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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13일 월요일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6)

지난 글 읽기: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1)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2)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3)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4)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5)



화성법이라는 '밑밥'과 고전주의 양식이라는 '떡밥'과 근대적인 악기 체계까지 자리 잡아 가던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귀족 중심 음악 문화가 자리 잡고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음악회마저 싹트던 때에도 정작 프랑스 파리에서는 음악회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 런던의 음악회는 이런 배경에서 발전했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정부와 귀족이 이런 관계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 왕실은 귀족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모든 예술 제도를 통제하였다. 오페라와 출판 분야에서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통제가 상당히 약화되지만, 음악회 쪽에는 변화가 없었다. 귀족들이 자신의 저택에서 음악가의 공연을 후원하기도 했지만, 런던에서처럼 공공 음악회 제도 안에서 후원 활동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243-4쪽)

18세기 후반 동안 소수의 직업 음악가들이 음악회를 열었지만, 정부는 그 수를 철저히 제한했다. 오페라를 보호하고 독립적인 음악계가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정부가 이렇게 규제하지 않았다면, 파리는 런던만큼 음악회가 활발했을 것이다. (243쪽)

- 이경희, "18-19세기 공공 음악회의 발전 과정: 파리, 런던, 비엔나를 중심으로."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5), 제8권, pp.241-263.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을 앞두고 프리메이슨이 앞장서서 프랑스에 음악회를 퍼트리려 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증거가 있다.

1769년 초 고섹(Gossec)이 창립한 '아마추어 음악회'(Concert des Amateurs)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것은 정기회원 기부자를 중심으로 한 기부 음악회였다. (...) 음악회는 대성공이었고 1781년까지 12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경희, 243쪽)

고섹(François-Joseph Gossec, 1734-1829)은 프리메이슨 ☞ 'Grand Orient de Belgique' 지부 회원이었으며 프랑스 혁명기를 주름잡은 작곡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별 주저없이 프랑스 혁명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프랑스와 조제프 고섹을 꼽을 것이다. 특별히 혁명의 불길이 거세게 번지고 있었던 1789년부터 1794년 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아무도 그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고섹의 위치는 확고했다. 흔히 그의 경쟁자로 지목되는 메율(Méhul)이나 르 쉬에(Le Sueur), 케루비니의 활동도 집정내각 시대에만 겨우 그와 겨룰 수 있을 뿐이다. (59쪽)

그는 음악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음색의 선택에 있어 매우 확실한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대중의 음악수준을 올려놓기에 적당한 그의 음악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선율은 딱딱하지 않으면서 절제되어 있고, 화성은 명확하고, 악기의 관용적인 처리는 항상 매우 정확하다. (60쪽)

- 민은기, "프랑스 대혁명의 음악사적 의의."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1997), 제2권, pp.33-85.

고섹 - 공화국의 승리(Le Triomphe de la République) 서곡 (c) Chandos

'아마추어 음악회'는 미국 독립전쟁을 맞아 돈 때문에 중단되었다. (미국과 프리메이슨이 어떤 관계인지는 ☞머리말에 있는 파토님 글 참고.) 그러나 음악회는 곧이어 프리메이슨 지부 이름을 딴 음악회로 되살아난다. 정황을 보아 음악회 후원자가 다른 프리메이슨 지부로 바뀌면서 좀 더 시민 중심으로 거듭난 듯하다.

'아마추어 음악회'가 중단된 지 얼마 안 되어, '올림픽 지부 음악회(Concert de la Loge Olympique)'가 시작되었다. 올림픽 지부 음악회의 모든 회원들은 프리메이슨 지부에 가입해야 했고, 입회는 기존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 1785년에는 남자 300명과 여자 102명이 회원이었고 점점 숫자가 증가했다. 회원의 출신 성분도 귀족에 한정되지 않았고, 은행가, 의사, 출판업자 등이 가입했고, 협력회원으로는 메훌(Méhul), 필리도르(Philidor)와 같은 음악가들도 있었다.

- James H. Johnson, Listening in Paris. A Cultural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p. 74. 재인용: 이경희, 243쪽.

프랑스 혁명기에 고섹의 경쟁자였다는 메율(Méhul)도 프리메이슨이었단다.

'올림픽 지부 음악회'를 만들고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던 사람은 고섹의 제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조제프 생조르주(Joseph Saint-George, 1745-1799)이다(Saint-Georges, Joseph Bologne,Chevalier de, NGD2). 생조르주는 이 음악회를 띄우려고 빈으로 가서 하이든에게 교향곡을 의뢰했으며(82, 84, 90, 91번)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이든도 프리메이슨이었는데 이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겠다.


생조르주는 흑인이어서 '검은 모차르트 Le Mozart noir'라 불렸단다.

