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성시연
협연자 : Alexander Gavryluk (Pf)
Sibelius, Pohjola's Daughter, Op.49
Prokofiev, Piano Concerto No. 2 in g, Op.16
Bartok, The Miraculous Mandarin, Op.19
알렉산드르 가브릴뤼크(x) → 올렉산드르 가브릴류크(o) http://goo.gl/7Lmwm
성시연이 지난해 1월과 9월에 이어 세 번째로 서울시향을 지휘했다. 그가 나라 밖에서 걸어온 놀라운 발자취를 생각하면 그동안 한국에서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럽다. '나이 어린 여자'라는 약점 아닌 약점을 생각하면 꽤 훌륭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그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를 그저 '지휘자 성시연'으로 바로 말할 때가 왔다. 이날 연주회에서 드디어 참된 솜씨를 제법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솜씨를 펼쳤다 하기는 어려우며 기대에 못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볼 때마다 한 걸음 나아간 모습을 놓치지 마시라. 성시연은 젊으며 앞날은 밝다.
지난 연주회보다 나아진 티가 가장 잘 드러난 곡은 시벨리우스 <포흐욜라의 딸>이었다. 첫 곡이라 그만큼 연습이 모자라기도 했겠거니와 때마침 수석 연주자들이 거의 자리에 없었는데도 제법 무난한 연주를 이끌어내었다. 앙상블이 이따금 흔들리다가 '알레그로' 대목에서는 '프레스토'에 가까운 아찔한 템포로 마구 달리는 바람에 더욱 삐걱거렸지만, 그래도 끝까지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물량공세'로 뚝심 있게 밀어붙여서 이 곡이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실수를 눈치 채기 어렵게 잘 다스렸다. 지난 9월 연주회 첫 곡에 견주면 놀랄 만한 발전이다.
버르토크 <이상한 중국 관리>는 성시연이 서울시향을 지휘해 어디까지 소리를 뽑아낼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악단을 확 휘어잡지는 못하지만 구석구석 열심히 다듬어 노력파 모범생 같은 연주를 이끌어낸 대목은 지난 연주회에서 보여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음악 흐름을 탄탄하게 다스리고 템포와 리듬과 음색을 맛깔스럽게 다듬는 솜씨는 더 나아졌다. 때때로 결정적인 '한 방'이 아쉽기는 했으나 수석 연주자들 빈자리가 작지 않았음을 헤아리면 받아들이지 못할 바는 아니며 그 때문에라도 앞날이 더욱 기대된다.
수석 연주자가 자리를 비운 틈에 솜씨를 마음껏 뽐낸 연주자도 있었으니 바로 클라리넷 부수석 임상우다. 채재일 수석이 따듯한 음색, 부드러운 레가토, 그윽한 소토보체를 곧잘 뽐낸다면, 임상우는 겉모습부터 딱 클라리넷 연주자처럼 생겨서는 그 소리 또한 곧고 매끄럽고 빈틈없는 클라리넷 그 자체다. 무엇보다 남자를 꼬드기는 대목에서 빠르고 어지러운 음형을 나무랄 데 없이 잘 다스렸다. 여자가 중국 관리를 처음 보고 두려워하는 대목에서는 지휘자가 중국풍 트롬본 소리를 일부러 줄이고 클라리넷 소리를 크게 하여 마치 카메라가 여자를 가까이 중국 관리를 멀리 잡은 듯한 원근감을 살렸는데, 이때 클라리넷 소리가 몹시 사나워서 마치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부짖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했다.
이날 가장 돋보인 사람은 타악기 연주자들이었다. 시향 타악기 연주자들은 매우 뛰어난데도 현대 음악이 아니면 좀처럼 솜씨를 뽐낼 때를 만나기 어려운데, 이날 모처럼 오케스트라 음색을 조였다 풀었다 하며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중국 관리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대목(Maestoso)이 가장 멋졌고, 쫓고 쫓기는 대목(Sempre vivace)에서는 지휘자가 긴 호흡으로 놀랍도록 폭넓은 크레셴도를 이끌어내는 동안 소리에 탄탄한 뼈대를 이루었다. 이날 연주된 판본은 초연과 출판 과정에서 지워진 대목을 모두 되살린 2000년 개정판으로 판단된다. 중국 관리가 숨 막혀 죽는 대목(Pesante)부터 어딘가 낯설다고 느꼈다면 바로 판본이 달랐던 탓이며, 인기 있는 음반이 대부분 2000년 이전 녹음이라 사정을 아는 사람은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타악기가 가장 훌륭했다.
트롬본은 수석 연주자가 빠졌어도 탄탄한 연주로 오케스트라 무게 중심을 잘 잡았다. 그러나 트럼펫은 소리가 너무 작을 때가 잦아 안타까웠다. 이를테면 중국 관리가 칼 맞는 대목(Ritenuto)에서 트럼펫은 약음기를 꼈어도 포르티시모로 연주해야 하지만 트롬본 메조포르테보다 훨씬 작게 들렸다. 죽지 않는 중국 관리를 여자가 안아준 다음에 나오는 트롬본 마르카토 음형은 뜻밖에 소리가 너무 작아서 갸우뚱했다. 아마도 지휘자가 목관악기 소리를 살리느라 일부러 트롬본 소리를 작게 한 모양인데, 중국 관리가 처음 나타나는 대목도 그렇지만 지휘자는 중국 관리를 조연으로 물리고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했나 보다. 그래서 성욕에 빠져 죽음마저 물리친 징그러운 중국 관리보다는 불쌍하게 이용당하는 여자에게 관객이 더 마음을 쏟기를 바랐나 보다. 지휘자가 여자이기 때문일까?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한 알렉산드르 가브릴뤼크는 큰 힘으로 두드려대면서도 루바토를 꽤 달콤하게 써서 음색이 차갑거나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솜씨가 인상 깊었다. 그래서 프로코피예프 음악에서 스크리아빈이나 때로는 쇼팽 같은 느낌마저 우러나왔으며, 힘이 넘쳐도 우락부락하지 않았고 아찔한 테크닉을 드러낼 때에도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었다. 힘과 테크닉을 음악 속에 갈무리할 줄 아는 훌륭한 연주자가 1984년생이라니, 우리는 이날 거장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김원철. 2009.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