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학회 제38차 학술 포럼에 갔다 와서
전날부터
몸이 좋지 않아 밤새도록 앓고 느지막이 일어나 겨우 늦지 않게 학회장에 도착해
멍한 상태로 발표를 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발표 하나가 취소되어 리게티의 주요
작품을 영상과 함께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리게티 하면 <대기 (Atmosphères)>
정도만 알고 있던 차에 그의 다양한 음악 세계를 알 수 있어 좋았다. 몇몇 작품은
모르고 들으면 버르토크의 작품인 줄 오해할 만하기도 했다.
신인선은 “리게티
아카펠라 작품에서 가사와 음악과의 관계 - <영원의 빛>과 <헝가리 에튀드>의
비교 분석을 통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음성학적 측면의 강조, 비언어적 의사 전달 요소를 가상의 언어로 하는 작곡, 극단적인 음역, 음정 다이내믹 변화를 수반하며 텍스트가 담고 있는 격정 전달을 표면에 둔 작곡, 인성의 악기화, 실제적인 언어에서 음소를 유추하여 새로운 언어를 형성 작곡하는 방법 등으로 정리 파악해 볼 수 있는 언어작곡 방법의 다양함에 <헝가리 에튀드>는 시각적, 청각적 그림을 강조하는 방법을 더하고 있다. ‘실험성’과 연결되는 리게티의 언어작곡 방법은 <영원의 빛>과 <헝가리 에튀드>에서 모두 텍스트의 구문론과 의미론 해체를 전제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전자에서는 모음클러스터 형성으로 그리고 후자에서는 영상적 표현을 위한 의성어 강조와 평행몽타주와 비교되는 텍스트의 교차적 편집과 공간적 편집으로 구체화되었다. (23쪽)
리게티가 가사를 다루는 방식은 전통적인 ‘가사 그리기(word-painting)’에
대한 반역(?)이라 할 수 있겠는데(만약 바그너가 리게티를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하는 얄궂은 상상도 해봤다), 그 배경이 되는 사고는 인성도 결국은 악기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는데, 리게티가 단지 먼저 깃발을 꽃은 것뿐이라고 깎아내릴 수 없는 까닭은
“손에 잡히는 듯한 섬세한 음향 감각과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아주 명료하게 형상화하는
탁월한 형식 감각”(이희경, 13쪽)이 음악을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희경은
“1990년대 이후 리게티 작품에서 “국지성(locality)”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타자로서의 존재를 체험한 리게티는, 그 후 나치즘이 창궐하던 학창 시절에는 유대인으로서, 서유럽으로 온 이후에는 동구권 출신 작곡가로서 타자였다. 흔히 ‘타자’의 문제에 접근하는 많은 이론들이 그로부터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리게티의 삶에서 ‘타자’로서의 존재는 ‘정체성 찾기’보다는 ‘접속’과 ‘횡단’을 촉발하는 계기였다. (6쪽)
말하자면 이방인의 시선이 대상의 새로운 측면을 조명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었다는 논리인데, 나는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말러의 디아스포라적 자기인식을
떠올렸다.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는 사람이어서,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아
사람이요,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요, 세계에서는 유대인입니다. 어디를 가나
침입자요,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소외자로서의 자기인식은 무조음악으로
가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던 말러와 무조음악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던 리게티 모두에게
창조를 위한 자양분이 되었던 모양이다.
이희경에 따르면 타자의 시선이
“‘정체성 찾기’보다는 ‘접속’과 ‘횡단’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도록 한 것은
“국지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향할 수 있”(12쪽)는 “절대적
국지성”이다. 이것은 “이미 있는 것, 홈 패인 것들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다른
것과 뒤섞어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그의 독창적인 작곡 방식”(13쪽)을 통해 구현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대적 국지성”은 ‘절대적’이되 더 이상 ‘국지적’이지는
않지 않은가 하는 개인적인 의구심은 남는다.
이희경의 약력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진은숙의 <바이올린협주곡> 연구”라는 논문 제목이었다.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마침 오는 4월 27일 서울시향의 연주회 프로그램에 있어서
조만간 익히려고 생각하던 작품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