다음 시간부터는 프리메이슨 음악가를 하나하나 알아보자.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5)

지난 글 읽기: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1)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2)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3)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4)



다시 프랑스 대혁명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때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노래가 오늘날 언론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말 기억하시는가? 혁명이 일어날 동안 노래는 어디에서나 들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노래가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곳은 아마도 광장일 터, 이때 흥을 돋우려면 악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프리메이슨이 혁명을 '기획'했다면, 그 얼개가 처음 마련되었을 1717년 즈음 악기는 어땠을까? 앞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어보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칸타타 BWV 80.
"내 주는 강한 성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조지 프리드릭 헨델, 샨도스 성가(Chandos Anthem) 제8번,
"와서 주님께 노래하자 O come, let us sing unto the Lord"

동영상에서 연주한 악기가 곡이 쓰였을 때 악기를 올바로 고증했는가 하는 문제를 제쳐놓더라도 저런 소리로 광장에서 혁명을 노래할 수는 없다.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빠졌거나 제 몫을 하지 못해서 기본적인 '음량'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에서의 하나의 혁명이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해 일어났다. 바로 오케스트라에 금관악기가 첨가되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관악기는 그 선명한 음색과 거대한 음량 덕분에 혁명기 가장 중요한 국가 행사였던 야외 축제에서 연주하기에 적당했다. 물론 대부분의 야외 축제 연주는 군악대 편성으로 (...) 무엇보다 혁명기의 야외축제가 오케스트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금관악기의 위상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혁명이전에는 간단한 군악대용 악기로 취급되던 금관악기는 혁명기의 대대적인 야외축제를 통해 그 음악적 표현 능력을 인정받았다. (...) 이 시기에 관악기 자체의 성능이 놀랍게 좋아진 것을 더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55-6쪽)

- 민은기, "프랑스 대혁명의 음악사적 의의."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1997), 제2권, pp.33-85.

악기는 옛날부터 꾸준히 변화 또는 발전해 왔으며, 표준 오케스트라 악기 체계가 뿌리내리려는 움직임은 대략 17세기 즈음부터 있었다.

그러면 과연 어떤 과정과 함께 바로크 시대의 혼합편성 오케스트라는 표준편성으로 넘어갔을까? 이러한 과정은 우선 오페라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수 계층을 대상으로 하던 초기 오페라는 베네치아를 거쳐 점차적으로 '대중화' 됨과 동시에 이태리를 벗어나 전 유럽에 확산된다. 유럽의 주요 도시 곳곳에는 곧 오페라 극장이 생겨났고 이 곳에서는 자국인의 작품 외에도 대량의 이태리 오페라 작품이 공연된다. 이러한 현상, 즉 작품들이 서로 교환되고 공연됨에 따라 오페라의 반주를 담당하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통일된 편성이 점점 더 필요시 되었던 것은 자유스러운 결과였다 할 수 있다. 즉 오페라의 특정 지역을 초월한 국제적 확산은 초창기 몬테베르디가 요구하였던 다양한 악기편성에 따른 비현실성에서 벗어나 점점 더 표준적 편성으로 자리잡아 가게 된다. 물론 원래부터 이 편성을 기준으로 작곡도 되었지만, 설사 다른 편성을 토대로 하는 작품일지라 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현실성에 맞게 악기를 바꿔 공연하는 것도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풍토였다. (123쪽)

- 연상춘, "바로크 오케스트라에서 고전 오케스트라로."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1999), 제2권, pp.115-135.

그러나 근대적인 오케스트라 악기 체계가 자리를 굳힌 때는 18세기 즈음이었으며, 이와 함께 악기가 '혁명적으로' 개량되었다.

18세기는 악기 제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피아노-포르테의 탄생과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개량은 작곡가와 연주가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또한 오케스트라 규모의 확대로 작곡가들은 더욱 다양한 음색을 자유롭게 표현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민은기, 55쪽)

또 18세기 중반 터키(오스만 튀르크)가 유럽을 침공하면서 타악기가 유럽에 수입되고 터키 음악이 유행하기도 했다.

터키 행진곡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지 싶은,
베토벤 교향곡 9번 (1824년 초연) 4악장 가운데 "alla Marcia"
유튜브에 요 대목만 딴 오케스트라 연주가 없어서 만돌린 독주를 올린다. -_-;

이 전쟁을 프리메이슨이 부추기지 않았을까를 의심할 수도 있겠으나 휴머니즘을 앞세운 단체가 이런 짓까지 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이 타악기 수입에 관여했을 수는 있겠고 관악기 개량에도 앞장섰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당시 악기 제작자를 아무리 캐 봐도 도무지 증거가 없다. 김원철이 염력으로 '뷔뷔뷔' 해보면 이 사람들 모조리 프리메이슨 맞는데 물증이 없으니 이거슨 음모가 틀림 엄따!


...응? 곱게 미치라고? 알았다. -_-;

사실은 하나 찾은 게 있기는 한데, 관악기가 아니라 현악기다.

첼로가 표현력을 지닌 독주악기가 된 데에는 연주 테크닉의 개발로 악기의 기량을 충분히 드러내 줄 수 있게 해 주었던 뒤포르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빠리 국립음악원에서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훌륭한 첼로 연주자들을 길러냈을 뿐만아니라, 1815년에 출판된 <첼로의 운지법과 활의 사용법 Sur le doigté du violoncelle et sur la conduite de l'archet>이라는 논문에서 새로운 첼로 연주 테크닉을 소개하였다. (민은기, 56쪽)

뒤포르(Jean-Louis Duport, 1749-1819)는 후원자였던 Baron de Bagge(바그 남작?)과 더불어 프리메이슨이었단다(Jean-Louis Duport, NGD2). 바이올린 발전에 이바지했던 슈포어(Louis Spohr, 1784-1859) 또한 프리메이슨이었으나 이 양반은 프랑스 대혁명과는 시기가 안 맞는다.

이번 시간에는 헛소리가 많았다. 다음 시간에는 프랑스 대혁명을 앞두고 프리메이슨이 '본색'을 드러내던 정황을 살펴보겠다. 이건 증거가 제법 많고 구체적이다.


