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2일 금요일

2004.11.12.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Tondichtung 音詩” - 바그너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Tondichtung 音詩” - 바그너
2004년 11월 12일 (금)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 임헌정


<로엔그린> 3막 전주곡
<발퀴레> 중 ‘보탄의 이별’ (바리톤/사무엘 윤)
<파르지팔> 중 ‘Good Friday Spell’
- 휴식 -
<탄호이저> 서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사랑의 죽음’

내가 군대에 있을 동안 가장 안타까워했던 것은 부천필의 말러 교향곡 시리즈 1번-4번, 그리고 1999년 7월 15일에 있었던 바그너 갈라 콘서트를 놓쳤던 것이다. 제대 후에는 이에 대한 분풀이(?)로 나머지 말러 교향곡 시리즈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말러 시리즈가 끝나고 이번에는 드디어 부천필의 바그너 연주를 들을 수 있었으니 ‘분풀이’를 썩 잘한 셈이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바그너를 연주하기에는 편성이 좀 작다고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바그너 특유의 압도적인 음향을 들을 수는 없어서 아쉬웠다. (숄티의 음반과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숄티의 바그너 연주가 최고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이른바 ‘바그너 마조히즘’을 유발시키는 지독히 자극적인 음향은, 심지어 ‘맥 빠진 소리’라는 불평을 듣기도 하는 카라얀의 “반지” 음반에서도 꼭 필요할 때에는 어느 녹음 못지않게 강렬하게 나타난다.) 전체적인 연주의 질에 있어서도 말러 시리즈를 할 때만큼 단원들이 확신에 차 있지는 않다고 느꼈다. 템포가 종종 흔들리고 리듬 처리가 밋밋할 때가 많았으며, 파트별 앙상블이 약간씩 어긋나기도 했다. 특히 금관 악기의 연주에서 아쉬움을 많이 느꼈는데, 바그너치고는 너무 나긋나긋했던 음향이 주로 이 때문이라 판단된다. 팀파니의 크레셴도도 약했고, 평소에는  살짝 돌출되어 연주에 박력을 더하던 심벌즈는 이날따라 너무 얌전했다. 다만, 호른은 평소 기대치를 웃도는 연주를 들려주었고, 현악기들의 훌륭함은 부천필을 아는 사람에게라면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얘기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임헌정 선생님께서 요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 한다. 원래의 프로그램 순서가 바뀌어 ‘보탄의 이별’이 1부로 당겨져 <로엔그린> 3막 전주곡에 이어 연주되고 대신 <탄호이저> 서곡이 2부로 넘어간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20여 분에 달하는 ‘보탄의 이별’에 이어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까지 이어서 연주하려면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은 개인적으로 금관을 크게 강조하는 카라얀의 해석(카라얀치고는 특이한 해석이다)을 좋아한다. 그러나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셋 잇단 리듬을 반복하면서 주선율이 파곳과 호른으로 넘어가는 부분(마디 16)에서는 이런 식으로 연주하기가 몹시 힘들 것이다. 트롬본과 튜바가 멜로디를 받는 부분(마디 24)에서는 악기 특성상 큰 소리를 내기에는 호른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나, 이번에는 트롬본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빠른 패시지가 문제가 된다. 게다가 부천필의 강점은 관보다는 현에 있는 만큼, 이날 연주처럼 악기 간 밸런스가 고른 ‘얌전한’ 해석이 부천필에는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마디 16부터 시작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상쾌한 운궁은 크게 부풀린 금관 못지않은 음향적 쾌감을 주었다. 3막 전주곡은 길이가 짧아서 이어지는 합창 부분을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연주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지만, 아쉽게도 짧은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발퀴레> 중 ‘보탄의 이별’ 장면은 이른바 ‘바그너 환자’들에게는 이 날 연주회의 핵심이 되는 작품일 것이다. 신계(神界)의 예정된 멸망(라그나로크)을 막기 위해 최고 신 보탄은 자신과 인간 사이에서 반신(半神)인 벨중족(Wälsung 族) 지그문트와 지글린데를 낳지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지그문트를 죽여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보탄의 딸인 여신 브륀힐데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는, 스스로 희생하여 지그문트를 죽이라는 보탄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짓는다. 전지전능한 기독교 유일신과는 달리 자신마저도 얽어매는 계약의 절대성을 힘의 원천으로 하는 보탄은,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의 딸을 벌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는 브륀힐데를 인간으로 만들어 산 속에 잠재우고, 훗날 그녀를 깨우는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도록 한다. 브륀힐데는 보탄에게 마지막으로 ‘용기 있고 두려움 없는 영웅만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라고 부탁한다. (독일어 대본의 한글 번역은 청년 바그네리안의 곽태웅씨의 것을 참고하였음.) 그녀의 비장한 부탁에 감동한 보탄은 마침내 ‘너를 신부로 맞을 수 있는 자는 신인 나보다도 더욱 자유로운 사람이 되리라! (Denn einer nur freie die Braut, der freier als ich, der Gott!)’라고 말한다. 이때 브륀힐데와 보탄의 말에서 공통적으로 ‘지크프리트의 모티프’가 사용되는데, 지크프리트는 지그문트와 지글린데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보탄은 브륀힐데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정하게 작별을 고하고, ‘이제 신이 너를 떠나며, 너에게 입맞춤과 함께 작별을 고하노라! (Denn so kehrt der Gott sich dir ab, so kü
ßt er die Gottheit von dir!)’라고 말하며 그녀를 잠재운다. 이때 사용된 모티프는 흔히 ‘사랑의 포기(Renunciation of Love) 모티프’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그문트가 노퉁 검을 나무에서 뽑기 직전에 사랑이 충만한 상태에서 이 모티프로 노래하는 등의 모순은 유명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모티프를 ‘파국의 예감’ 모티프로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 때 파국은 등장인물의 현재의 행동과 그 의지에 항상 반하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보탄의 대사는 신계의 예정된 멸망을 인정하며 이후의 인간들의 세상을 브륀힐데에게 물려주려는 의도로 해석하거나 또는 지크프리트와 브륀힐데의 파국을 예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보탄은 불의 신 로게를 불러 브륀힐데 주위를 마법의 불로 둘러싸고, ‘내 창 끝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 불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Wer meines Speeres Spitze fürchtet, durchschreite das Feuer nie!)’라고 말하며 노래를 끝맺는다. 이때 지크프리트의 모티프가 다시 사용되었다.

