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철은 남에게 반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반말할 사람과 존댓말할 사람 구분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아래 글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원철이 남에게 반말하는 경우 셋 중 하나다.
1. 정말 친한 친구이거나 머리 굵기 전에 사귄 친구.
2. 상대방이 강하게 원했을 경우 - 우리 과 이지영이 그랬다. 현재 이론과 출신 중 내가 유일하게 반말하는 친구.
3. 존댓말의 사회적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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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currentenglish.com/cgi-bin/CrazyWWWBoard.cgi?mode=read&num=357&db=criticism
1. 나이는 차별인가?
나이가 무엇일까? 어느 TV 광고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실생활의 모습은 그러한 새로운 의식을
얼마나 반영할까? 공자의 가르침이 매우 심했던 한국인들에게
나이와 호칭의 문제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행사 같은 곳에
가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호칭할까 고민하는 모습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피시통신에서 희한한 현상이 '님'의 등장이었다. 내게는
여전히
과공비례로 들려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호칭이다. 특히 '시'라는
존대 어간의 사용법을 몰라서 아무 곳에서나 '시'를 남발하는
이들에게 존대어의 넘침은 희극일 뿐이니 (자전거가
넘어지시지 않으시도록). 일상적인 관계에서는 '씨'라는 호칭도
분명 높임말이다. 언젠부터인가 이 '씨'의 격하가 시작되었다.
통신에서는 '님'을 쓰자고 하였으나,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오고가는 말은 더 험해졌다고 한다. 언어를 개선하자는 운동이
결코 운동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2. '씨'로 사망신고
집이든 이웃이든 직장이든 주위를 둘러 보라. 자신을 포함해서
누가 '씨'이고 누가 '님'인지. 그리고 언제부터 '씨'가 낮춤말이
되었는지. 이런 사건이 있었다. 한 직장에서 남자 직원이 여자
직원이 자신을 '씨'로 불렀다고 다른 사무실에 감금한 후
'선생님'으로 부를 것을 강요하며 의자로 내리쳤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자존심이 살인적이라고 볼 수 있다.
누가 자신에게 '님' 대신
'씨'라고 불렀다고 이런 반응을 보일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어 자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언어란 그저 핑계의 수단일 뿐이고 트집을 잡는
용도로만 쓰일 것이니 말이다. '씨'는 서로에게 상하의 개념이
없으면서도 대우를 하는 의미가 있다.
3. 대화와 토론의 미형성
수직 관계의 형성이라는 것은 토론 문화의 부재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당장 '씨'라고 부른다고 해도 과연 싸움이 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척 회의적이다. '씨'를 사용하는 태도도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들처럼 상대방의 태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언어 사용에 있어서 거친 태도로 '씨'를
사용한다는 것은 '씨'의 의미에 관계없이 격렬한 충돌만 불러올
것이니 말이다. 외교적인 의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 외교적인 의례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친밀해지기 이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4. '씨'냐
'님'이냐
한국어는 높임말이 발달되었다고 하지만 이 때문에 인간 관계가
막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높임말을 쓰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고 그것만 배우다가 인생을 접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다는 친족 호칭의 극히 일부만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언어로
인한 무시와 그로 인한 자존심의 충돌에 민감하기 때문에 '씨'에
대한 의도가 서로 엇갈리는 수가 있다.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나
'씨'는 '님'보다는 민주주의적이다. 대개 '손님'으로
부르는 상업 서비스의 호칭에서 내 자신이 어떤 자긍심을 느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님'으로 부르면
기쁘고, 잘 아는 사람이 '씨'라고 불렀다고 의자를 날려야
한다면 이 또한 무슨 동물적인 편견이며 단세포적인 삶의 행태란
말인가.
5. 강제 존대의 끝
이러한 나이와 연관된 호칭과 언어 문화는 사회에서는 정작
부메랑으로 돌아오니 그것도 비극이다. 최근 기업 등에서는
나이
순으로 사람을 자르는 일이 빈번해졌다. 월급이 많아서 줄이는
것도 있고 나이가 많으니 자르는 것도 있겠지만 복합적인 작용이
있다. 기업 경영자 측에서 보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더 젊은
사람들과의 거리감이 더 문제이다. 나이로 존대하라고 하니
서서히 멀어진다. 겉으로는 존대를 해도 속으로는 모르니
말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또 억지로 뭘 시키는 것, 강요하는 것을
싫어한다. 거기에 나이 들이대면 단기적으론 몰라도
중장기적으론 뻔하다. 누구
하나는 나간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여성은 더욱 그러하다. 여성들은 친한 선후배라면 몰라도 바로
말을 놓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그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는
문화가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나이로 존대를 강제하는 경우 결국 사회적으로 그 나이
때문에 걸림돌을 만드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과거에는 나이
하나로 독재를 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으나 이제는 그게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시대정신이 바뀐 것이다. 성차별에 대한
저항이 커지는 만큼 나이 차별에
대한 저항도 갈수록 커질 것은
당연하다. 경제적인 요인도 연령 차별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나이에 대한 차별이 엷어진 서구 사회의 예를 들지 않아도 요즘
직급 파괴나 연봉제 등으로 연공서열이 무너지는 것은 나이
하나에 목숨 걸고 살던 이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가치관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6. 능력 위주의 사회
앞으로 '사장님', '선생님', '님', '놈' 대신에 '씨'가 골고루 쓰일
수 있게 되려면 개인들의 언어 습관도 세련되져야
한다. 말을
아무렇게 솔직하게 뱉어 낸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감정의
무절제한 노출은 적절한 이성적인 논리가 없으면 전면적인
충돌로 치닫는 경우는 아주 많다.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도
관계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능력 위주의 사회 (meritocracy)
를 가져오는 기본이다.