다음 글 읽기: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6)

2009년 7월 4일 토요일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4)

지난 글 읽기: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1)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2)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3)



그런데 중앙집권 국가인 프랑스나 영국보다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쪽이 귀족 중심 음악 문화가 뿌리내리기에 더욱 좋은 곳이었다. 이 사실은 서양음악의 중심지가 프랑스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옮겨가게 되는 원인이 된다. 고전주의 성립에 이바지함으로써 18세기 음악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도시는 어디일까?


▶ 만하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b/b2/Mannheim_in_Germany.png

만하임이 초기 고전주의 중심으로 떠오른 바탕에는 프리메이슨이 있었다...라고 주장하고 싶으나 증거가 없고, 카를 필리프(Karl III Philipp) 선제후(통치기간: 1716-1742)와 그 뒤를 이은 카를 테오도르(Karl Theodor) 선제후(통치기간: 1742-1778)가 이바지한 바가 가장 크다. 선제후(選帝侯, 라틴어: Princeps Elector; 독일어: Kurfürst)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뽑는 선거인단이란다. (음... 선거인단이라니 쌀국의 '고전적인' 선거제도가 바로 신성로마제국 시스템었구나.)

카를 필리프 선제후는 만하임에 정치·외교·경제적 주춧돌을 쌓은 사람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이른바 '만하임 악파 (Mannheim School)'를 꽃피운 사람이 바로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다.


1742년 칼 필립의 사망 후 젊은 칼 테오도르는 수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처음에는 개혁과 긴축정책을 편다. 그의 긴축정책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의 성대한 결혼식과, 칼 필립의 장례식 그리고 집권하는 과정에서의 많은 경비 지출과 새 오페라하우스를 건축하는 등의 지출이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의 긴축정책 중에는 음악가 수의 감축도 포함되었다. 짧은 긴축정책 이후 칼 테오도르는 상공업을 다시 육성하고, 예술과 학문등을 지원하여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 칼 테오도르는 만하임 궁정의 음악관련 분야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만하임 오케스트라를 당대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성장하게 하였으며, 유럽 각지에서 뛰어난 음악가들이 모여, 만하임은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음악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여름철에는 만하임의 근교에 있는 슈베칭엔(Schwetzingen)의 여름궁전에 머물렀다. 이곳으로 수 많은 예술가, 시인, 그리고 철학자들이 찾아왔다. (330쪽)

- 이성률, "만하임 칼 테오도르(Karl Theodor) 선제후의 예술지원사업."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7), 제13권, pp.325-343.


슈베칭엔 궁전. GNU-FDL by Erdie.
해마다 여름이면 여기서 '슈베칭엔 페스티벌'이 열린다.
페스티벌 홈페이지: http://www.swr.de/swr2/schwetzinger-festspiele/

만하임은 음악가들에게 봉급을 매우 넉넉하게 주기로 이름이 높아서 1777년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모차르트가 만하임에 가보고는 그리로 일터를 옮기도록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설득하려고도 했단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자신의 아들 폴프강과의 편지 왕래를 통해 만하임 기법사용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당시 볼프강은 만하임에서 새로운 직장을 얻기를 원한 반면 레오폴트는 볼프강이 파리와 같은 대도시에서 오페라로 큰 명성을 얻기를 원하였다. 결국 파리에서 마리아 안나는 병으로 사망하였고 볼프강은 다시 살츠부르크로 되돌아 간다. (이성률, 338쪽)

만하임 악파는 셈여림을 음악에 효과적으로 쓰고('만하임 크레셴도') 교향곡 3악장에 미뉴에트를 두어 4악장 얼개를 굳히는 등 고전주의 양식이 싹트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1757),
신포니아 "La melodía germánica" 3번 1악장

그밖에 이름난 만하임 음악가는 다음과 같다.

알레산드로 토에스키(Alessandro Toeschi, ca. 1700-1758)
카를 그루아(Carl Grua, ca. 1700-1773)
크리스티안 카나비히(Christian Cannabich, 1731-1798)
이그나츠 홀츠바우어(Ignaz Holzbauer, 1711-1783)
프란츠 자버 리히터(Franz Xaver Richter, 1709-1789)
카를 슈타미츠(Carl Stamitz, 1745-1801)
안톤 슈타미츠(Anton Stamitz, 1750-?1796)
프란츠 이그나츠 베크(Franz Ignaz Beck, 1734-1809)

만하임의 영광은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에게 '변고(?)'가 생기면서 갑작스럽게 막을 내린다.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가 바이에른 주를 상속받아 뮌헨으로 궁정을 옮겨버린 까닭이다.



▶ 슈투트가르트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6/Karte_Stuttgart_in_Deutschland.png

18세기 중엽 샤를르 유진(Charles Eugene, 1793년 사망) 공작이 통치했던 뷔르템베르크(Würtemberg) 공국은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중요성이 없는 작은 궁정이었지만 특히 1753년에서 1769년까지 음악적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다. 공국의 수도였던 슈투트가르트와 루드비히스부르크(Ludwigsburg)의 궁정 극장에서 오페라가 집중적으로 공연되었다. 유진 공작은 1744년에 완전히 권력을 잡으면서 화려한 궁정극장을 짓기 시작했다. (145-6쪽)

- 이경희, "근대 유럽 궁정의 음악 양상과 역할."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6), 제10권, pp.139-165.

이른바 '듣보잡' 공국이 낭비를 한 덕분에 음악이 꽃핀 사례다. 만하임과 가까워서 '뽐뿌'를 많이 받았나 보다. 그러나 그다지 오래 못 가고 1764년 즈음부터 시들어 갔단다. 니콜로 욤멜리(Niccolò Jommelli, 1714-1774)가 카펠마이스터(궁정악장)로 있었다.