이처럼 ‘보탄의 이별’ 장면은 ‘지크프리트의 모티프’-‘파국의 예감 모티프’-‘지크프리트의 모티프’로 이어지는, 일종의 리토르넬로(ritornello)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라이트모티프에 의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오케스트라 파트에는 보탄의 권위를 상징하는 ‘창의 모티프’와 그로부터 파생하는 하강하는 음형의 다양한 라이트모티프들이 등장한다.

사무엘 윤, '보탄의 이별' 실황 (출처: 사무엘 윤 홈페이지)

사무엘 윤의 노래는 자연스러운 템포 조절과 리듬 처리에 바탕을 둔 뛰어난 프레이징으로 과연 유럽에서 인정받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의 엉터리 독일어 실력으로 판단하기에 딕션도 썩 좋았던 것 같다. 특히 'der freier als ich, der Gott!'에서 마지막 ‘Gott’의 /t/ 발음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또렷하게 해서 타악기적 효과를 낸 것이 아주 좋았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부분에서 노래의 큰 부분이 일단락된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음반으로 들을 수 있는 최고 기량의 보탄들과 그를 비교하자면 그래도 아직은 부족한 점이 더러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불세출의 보탄인 한스 호터에 비하면 성량이나 저음의 풍성함 등에서 많이 뒤진다고 할 수 있으며, 성량 면에서는 이날 연주에서와 같은 약식 편성이 아닐 때에도 오케스트라에 묻히지 않는 소리를 그가 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Wer meines Speeres ~ Feuer nie!'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성량이 필요할 것이지만, 사무엘 윤은 오케스트라를 크게 압도하지는 못했다. 음색에 있어서는 보탄보다 하겐이 어울릴 것이라는 사람도 있었으나, 내 생각으로는 그의 발성이 충분히 보탄답지 못했을 뿐 원래의 목소리는 보탄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본다.

