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11살 때 친구네 피아노로 독학에 가깝게 익혀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트에서 일하기도 하고, 클럽에서 재즈 연주로 학비를 벌었다고도 합니다. 20살이 될 때까지 (선생님 말씀을 안 들은 탓이 컸다지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음반을 듣고 따라 하는 식으로 주요 피아노곡을 익히곤 했다는데요, 이런 사람이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노 콩쿠르 결선에까지 올랐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일이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네요.
삼류 영화 줄거리가 아닙니다. 얼마 전에 열렸던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파란을 일으킨 피아니스트 뤼카 드바르그(Lucas Debargue) 이야기예요. 본선 때부터 '이번 콩쿠르는 루카스 대 루카스'라는 말이 잠깐 돌았는데, 한 사람은 지난 쇼팽 콩쿠르 때에도 주목받았던 러시아 출신 루카스 게뉴샤스(Lukas Geniušas)였지요.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이 영 낯선 이름이더라고요. 프랑스 사람이라서 '루카스'가 아닌 '뤼카'였고, 콩쿠르 직후 한 영국 언론인이 이 사람을 취재하면서 기막힌 사연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콩쿠르 중계 영상으로 뤼카 드바르그의 연주를 들어 봤습니다. 연주가 참 특이해요. 때로는 악보에서 지시하는 바를 과감하게 무시하는 것이, 만약 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그렇게 연주했다가는 야단맞기 딱 좋을 연주였지요. 실제로 어떤 유명 피아노 교수는 이 사람의 연주를 견디지 못하고 콩쿠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도 합니다. 콩쿠르 결선까지 갔다는 사실이 신기할 일이었지요.
그러나 관객은 이 괴짜 연주자에게 열광했습니다. 중계 영상을 보면, 연주가 끝나자마자 객석이 그야말로 '폭발'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입니다. 영화 등에 흔히 나오는 '괴짜 천재 음악가' 클리셰(cliché)보다 더한 사람이 현실에 나타난 현장이었지요. 그러나 콩쿠르 결과마저 그렇지는 않아서, 뤼카 드바르그는 결선 진출자 가운데 꼴찌를 했습니다.
기대를 배신한 결과에 실망한 사람들이 심사위원을 성토했습니다. 영국 출신 유명 피아니스트가 자신을 포함한 심사위원을 변호하는 긴 글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러시아 출신 심사위원보다 '자유 서방 세계' 심사위원들이 뤼카 드바르그에게 더 짠 점수를 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다른 경쟁자들이 워낙 대단했지요. 그러니까 딱히 심사위원을 성토할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독특한 연주와 기행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와 뤼카 드바르그를 견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호불호가 갈리는 특이한 연주, 귀로 듣고 작품을 익히는 버릇 등은 역시 '노다메'를 연상시키지요. 니노미야 토모코 원작 만화이자 TV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제작된 《노다메 칸타빌레》의 주인공 말이에요.
뤼카 드바르그 자신은 영화 《샤인》의 모델이 되었던 데이비드 헬프갓과 자신을 동일시했었다고 하네요. 물론 연주 실력은 뤼카 드바르그가 데이비드 헬프갓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납니다. 그런데 연주하는 모습에서 살짝 광기 같은 것이 묻어나는 것이 어찌 생각하면 닮은꼴이기도 합니다.
드바르그를 인터뷰했던 언론인 이스민 브라운(Ismene Brown)은 뤼카 드바르그가 대인관계에 서툴기는 해도 냉철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했더니 제임스 조이스 소설 『율리시스』를 읽으면서 영어를 독학했다고 하더라네요! 문장이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그 소설로 말이지요. 허허허…
지난 7월 17일 모스크바에서 뤼카 드바르그 독주회가 있었고, 객석은 또 한 번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세계 정상급 기획사에서 앞다투어 이 사람과 전속 계약을 맺으려 '러브콜'을 날리고 있다고도 합니다. 이 사람을 통영에 초청해야 할까요?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의 다른 연주를 좀 더 들어 봐야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