그런데 그로브 사전(NGD2)이나 위키피디아에는 Karl Eugen이라고 나온다. 샤를르 유진이 아니라 카를 오이겐 아닌가?

※ 음악가 연봉 비교

홀츠바우어(만하임) : 1500 굴덴 (1759년)
욤멜리(슈투트가르트) : 4000 굴덴
모차르트(잘츠부르크) : 450 굴덴 (1779년)
레오폴트 모차르트 (잘츠부르크) : 350 굴덴 (1779년)

- 이성률, 338-9쪽

모차르트 떡실신



▶ 드레스덴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8/Karte_Dresden_in_Deutschland.png

한편, 18세기 전반 가장 화려한 음악적 위용을 자랑했던 곳은 작센 공국의 드레스덴 궁정이었다. 음악은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1773-63 재위)의 주된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부인인 조세파(Maria Josepha)도 마찬가지여서 사적 연주회를 자신의 거처에서 거의 매일 저녁 열었다. 1747년 작센과 바이에른 공국 간의 겹혼사가 결정되었다.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요세프 선제후와 작센의 공주 마리아 안나, 그리고 바이에른의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와 작센의 왕세자 프레데릭 크리스찬과의 결혼식이 드레스덴 궁정에서 열렸다. 축제는 거의 한달이 지속되었다. 궁정극장에서 하쎄의 오페라가 공연되었고, 다른 극장에서도 드레스덴 시민들을 위한 공연이 벌어졌다. 여러 작곡가들의 오페라와 파스토랄이 지역 축제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이경희, 143쪽)

드레스덴 음악은 1756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가 쳐들어오면서 시들어 갔다.


하세(Johann Adolf Hasse, 1699-1783), g 단조 협주곡



▶ 베를린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e/Germany_Laender_Berlin.png

이제 다시 프리메이슨 얘기를 해보자.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음악이 돌아가게 하려고 그 중간 단계로 군소 귀족을 중심에 세우려면 먼저 전제군주 곁에 있는 솜씨 좋은 음악가들을 군소 귀족 곁으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전제군주를 움직이려고 프리메이슨이 몰래 간직한 지식(머리글 참고)을 내놓기에는 너무 위험했으리라. 그렇다면 전제군주를 낚을 떡밥으로 무엇이 좋을까? 바로 계몽주의의 '전제군주 판본'인 '계몽절대주의'다.

 계몽절대주의(Enlightened absolutism)는 18세기의 절대주의로, 특히 동유럽의 절대주의는 계몽적 전제정치로서 특징지어진다.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프레더리크 2세),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마리아 테레사)와 요제프 2세, 러시아예카테리나 2세의 통치는 그 전형이라 하며, 그들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개명적(開明的)인 사회 개혁을 실시하고 정치·경제의 근대화를 수행하여 강력한 근대 국가 건설을 기도했다.

그와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은 봉건적 여러 관계가 강하게 남아서 자본주의의 발달이 미숙한 동유럽 여러 나라가 서유럽의 선진국에 대항할 필요에서 실시된 것이었다. 따라서 봉건 귀족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의 증대를 꾀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으며, 개혁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 본질적으로는 절대주의임에 변함이 없었다.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의 황폐 속에서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확대를 개시하였고, 18세기에는 계몽적 전제정치 아래 강화된 양국이 독일의 지도권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융커의 나라인 프로이센은 그 성격을 최대한으로 살려서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로 발전하였으며, 프리드리히 2세 통치시대에 두 번이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강국의 지위를 확립했다. 18세기 후반 3회에 걸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더욱더 강대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국내에 많은 이민족(異民族)이 있어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2세에 의한 개혁도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하여, 차차 독일 통일을 지도하는 입장을 잃기 시작했다. 본 문서에는 다음 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이에 준하는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위키피디아

 
18세기 오스트리아·독일 문화권에서의 궁정문화가 지니는 또 다른 특징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제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중 식의 궁정문화가 아니라 다수의 귀족들 소유의 크고 작은 궁정으로 분산·이전, 즉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개별 형태로서 행하여지는 특이한 양상에서 확인된다. 이것은 제왕이 주도하던 중앙 궁정들이 '계몽주의' 정신의 영향 아래 실리 추구와 긴축 재정을 위해 문화적 주도 역할을 '포기' 내지는 '축소'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18세기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황실, 독일 베를린의 프로이센 궁정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285쪽)

- 연상춘, "18세기의 음악후원문화 : 고전시기 비엔나 귀족들의 음악후원문화 연구."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7), 제13권, pp.283-302.

http://fs.textcube.com/blog/0/2070/attach/XTPangGnKA.jpg
베를린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제 동상. CopyLeft by 김원철.

(그런데 계몽절대주의와 긴축정책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원철도 저 두 글을 나란히 보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검색해 봐도 잘 안 나오던데 뭘 좀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만하임에 있던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 같은 사람도 때로는 계몽전제군주로 분류하는 모양이고, 위에 인용한 글에 있다시피 실제로 즉위하고 나서 얼마까지는 긴축정책을 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제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견주면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는 그냥 음악 애호가였을 뿐이라 하겠다.