7. 서구의 호칭 문화
서구 사회에서 이름으로 호칭하는 것을 넘어서 애칭으로까지
짧게 부르는 것도 언어와 호칭의 문화에 시시하는 바가 크다.
나이를 차별하지
않고 능력 위주로 대학원에 오거나 일하는
문화를 호칭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내가 Mr. Endacott라고
부르면 내 영국인 친구는 장난으로 알고 분명히 Yes, sir!라고
우렁차게 복창할 것이다. 그만큼 그 호칭은 거리감이 있고
딱딱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Nicholas이지만 그렇게 부른
적은 없다. 더 친밀한 느낌인 Nick으로 부른다. 이미 이름의
원명도 딱딱한 느낌이 들어서 애칭으로 번진 문화인 것이다.
친구뿐만 아니다. 정년퇴직을 앞둔 교수도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스스로 거리감을 줄이는 것이다.
그들도 분명히 딱딱한 귀족-평민 시대를 살았고 아직도 살고
있다. 그렇지만 호칭이 인간관계의 벽이라는 것을 이미 실감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들은 이미 Mr의 상대편인
'씨'조차도 의자가 날아가는 과공비례의 상황인 것이다. 의자에
안 맞으려면 '김 박사 교수 선생님 귀하님' 정도로 불러야 하나.
언어에 이렇게 강제 존대의 감정이 과다 주입된 상태는 분명
인터넷에서 이러한 표현으로도 가게 만든다. '희섭님은 나가
죽어라!'
8. '족보' 파고들기
일부 한국인들을 만나면 집단주의가 아직도 깊이 뿌리박혀서
능력과는 상관없이 나이, 소속, 학력, 종교 (때론 혈액형이나
좋아하는 색깔까지^^) 등을 확인하는 것도 상당히 심한
습관으로 보인다. 우연히 만난 사이인데도 기업의 인사 담당자도
아닌데 초면에 그러한 것을 묻는 사람도 있으니. 영국에서
대학원 생활을 할 때도 교수나 학생이 어디 출신인지 어디
학교를 나왔는지 나 자신 학문 외에는 별 관심도 없었고 사실
지금도
잘 모른다.
한 박사과정 학생이 corpus linguistics를 가르친 적이 있는데
일부 아시아계 학생들이 하는 소리가 어떻게 박사과정 학생이
대학원생을 가르치냐 그랬다. 난 그 사람이 실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런 학생들은 흔히 교수의 신상정보나
대학원 내의 계보에 정통하다. 꼭 그런 학생들이 있지만,
불행히도 연공서열 문화에 민감한 학생들이 주로 그런
학생들이었음은 여전히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에세이는 수없이
잘리면서도 교수들의 계보 파악에
열심이던 그 학생! 내가 알고
있는 신상정보가 다 그들로 인한 것이니 고마와 해야 하나?
한국 사회가 아직 불안정해서인지 초기의 빠른 신상 파악을 통해
적과 아군을 구분하려는 의식이 여전하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존을 확인하려는 정신도 여전하다.
9. 감성을 채우는 사회
왜 이렇게 존칭 남발의 사회가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빈
머리에는 많은 치장이 필요하듯이 이성이 텅 비면서 엷은 감성
언어에 (그렇다. 존칭은 감성이다)
역량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백화점 판매 사원들은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야 임마,
우리 제품 아주 좋으니 한 번 써 봐.' 오히려 사기꾼들이 만든
싸구려 불량품이어도 '여사님, 이 제품을 몸소 일견하시면
어떠시겠습니까?'로 나간다. 존칭이 사실상 본질에 관계 없이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 도구로도 쓰이는 면이 커진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존의 기준을 상대방에게 놓고 보면,
상대방이 자신을 '어이', '아줌마', '사모님', '여사님',
'영부인님'으로
부를 때마다 일희일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시적인 만남은 의례적인 수사가 불가피한 점이 있다고
보나, 좀 더 상대를 아는 관계라면 이제 호칭보다는 그 사람의
생각과 언어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이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서구인들은 first name, 아니
pet name으로 부르는 문화까지 갔지만 노인들은 더욱 고립되는
상황이 한국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각과 언어에
조심하지 않는 문화가 존대 강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박정희가 환생해야 할 것이다.
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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