감정표현에 있어서도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특히 여린 음에서 그러했다. 'Der Augen leuchtendes Paar'에서는 절절한 부성(父性)이 느껴지기는커녕 지나치게 메마른 음색을 들려주었는데, 이는 썩 좋았다고는 할 수 없는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자연스럽게 맞추는 데 실패한 탓에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so kü
ßt er die Gottheit von dir!'에서는 데크레셴도를 거쳐 피아니시모로, ‘Gottheit’에 이르러서는 피아니시시모로까지 여리게 여리게 변하며, 길게 늘어지는 오케스트라 음형과 함께 음악이 일시적으로 정지한 듯한 느낌마저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 윤의 발성은 이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보였다. (오케스트라가 충분히 받쳐주지 못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감정표현을 잘하기 위해서는 음악적 발성을 넘어서는 연극적 발성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오케스트라 파트에 대해서도 기억나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der freier als ich, der Gott!' 이후 피아노에서 포르테로 크레셴도/데크레셴도 되었다가 다시 크게 크레셴도를 이루는 부분, 그리고 보탄의 노래가 끝난 뒤의 오케스트라 후주 등에서 음량 변화의 폭이 너무 좁다고 느꼈다. 또 ‘창의 모티프’가 나올 때 트롬본 소리가 빈약한 것이 크게 아쉬웠다. 이 부분의 오케스트라 총보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바그네리안 회원들과 연주회장 로비에서 만난 김문경씨 등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이 부분의 음향의 밋밋함은 악기 편성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김문경씨는 우스갯소리로 '보탄의 권위가 너무 떨어져 보였다‘고도 하셨다. 또 'so küßt er die Gottheit von dir!'에 이어지는 이분음표 하강 음형이 세 번째 나오는 부분('dir!'에서 시작해서 다섯 번째 마디)에서 하프의 아르페지오가 안 들려서 밋밋하게 느껴졌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하프가 무대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서 하프 소리가 빠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 <트리스탄>을 연주할 때에는 하프 소리가 들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이상한 일이다.


- 사무엘 윤과 김원철. 2004년 11월 14일 일요일.

<파르지팔>은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라 실연으로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나, 한편으로는 이날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무감동한 연주였던 것은 역시 안타까웠다. 부천필 단원들께는 한스 크나퍼츠부쉬의 녹음에 나타나는 호흡 조절을 연구할 것을 권한다. 크나퍼츠부쉬는 개인적인 선호도에서는 뵘이나 카라얀 등에 밀리는 지휘자이지만, 특유의 마취적인 호흡 조절이 최고 수준임은 바그네리안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휴식이 끝난 뒤 이어진 프로그램에서는 훨씬 생동감 있는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썩 만족스러웠다. <탄호이저> 서곡에서는 현악기들이 진정한 위력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지난 3월 30일에 있었던 코리안 심포니의 연주와 비교하자면 코심의 현악기 주자들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999년 7월 15일에 있었던 부천필 연주회 후기들을 보면 그때에는 이 작품의 연주는 별로였던 것 같은데, 미흡했던 부분을 그동안 보강했던 것일까. 다만, 마디 32에서부터 비올라-제2 바이올린-첼로-제1 바이올린-콘트라바스로 연이어 점층되는 셋 잇단 리듬의 크레셴도는 기대만큼의 마취적 효과를 내지는 못했다. 아마도 저음 현을 좀 더 강조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바그너 음향의 근본은 사실 저음 현이 아니던가!) 또 마디 37에서 트롬본과 튜바가 처음으로 등장하여 주선율을 받을 때에는 어택(attack)이 현악기의 리듬과 살짝 어긋난 것이 옥의 티였는데, 이는 지휘자와의 사인이 맞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마디 321에서 바이올린이 단6도 도약 후 순차 하행하는 16분음 리듬은 어딘가 이상했다. 리듬을 작위적으로 변형시켰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나의 귀로는 집에 와서 악보를 다시 보고서도 어떻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악센트 처리는 확실히 어색하게 들렸다. 코다에서는 트롬본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을 내주어 만족스러웠다. 호른도 약간 삐끗하기는 했지만 트롬본의 음량에 잘 맞추어 주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극의 내용을 따지자면 ‘이졸데의 변용’이 더 좋은 이름일 것이지만, 워낙 ‘사랑의 죽음’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이 이날 연주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는 데에는 다들 공감할 것이다. 나는 말러와 가장 큰 공통분모를 가지는 바그너의 작품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라고 생각하는데, 그 때문에 말러에 강한 부천필이 이 작품을 가장 훌륭히 연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단순히 작품에서 현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일까.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저 유명한 ‘트리스탄 코드’와 그로부터 파생하는 반음계적 화성 진행으로 서양음악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수많은 음악학자가 다양한 방법으로 그 화성을 해부했다. 그러나 화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바그너가 추구했던 이른바 '총체예술'에 대한 균형감 있는 접근을 방해하며, 자칫 작품의 본질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드라마’에 대해 소홀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트리스탄 코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프랑스 6화음으로 해석할 경우 그 전타음의 음향적 충격이 가지는 드라마 적 효과라 할 수 있다. 즉 아우프탁트로부터 시작하는 현악기의 긴 크레셴도가 마디 2의 첫 박에서 목관 악기들의 어택(attack)과 함께 최고조에 올랐다가 디미누엔도로 바뀌는 부분에서, 크레셴도의 폭을 그 길이만큼 충분히 키운 다음 목관 악기의 어택을 강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겠다. 심지어 ‘트리스탄 코드’가 세 번째 등장하는 마디 10의 경우 첫 박의 모든 악기에 스포르찬도 표시까지 되어 있다. 이러한 악보의 지시를 세세하게 지키는 녹음들은 의외로 흔하지 않다. 바그너가 듣기 싫으라고 일부러 꼬아 놓은 화성을 최대한 듣기 좋게 하려는 생각을 연주자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연주로 뵘의 녹음을 추천한다.) 부천필의 연주도 이 부분이 만족스럽지 못했으며, 아울러 마디 16에서의 스포르찬도 역시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이후 마디 45까지 템포와 리듬이 불규칙하게 진행될 때에는 그에 따른 멈칫멈칫 하는 듯한 느낌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버렸다. 그러나 마디 47 이후부터 리듬 패턴이 고정되는 경향을 보일 때에는 특유의 춤곡 리듬을 비교적 잘 살렸으며, 이후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긴 호흡의 크레셴도를 느끼게 한 것은 아주 좋았다. (이 작품을 연주할 때 종종 마디 63에서 바이올린의 빠른 상승 음형이 반복될 때에서야 템포를 빨리 하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경우를 보는데, 이는 근시안적인 해석이라 생각한다. 악보에는 마디 63에서 절대 서두르지 말라고 되어 있다.) 클라이맥스에서의 폭발력은 아무래도 약하지 않았나 싶다.