그런데 전제군주 곁에 있는 음악가가 줄었다면 남은 사람은 그만큼 솜씨가 좋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음악가들이 이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다. 다만,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전제군주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곁에 있는 다른 음악가보다 푸대접을 받기도 했는데, 프리드리히 대제 곁에 있었던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그랬다.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1740년부터 1768년까지 약 28년간 쳄발리스트의 직무를 수행한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는 당대의 "대(大) 바흐"로서 서양음악의 역사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의 '구세계'로부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신세계'로 움직여나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작곡가였다. 물론 여러 문헌들에서 거듭 확인해주는 바와 같이, 또 부드럽고 겸손한 표현을 빌려 자인하는 바와 같이, 프리드리히 2세 궁정의 '일개(一介) 쳄발리스트'였던 그가 그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일개 쳄발리스트'는 당시 이미 고유의 '전고전주의적' 음악양식의 틀을 구축, 발전시켰으며, 궁정 밖에서는 '질풍노도'(Sturm un Drang)와 '천재미학'을 출발시킨 미래지향적 예술가 그룹의 일원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굳힌 터였다. (125-6쪽)

- 나주리, "북독일의 "전고전주의":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음악과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클라비어 음악."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9), 제20권, pp.125-147.


C. P. E. 바흐, 뷔르템베르크 소나타 1번 A 단조 3악장.

(뷔르템베르크 '카를 오이겐' 공작을 가르칠 때 작곡했다는데 (뷔르템베르크에서 일했다는 기록은 없으니 라이프치히에서 유학할 때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출판은 1744년 베를린 시절에 했다. 프로이센 소나타도 있으나 유튜브에 마음에 드는 동영상이 없더라.)

나중에 붙임: C. P. E. 바흐 동생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공인된 프리메이슨이었다. 아마도 형인 C. P. E. 바흐도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 빈(Wien)


위에서 쓴 바와 같이 빈에도 계몽전제군주가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여제다. 공식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프란츠 1세의 황후였으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권을 거머쥐고 있어서 보통 '여제'라고 부른다. 신성로마제국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여대공,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여왕, 보헤미아의 여왕, 파르마 여공이기도 했으며, 1740년부터 오스트리아 여대공이 되면서 줄줄이 감투를 따냈단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전통적으로 음악가들을 넉넉히 지원해 왔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프리드리히 대제와 마찬가지로 긴축정책을 펼치며 궁정악단을 줄인다. 그리고 그 음악가들을 빈에 가득 모여 있던 수많은 귀족과 부르주아가 빨아들인다.

당시 비엔나에 왜 그렇게 많은 귀족들이 모여 살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황제가 거주하는 도시라는 자체만으로도 그중 한 이유는 충분히 명명될 수 있다. 확실히 비엔나는 타 지역의 귀족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 주변에 거주지를 갖고 머무른다는 사실은 물론 자신의 영향력 확보에 있어서도 중요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오스트리아 령이서의 보직 분배 시에도 전제되는 사항이었다. 아울러서 경제적 이점 또한 당연히 있었다. 귀족들이 이렇게 고위 공무원 내지는 군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것은 17-19세기가 가지는 특징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거주지를 가지며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은 비단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 자손 세대를 위해서도 일종의 보장책이나 마찬가지였다.
- Volkmar Brunbehrens, 재인용: 연상춘, 292쪽.

바로 이 분위기에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고전주의 음악 양식을 꽃피운다. 이 사람들 얘기는 나중에 더 알아보기로 하고, 그보다 눈여겨볼 곳은 이때 화성법을 바탕으로 하는 '쉬운' 작품이 쏟아지면서 프리메이슨이 바라던 '떡밥'이 얼추 완성되어 갔다는 대목이다.

디터스도르프는 그로스바르다인 궁정악장 시절에 그가 섬기던 주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연주회를 위하여, 다시 말해 하루 밤을 위한 연주회를 위하여 (!) 대규모 합창을 포함하는 칸타타, 솔로 칸타타, 대규모 교향곡 2곡, 중간규모 교향곡 1곡,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였던 적도 있었다.
- 에두아르드 한슬리크, 재인용: 연상춘. 295쪽.

마찬가지로 이와 병행해서 새로이 자리를 잡아가던 오케스트라 문화 역시 아직까지는 시민계급 출신의 직업음악가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비전공자 내지는 음악애호가들을 공동 구성원으로 하여 형성되는 것이었으며, 이때 이들 비전공 오케스트라 구성원들 대부분은 귀족계층이 주를 이루는 추세였다.
- 카를 달하우스, 재인용: 연상춘, 284쪽.

당시의 귀족들은 자신의 의뢰로 생겨난 작품들에 대한 독점적 소유 욕구, 즉 외부로의 공개를 거부하고 자신만 소유하려는 경향 역시 빈번하였다. 예를 들어 가스만(Florian Gaßmann, 1729-1774)의 음악게 깊이 감동하였던 디트리히슈타인 백작(Johann Baptist Dietrichstein, 1728-1808)은 교향곡들과 현악4중주곡들 작곡을 의뢰하였고 이에 대한 사례를 충분히 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충분한 사례의 조건으로 어느 곡도 외부로 공개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음악을 접해보고 싶은 황제 요제프 2세의 반복된 요청마저도 가스만은 따를 수가 없었다. 급기야 그의 사망 이후 이 작품들을 인쇄하자는 황제의 제의마저도 디트리히슈타인 백작은 거절할 정도였다.
- 에두아르드 한슬리크, 재인용: 연상춘. 296쪽.

이제 마지막 안배가 남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다음 시간에 알아보기로 하자.

