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4일 일요일

근대성과 그 외부, 계산적 합리주의, 과학과 인문학, 동양과 서양

이진경 선생의 '근대성과 그 외부'를 주제로 한 강연 및 토론 영상을 본 감상.

https://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140514&rid=2942

이진경 선생은 서구적 근대성을 '계산적 합리주의'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면서 계보학적인 설명을 하심.
유지원 선생은 동아시아에도 수학과 과학이 있었음에도 계산적 합리주의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동서양 수학의 차이로 보고, 서구의 수학이 논리적 정합성을 엄밀하게 추구한 것에 반해 동아시아 수학은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용적 성격이 강했다고 보았음.

유지원 님 말씀에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생각한 것:

우선 유럽과 동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한 러시아의 사례.

옥스퍼드 대학교 김민형 선생이 최근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책을 내시고 한국에서 강연을 하셨는데, 구소련 붕괴를 계기로 영국으로 망명한 수학자들을 겪어 보니 그 사람들은 인류사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수학 토론 문화를 가졌고 개개인이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한편, 수학적으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중시하면서 논리적 디테일은 대충 넘어가거나 심지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려는 경향마저 있다고 함. '과학같은 소리하네' 팟캐스트에서 하신 말씀.

같은 팟캐스트에서 공학자인 'K2 박사'님이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러시아 (로켓)공학자들은 서방세계 공학자들이 잘 모르는 '경험식'을 많이 사용함. 경험식이란 이론적 근거따위 개무시하고 그냥 경험식대로 계산하면 결과는 잘만 나오는 것. 티티우스-보데 법칙이 경험식의 유명한 예. (그러니까 주로 이과 출신들한테 유명함. 나님은 문과 출신인데 뭐 이런 걸 알고 있다능)

또 생각난 것은 인문학자와 과학자가 인터넷으로 말싸움하다가 판이 커져서 문과 vs 이과 패싸움이 되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례 하나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내가 썼던 글:

☞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인문학에 '아님 말고'를 허하라

본문을 조금 인용하자면,

실험 디자인에 제약이 많을수록 결론은 조심스러워지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설득력 있는 결론을 얻고자 실험 디자인에 수많은 잔머리를 동원하거나 정교한 통계 기법에 기대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학술적으로 타당한지를 따지면 분야마다 기준은 달라진다. 물리학보다 생물학이, 생물학보다 심리학이, 심리학보다 경제학이 대체로 더 많은 '노이즈'를 떠안고 가야 하며, 그것을 극복하려고 더 복잡한 통계 기법을 동원하는 듯하다. 이때 더 복잡한 통계 기법을 썼다는 사실이 반드시 더 설득력 있는 결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정이 이러니 특정 분야 학자가 다른 분야 학자들에게 '너네는 과학이 아니라능!' 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일도 있더라. 그리고 인문학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먹이가 된다.

[…] '데이터'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상태에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논하려면 '아님 말고' 식으로 주장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 주장에 설득될지 말지는 읽는 이 마음일지라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부 논리가 탄탄한가 아닌가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유하는 훈련은 인문학자가 과학자보다 더 많이 했다.


이쯤해서 논리적 디테일을 대충 뭉개면서 안일하게 내리는 결론:

그러니까 서구적 합리주의를 상당 부분 내면화한 포스트모던 시대 동아시아인으로서 서구과학의 합리주의를 우선적 가치에 놓는 것은 중요하지만, 논리적 정합성이 없거나 서구적·근대적 과학에 포섭되지 않았더라도 실질적인 가치가 있다면 잠정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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