‘사랑의 죽음’에서는 현의 소노리티는 매우 좋았다. 그러나 ‘Heller schallend, mich umwallend, sind es Wellen sanfter Lüfte?’ 이후의 셋 잇단 리듬에 기반을 둔 반음계적 상승 음형이 이어지면서 ‘Sind es Wogen wonniger Düfte?’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긴 호흡의 크레셴도가 시작될 때, 그 음량 변화의 폭이 작품의 지독한 파토스를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좁았던 것이 크게 아쉬웠다. 그래서 평소에 음반으로 들을 때에는 ‘In dem wogenden Schwall, in dem tönenden Schall, in des Weltatems wehendem All’에 이르렀을 때 강렬한 전율을 느끼곤 하지만, 부천필의 연주에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는 없었다. 이후 조명이 점차 어두워지도록 하는 연출은 아주 좋았다.

앙코르로는 전반부에 연주했던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을 다시 한 번 연주했다. 1부에서보다 훨씬 뛰어난 연주였으며, 특히 트롬본이 더욱 힘을 내주어 매우 좋았다.

오랜만에 바그너의 음악을 실연으로 들을 수 있어서 몹시 흥분했다. 써놓고 보니 불평이 많지만 전반적으로 부천필이 들려준 연주의 완성도는 높았다. 새삼 느끼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바그너가 된다. 그러나 연주만 잘 될 것이 아니라 ‘장사’ 또한 말러 못지않게 잘 되었으면 좋겠다. 바그너의 인기가 날로 더해서 코심을 비롯한 국내 오케스트라들이 바그너로 부천필과 연주력 경쟁을 하게 될 때를 상상해 본다.

젠타의 희생과

엘리사벳의 기도,
이졸데의 사랑을 기억하사,
지크프리트의 힘,
파르지팔의 극기와 구원,
로엔그린의 기적이
바그너 신도들에게 늘 함께하기를

위대한 성배의 이름으로!

2004년 11월 14일 일요일 씀.
 




2004년 12월 31일 추가함:

(유럽에서 지휘를 공부한다고 밝히신 어느 분께서, 독일에서 보니 사무엘 윤이 대단하던데 저의 평이 기대에 못미쳐 유감이라는 요지의 글을 12월 30일에 제 홈페이지에 올려주셨습니다. 다음은 그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저의 보잘것없는 글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았더니 사무엘 윤에 관한 부분에서 나타나는 전체적인 논조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인상과는 많이 다르군요. 원래의 의도와 달리 혹평처럼 되어 버린 사실을 알고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제 딴에는 '옥의 티'랍시고 써 놓았던 내용이 두 문단인 반면 칭찬은 한 문단에 그쳤으니 분량상으로도 혹평이 되었군요. 그리고 '옥의 티'마저도 대부분 사무엘 윤 본인 탓이라기보다는 오케스트라가 충분히 받쳐 주지 못한 탓이라는--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고작 이틀 맞춰 보고 무대에 올린 것입니다. 한국이니까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도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그 정도나마 연주해낸 것도 부천필과 임헌정 선생님의 역량이 대단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생각을 감상문을 쓰고 난 뒤에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역량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므로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님께서는 제 글을 비평문으로 받아들이셨고 실제로 글이 비평문의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비평문이 아닌 감상문이라 여깁니다. 솔직한 생각을 말하자면 우리나라에 비평문다운 비평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나마 최근에 비평가에 근접한 능력을 가진 분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지요. 저의 능력은 거기에도 한참 못 미침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연극적 발성'이라는 표현은 '발성'이라는 말 때문에 오해를 산 것 같습니다. 원래의 표현은 '음악적 발성을 넘어서는 연극적 발성'이었습니다. 이는 음악 외적인 부분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냥 '연기'라는 뜻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윤태현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서 들은 말씀도 있습니다만, 본인 스스로 이 부분에 대해 잘 이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사실 저는 귀에 들린 것만으로 판단했습니다만, 곰곰이 따져 보면 제가 아쉽게 느꼈던 부분은 거의 100% 오케스트라 탓입니다. 오케스트라가 가수의 목소리를 살리기는커녕 사무엘 윤이 오케스트라에 끌려가는 형국이었죠. 특히 그 템포에서 '목소리 연기'고 뭐고 신경 쓸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유럽에 계신다 하시니 그날 연주회가 어땠는지 잘 모르시겠군요. 'Der Augen leuchtendes Paar' 부터 좀 황당했습니다. 특히 템포가 음악적 맥락에 어울리지 않게 비정상적으로 빨랐지요. 태현님 말씀으로는 연습 때에는 더 심하게 빨랐던 것이 그나마 나아진 것이라 합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사무엘 윤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는 대단한 호평을 들었음에도 저처럼 이미 그 능력을 알고서 주목하고 있던 사람들의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던 연주였습니다. 중간에 실수도 좀 있었고요. 태현님 본인으로서도 그다지 만족스러워 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량 문제는, 일단 한스 호터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불세출의 보탄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각인된 가수가 한스 호터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윤태현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은 바도 있습니다만, 한스 호터는 태현님께서 추구해야 할 목소리와는 다릅니다. 호터에 대해 사무엘 윤의 장점을 잣대로 해서 악평을 하자면, 발음도 엉망이고 쓸데없이 루바토를 남발하면서 고함만 박박 지르는 목소리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면 사무엘 윤은 치밀하게 계산된 발성과 딕션을 바탕으로 정갈하고 담백한 노래를 할 수 있는 가수라 생각합니다. 이는 국내 성악가들의 전반적인 특징을 생각하면 너무나 귀한 재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가는 성악을 공부하면서 모차르트를 심도 있게 공부했다는 태현님의 말씀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성악가들, 너무 베르디나 푸치니에 목매지 말고 모차르트부터 확실하게 했으면 합니다!

한편, 저의 견해로는 연주회 당일 사무엘 윤의 목소리가 오케스트라를 압도하지 못했던 것은--오케스트라에 묻혔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렷이 들릴 만큼은 컸으나 말 그대로 압도하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요술의 전당' 콘서트 홀의 음향 특성 탓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거기서 가수들이 압도적인 소리를 내는 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있기는 있군요. 지난 3월에 귀네스 존스가 와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갔습니다. 그 나이에 그런 괴물 같은 목소리라니 도대체가...) 또한 님께서도 지적하셨다시피 연주회장에서 들었던 것을 레코딩과 단순 비교하는 것도 부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비교를 하려면 같은 음향 환경에서 해야 충분한 타당성을 얻을 수 있지요. 아, 그런데 톰린슨이나 타이투스 같은 사람보다 목소리가 더 크다니 매우 기쁘군요. 정교한 발성이 파워풀하기까지 하다면 그야말로 사무엘 윤은 조만간에 경쟁자를 찾아보기 힘든 거물이 되시리라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

뜻하지 않게 혹평을 쓰게 된 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사무엘 윤이 최고의 바그너 가수라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보탄 역을 거머쥘 것이라 믿습니다. 제 홈페이지의 "Links" 메뉴에서 사무엘 윤 홈페이지에 대한 소개말을 보세요. '바이로이트의 떠오르는 별!'입니다, 하하. 그리고 '바그너 불모지'에 가까운 한국에서 사무엘 윤처럼 신경 써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바그너 애호가로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무엘 윤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손해를 보는 일이지 득을 보는 일은 아닐 겁니다. 게다가 바그너를 연주하려면 저처럼 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소리 하지 않을까 신경도 써야 되고요. ^^ 님께서 반대하지 않으신다면 이 글은 며칠 뒤 고클에도 올리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클에 올린 글을 보았을 테니, 지금이라도 혹평이 되어버린 내용을 바로잡지 않으면 사무엘 윤에게 부당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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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4.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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