붙임.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이거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쓰려니까 헷갈리네요. 인용문에서 '칼 필립 엠마누엘'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일일이 고치려니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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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5)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6)

2009년 7월 3일 금요일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3)

머리말에서 프리메이슨이 프랑스 대혁명을 '기획'했다는 주장을 소개한 바 있다. 또 지난 시간에는 라모가 세운 근대 화성 이론이 프리메이슨의 '기획'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생각이 안 나시면 다시 읽어보시라.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1)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2)



화성법이라는 '밑밥'이 마련되었으니 본격적으로 '떡밥'을 만들 차례다. 다시 말해 화성법을 바탕으로 하는 '쉬운' 작품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냥 내버려두기보다는 그 시기를 앞당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정과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던 음악이 시민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갑자기 일어나기는 어려우니 그 중간 단계로 귀족이 중심이 되는 음악 문화를 만들어내는 게 좋겠다.

실제로 이런 일이 마치 짜맞춘 듯 착착 일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에 짜맞춘 논리일 뿐이며 여기에 프리메이슨이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프리메이슨이 에스테르하지(Esterházy) 가문을 끌어들인 뒤부터는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이때 이런 말이 필요하다. "아님 말고!"
초상권을 생각해서 김원철이 발로-_- 편집했음. 누군지 모르겠지? ㅡ,.ㅡa

어쨌거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이른바 '갈랑(Fr. Galant; It. Galante)' 양식 또는 '로코코 양식'이 나타나 퍼져 나간다.

자크 뒤플리(Jacques Duphly, 1715-1789) - La De Drummond

악보에서 왼손이 '라미도미 라미도미' 꼴로 죽 이어지는 음형이 바로 알베르티 베이스이다. 알베르티(Domenico Alberti, 1710-1746)는 갈랑 양식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나 유튜브에 마음에 드는 동영상이 없더라.


알베르티 베이스를 설명할 때 반드시 나오는 바로 이 곡,
모차르트 C 장조 소나타 K.545 1악장. 본격적인 고전주의 양식이다.


갈루피(Baldassare Galuppi, 1706-1785) A 단조 소나타

이밖에 레오나르도 빈치(Leonardo Vinci, ?1696-1730. '다빈치'가 아님에 주의),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 하세(Johann Adolf Hasse, 1699-1783), 삼마르티니(Giovanni Battista Sammartini, 1700-1775) 등이 대표적이며, 작곡가이자 이론가였던 마테존(Johann Mattheson, 1681-1764)과 크라우제(Christian Gottfried Krause, 1719-1770)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요한 마테존. 이 양반 프리메이슨이지 싶은데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작곡가이기도 한 그 루소다.
이 양반은 아무리 봐도 프리메이슨 아닐 리 없는데 마찬가지로 물증이 없다.

18세기 중반부터는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표현 양식' 또는 '감정 과다 양식' (Empfindsamer Stil)이 나타났는데,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 J. S. 바흐의 아들), 크반츠(Johann Joachim Quantz, 1697-1773), 그라운 형제(J. G. Graun, 1703-1771, C. H. Graun, 1704-1759))가 대표적이다.

갈랑 양식은 일차적으로 군주와 귀족을 위한 것이었고, 그들에게 음악은 즐거움을 제공하는 수단이었기에 깊은 내면을 움직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중산계급으로 그 향유 층이 확대되어가면서 갈랑 양식은 주관적인 감정을 충족시키고 표현하는데 적합한 양식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측정할 수 없이 솟아 오른 감정의 내적 분출을 음악을 통해 표현하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시민적 표현 양식"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그러나 갈랑 양식으로부터 표현적인 감정과다 양식으로의 변화는 뚜렷한 분기점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98쪽)

- 이경희, "18세기 후반 독일 감정과다주의 (Empfindsamkeit)."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1999), 제4권, pp.89-109.

그런데 중앙집권 국가인 프랑스나 영국보다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쪽이 귀족 중심 음악 문화가 뿌리내리기에 더욱 좋은 곳이었다. 이 사실은 서양음악의 중심지가 프랑스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옮겨가게 되는 원인이 된다. 고전주의 성립에 이바지하여 18세기 음악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도시는 어디일까?

... 다음 시간에 알아보자. 더운데 글 쓰려니까 힘들다. C=C=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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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4)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5)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6)

2009년 6월 27일 토요일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1)

김원철의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은 18세기 서양음악사를 중심으로 하는 음모론이다. 그러나 그 뿌리가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황을 포착하여 열심히 파 봤다. 12세기 음악과 음모론을 엮을 만한 키워드는 당연히 '템플러'다.


스타크래프트에도 나오는 이넘은 짝퉁으로 원래 템플러는 실존했던 기사단(또는 수도회) 이름이다.

파토님 글에서는 '성당 기사단'이라고 나오고 위키피디아에서는 '성전 기사단'이라고 나오며 또 누구는 '템플 기사단'이라고도 부르는 템플러를 모른다면 당신은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을 안 읽었거나 대충 읽은 사람이니 다시 읽어보시라: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템플러가 중세 서양음악사에서 뭔가 중요한 역할, '음모론'에 걸맞게 뭔가 비밀스러운 역할을 했을까? 뉴그로브 사전(NGD2)에서 '템플러'로 검색해 봤더니... 결과는 시원찮더라. -_-;

그래도 기껏 파헤친 것들 버리기 아까워서 짧게나마 정리해 본다.

