을
뿐이지요. 그리고 '절대음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만(저는 바그네리안입니다. 한슬릭 즐~ ^^), '전통적'
교향곡의 개념을 버리고 나면 꼭 그것이 '절대음악'이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순수한 의미의 '절대음악'은 하나의
지향점이 될 수는 있을지라도 실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05/07/13 15:09 | 김원철 (wagnerian):
또한, '판타지'의 세계에서도 내부적인 논리는 필요합니다. 제가 예로 든 천상병의 시를 보더라도 상상력을 보태고 난 뒤에는
앞뒤가 잘 맞아떨어집니다. 즉, 객관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면(그 '객관성'의 기준 자체가 베토벤-브람스인 것이 불만이라는
것은 이미 얘기했지요?) 언뜻 모호해 보이는 부분 부분의 관계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감상자(또는 해석자)의 상상력입니다. (사실은 '판타지'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기존의 틀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론적 분석이 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지휘자는 자신의 판타지를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할 수 있거나 또는 각자의 판타지를 이끌어내어 하나로
융합해내기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이러한 점에서 천재적이라는 얘기를 모 연주자에게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 05/07/13 15:09 | tpch3:
유감스럽게도 저 개인적인 견해로는 '교향곡'이란 개념 자체를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베토벤의 것에 종속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음악사적으로봐도 분명히 드러나거니와 '하이든'이 틀을 형성하고 '베토벤'에 의하여 일단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브루크너'나 '말러' 내지는 '브람스'는 이에 대한 변형 등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말 한정시켜
말을 한다면 말씀처럼 말러의 것은 '교향곡'이라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음악에 있어서 '형식' 내지는 '악식'에 관한
문제는 그렇게 쉽게 왈가왈부 할 만한것도, 쉽게 여러 본질중 몇 개를 제외하고 폭넓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됩니다.
'절대음악'의 개념을 싫어하시는 듯 한데 이는 님의 취향이지 일반적인 정의나 통용되는 생각은 아닌 듯 합니다. 저는 가급적
객관적으로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역시 한쪽이 명백히 맞다고 생각하기를 원치는 않으나 이 부분에 대해선 별 수 없다 생각할 정도로
저 주변과의 논의에서도 결정이 났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판타지'의 예를 든 것은 그곳에 논리가 없다는 게
아니라 '교향곡'과의 비교를 위한 것입니다. '객관성'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하셨는데 | 05/07/13 17:05 | tpch3: 그렇다면 이 세상에 모든 음악이 표제 음악이 되어버리겠군요^^ 음악사상 가장 완벽한 형식이라 하는 '소나타'와 '푸가'를 생각해보십시요. 어느 범주에 들어가는지 판단은 쉽게 내리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 05/07/13 17:41 | 김원철 (wagnerian): '교향곡'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으니 대충 상황정리가 된 것이지요? ^^ | 05/07/13 18:05 | 김원철 (wagnerian):
저는 '절대음악'을 싫어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말러의 음악을 최대한 절대음악의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논지는 절대음악-표제음악 이분법은 낡은 흑백논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슬릭 즐~'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만, 사실 한슬릭의 논리는 당시에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편의상 좌익-우익의 비유를 하자면, 당시에는 극우파가 판치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추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극좌파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좌우의 이념 대립이 언제까지나
흑아니면 백 식의 일차원적인 대결 양상이 되면 곤란합니다. '객관성'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고 모든 음악이 표제음악이 된다는
생각은 마치 우파가 정권을 잃으니 한반도가 빨갱이 천지가 된다는 발상과도 같습니다. (어째 정치 얘기를 하자니 뉘앙스가 좀
이상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그냥 편의상 비유로만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결국 하고싶은 주장은 절대음악-표제음악 이분법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근본적인 문제제기: 세상에 절대적인 객관 또는 절대적인 주관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떤
수학자는 수학 논리 체계 또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합니다. (누구더라..--a) | 05/07/13 18:07 | ashkenazy7:
제가 괜히 끼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어떤 잣대에서 보는가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아는 미국에서 음악학으로
박사를 하신 분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가 요즘 그렇게 흥분하며 연주가 많이 되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사실 서구의
음악학에서는 그리 비중을 차지 못하고 그냥 슬쩍 언급만하는 정도라네요. 그리고 작곡을 전공하시는 분도 형식을 중요시하는 서구,
특히 독일 음악 쪽에서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 높이 평가될 수 없으며, 러시아 음악의 특징인 서사적인 흐름 안에서 평가된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더군요. 사실 러시아에서는 쇼스타코비치가 러시아의 베토벤 아닙니까?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현재 교향곡은 소멸되고 있는 장르라고 알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중반에도 하르트만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향곡을 작곡하신 분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경향의 작곡가였고요.
그래서 해체되기 일보직전의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을 브람스나 베토벤 교향곡의 잣대에서 평가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관점에 맞추어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네요 | 05/07/13 20:20 | tpch3:
두 분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자꾸만 저의 의견이 넓게 확대 해석되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데 저는 최소한 같은 '장르'의
곡들에 비해서 시대를 초월하여 비교를 할 수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곡이쓰여질 때 단순히 그 곡뿐만 아니라 그 시대상황,
작곡가의 상태 등이 곡의 여러 중요 요소가 되겠지만 곡 자체의 완성도 등을 논할 때 분명 시대와 상관없는 '음악적 절대성'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곡 그 자체'만을 상대로 하였으며 그 밖의 시대관점이랄지 작곡가만의 특색은 가능한 배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절대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원 글과 상관없이 확대되어 나온 이야기 같으므로 더이상 논하지 않겠습니다. 김원철님의
말씀도 제가 읽기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제 글이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하며 이쯤에서
논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저도 더이상 제 생각을 끝까지 맞는 것이라 주장할 뜻도 없고(애초에 그걸 원한 것이 아니였으니까요)
같이 음악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서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어쨋든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고클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재정리하며 | 05/07/14 01:33 | tpch3: 또한 다른 많은 의견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많은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이만 ㅡ | 05/07/14 01:33 | scherzo:
역사성을 배제한 '음악적 절대성'이란 게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보아야 것 같은데요?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하고 싶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고 그런 시도도 어느 정도는 확실히 가치 있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객관성'이라는 개념조차 이미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개념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 테면, '교향곡'이라는 장르의 의미가 이미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 개념인데, 그것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베토벤의 교향곡과 말러의 교향곡은 같은 장르이면서도 같은 장르가 아닌 것이죠. 그리고 '곡
그 자체' 안에도 이미 많은 역사성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배제하는 순간 그 음악은 절름발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통용되는 예술사도, '객관적' 음악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사는 새로운 것, 살아있는 감수성, 시대의 정신적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언젠가 객관적 음악사라는 것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음악 자체가 죽었다고 추측해도
된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 05/07/14 19:21 | 김원철 (wagnerian):
역사성을 배제한 '음악적 절대성'이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음악학자를 본 적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한 전제는 음악사적 발전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더군요. 즉 바흐-모차르트-베토벤-브람스로 이어지는 조성 시대가 서양음악의 황금기였고, 그 이전의 음악은
미개하며, 그 이후의 음악은 사양길이라는 식입니다. 미국의 꽤 유명한 학자인데, 내한 강연회에서 그 말을 듣고 황당해 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가 훗날 수업시간에 그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아, 저놈이 미친놈이구나!" (일동
쓰러짐) | 05/07/14 21:50 | 김원철 (wagnerian): 역사성을 배제한 '음악적 절대성'이 있는지 없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있다면 그것을 함부로 정의하려는 태도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 했던가요? | 05/07/14 2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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