▶ 성 베르나르두스 (1090-1153)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템플러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그분이다. NGD2에서는 'Bernard of Clairvaux' 항목으로 나온다. 성 베르나르두스는 12세기 중반 시토회 개혁에 앞장서면서 전례 음악이 유럽 기준에 맞도록 레퍼토리와 선율, 선법 따위를 엄격하게 다듬었다.

... 내용이 제법 길지만 이것 빼면 별 거 없다. -_-;;

▶ 키프로스

잉글랜드 사자심왕 리처드 1세(Richard the Lionheart)는 1191년에 키프로스를 점령한 다음 템플러한테 팔았다. 템플러는 키프로스를 다시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한테 팔았다. 기 드 뤼지냥은 키프로스의 왕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키프로스에 프랑스 음악이 흘러들어 갔다.

기 드 뤼지냥이 템플러였다는 설이 있으나 정황을 보아 사실이 아닌 듯하다. 뭔가 있을 줄 알았더니... OTL

▶ Gace Brulé (1160-1213?)

이 양반 이름을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다. 가스 브륄레? 아무튼 Gace Brulé는 프랑스 음유시인(트루베르 trouvère)으로 1212년 기록에 따르면 템플러와 거래관계를 맺었단다. 음유시인이니까 템플러가 자주 불러서 노래를 시켰나 보다. 이때는 템플러 세력이 어마어마할 때였으니 그만큼 이 양반이 노래를 잘했다는 얘기다.

... 끝. -_-;;

▶ 볼프람 폰 에셴바흐 (Wolfram von Eschenbach, fl c1170–1220 )

<신의 지문> 등을 쓴 그레이엄 핸콕은 볼프람이 템플러였다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적인 근거는 모자라나 볼프람이 신비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만큼 신비주의 '본좌'인 템플러와 어떤 식으로든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볼프람은 1200년에 <파르치팔 Parzival>을 내놓았는데, 그레이엄 핸콕은 이 작품이 1187년 십자군이 살라딘 군대에 패하여 예루살렘 왕국이 함락된 일과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파르치발>에 묘사된 배경은 아서 왕 시대가 아닌 십자군 원정 당시와 맞아떨어지며, <파르치발>에 묘사된 지리는 성궤(Ark)가 숨겨진 위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파르치팔>이 음악사에서 중요한 까닭은 나중에 바그너가 이 작품을 바탕으로 <파르지팔 Parsifal>을 썼기 때문이다. 바그너와 템플러 관계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라:

http://wagnerian.textcube.com/377
http://wagnerian.textcube.com/340

▶ Templer und die Jüdin

마르슈너(Heinrich August Marschner, 1795-1861)가 1829년에 내놓은 오페라 제목으로 '템플러와 유대인 아가씨'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가 원작이며, 템플러 부아-길베르(Brian de Bois–Guilbert)는 악당으로 나온다. 키프로스를 점령해서 템플러한테 팔았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그 유명한 '흑기사'이며, 흑기사와 의형제인 록슬레이는 전설에 나오는 로빈후드이다. 리처드 1세는 원작 소설에서부터 매우 멋있게 나오지만, 사실은 당시 영국에 산적이 많았던 까닭은 리처드 1세가 세금을 무겁게 매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오페라는 독일에서만 200회 이상 공연되었고 피츠너(Hans Pfitzner, 1869-1949)가 1912년에 개작할 만큼 크게 성공한 작품인데 어째 음반을 찾아보니 서곡이 들어 있는 음반 달랑 하나 나온다.

▶ 포부르동(Fauxbourdon)

1337년부터 1453년까지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이른바 '100년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 전쟁을 계기로 영국 음악이 프랑스에 흘러들어 간다. 이때까지만 해도 음악사에서 '변방'에 속했던 영국에서는 대륙 작곡가들이 금기로 여기던 3도, 6도 음정을 자유롭게 쓰고 있었고, 이것이 프랑스로 건너가 이른바 포부르동 양식으로 나타난다. 포부르동 양식은 3화음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인 호모포니의 씨앗이 되었다.

포부르동 양식이 유럽 음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비교해 보자.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1300-1377) - <미사 노트르담>
가운데 '천주의 어린 양 Agnus Dei'
http://www.youtube.com/watch?v=bHRAYbgdxew


질레 뱅슈아(Gilles Binchois, 1400-1460) - De plus en plus
http://www.youtube.com/watch?v=Rh8553tK3go

교회음악끼리 비교해야 공정하겠으나 '근대적인(?)' 음향을 뚜렷이 느끼게 하려고 일부러 이 두 곡을 꼽았다. 첫째 곡은 14세기 이른바 '아르스 노바 Ars Nova' 양식을 따른다. 둘째 곡은 포부르동 양식이 나타나는 ☞롱도(Rondeau)이다. 둘째 곡이 더 '3화음스럽고' 더 '호모포닉'하며 더 쉽게 귀에 들어오는 게 느껴지시는가.

호모포니를 모르는 사람은:
http://wagnerian.textcube.com/386

포부르동 양식이 15세기 영국에서 비롯하였음에 주목해 보자. 필리프 4세가 템플러 수뇌부를 갑작스럽게 체포한 때가 1307년, 템플러가 공식 해체된 때가 1312년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템플러가 도망간 곳이 스코틀랜드이다. 그리고 100년 전쟁이 일어난 때는 1337년이다. 무언가 수상하지 않은가?

김원철의 음모론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어쩌면 템플러 잔당이 100년 전쟁을 뒤에서 부추기지는 않았을까? 포부르동 양식이 대륙으로 건너간 일에도 그들이 관여하지는 않았을까?

... 열심히 팠으나 근거는 없더라. OTL

무엇보다 템플러가 도망간 곳은 잉글랜드가 아닌 스코틀랜드였다. 이때는 아직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점령당하지 않았을 때였으며, 100년 전쟁 때 프랑스는 '이이제이' 전략에 따라 스코틀랜드를 돕기도 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음악이 잉글랜드와 닮은꼴이며 3도, 6도 음정을 자유롭게 썼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음 시간에는 16세기와 17세기를 건너뛰고 프리메이슨이 활동하던 시대로 넘어가겠다.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다음 글 읽기: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2)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3)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4)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5)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6)

2009년 6월 24일 수요일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음모론이라 하면 허무맹랑한 소리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모든 음모론이 헛소리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굳이 글 제목에 '재미로 보는'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먼저 음모론을 다룬 일반론을 살펴보자.

"이러한 음모이론이 불신과 냉소를 받는 것은 두가지의 다른 이유에서 기인한다. 첫째, 음모 이론은 그 진위 여부를 아예 검증할 수도 없도록 짜여진 논리 구조로 자의적인 인과 관계를 설정하는 비과학적 이론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들이 통념으로 갖고 있는 상식에 비추어 기상천외한 원인을 들먹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을 음모이론으로 몰아 잘못된 것으로 공박하는 주장들을 볼 적에 이 두 가지를 잘 구별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두 번째 종류의 이유에서의 비판은 자칫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통념과 다르다는 이유에서 무조건 기각해버리는 반대의 지적 오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론이 음모이론인지 아닌지는 첫 번째의 관점 즉 그 이론이 철저하게 "과학성"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3> I. '음모'에 대해 말해보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30326155444&Section=

1908년에 설립되었으며 서울 이태원에 있는 프리메이슨 '한양 롯지.' 부산과 경기도에도 프리메이슨 지부가 있다고 한다. 원래 단체 사진을 링크로 걸었다가 홈페이지 개편하면서 사진이 없어져서 약도로 바꿈. 태극 문양과 프리메이슨 컴퍼스가 합쳐진 로고가 신기하다. 그림 출처: 프리메이슨 한양 롯지 홈페이지 http://www.hanyang-masons.org

이제 '음모론'이 아닌 검증된 사실을 하나 살펴보자.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미국이 지난해 AIG에 지원한 공적 자금 1,730억 달러 가운데 500억 달러쯤이 올해 초 미국의 다른 금융기관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스위스,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으로 몰래 흘러들어 갔다고 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서는 AIG 공적자금 쓰임새를 밝힐 수 없다고 했단다.

AIG는 '그림자 정부'의 빨대? - 프레시안 2009-03-09 오후 2:46:35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309110805&section=05

위 기사에서 '그림자 정부'라 부른 비밀 집단 가운데 제법 겉으로 드러난 모임이 있다. '빌더버그 회의'라는 비밀 모임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문 기사 링크를 빌리겠다.

한국경제신문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6061288361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50605090844&Section=

민중언론 참세상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22079

링크한 기사를 보면 로스차일드 집안이 빌더버그 회의에 돈을 댔다고 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리메이슨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으며, 이 집안 자본이 IMF 사태를 계기로 한국에도 들어왔단다.

로스차일드 펀드에 놀아난 정부와 만도기계
- 이정환닷컴 http://www.leejeonghwan.com/media/archives/000660.html

인터넷 검색해 보니 삼성증권이 로스차일드와 손잡는다는 기사도 있다

머니투데이 기사
http://stock.mt.co.kr/view/mtview.php?type=1&no=2008110509533987940

이제 진짜 음모론을 하나 소개하겠다. 링크는 연재물 가운데 첫 글일 뿐이니 이어진 글을 모두 차분히 읽어보시라.

http://blog.naver.com/patomusic/120007969434
http://blog.naver.com/patomusic/120007970578
  ┗ 6회부터 그림이 깨져서 다른 링크를 덧붙인다:
http://www.nomad21.com/bbs/uboard.asp?id=nomad_gisa&u=2&u_no=43
http://www.nomad21.com/bbs/uboard.asp?id=nomad_gisa&u=2&u_no=78
http://www.nomad21.com/bbs/uboard.asp?id=nomad_gisa&u=2&u_no=152

김원철의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은 파토님 음모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파토님 음모론보다는 더 많은 억측이 들어갈 것이다. 처음에는 꼼꼼하게 자료를 모아 정리하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자료를 날려 먹었다. 아까운 자료에 묵념..;;

그래서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김원철이 귀차니즘을 얼마나 이겨내고 꼼꼼히 자료 조사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재미로 보는'이라고 미리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기다리시라, 커밍쑨~ ㅡ,.ㅡa


일러두기.

1. 사실이 음모론으로 잘못 알려지는 일을 막고자 앞으로 본문에서 사실과 추측을 구분해서 쓰겠다. 문장이 단정적이거나 참고 문헌을 밝힌 대목은 널리 알려진 음악사 문헌으로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있으니 그대로 믿어도 좋다.

2. 문헌 출처 가운데 'NGD2'라 줄여 쓴 것은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2nd Edition의 온라인판인 Grove Music Online을 가리킨다.

3. 문헌 출처 가운데 'MGG'라 줄여 쓴 것은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의 온라인판인 MGG-Online을 가리킨다. (그러나 김원철이 MGG를 인용할 일이 있을까 싶다. 독일어 읽기 귀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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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1)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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