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2일 금요일

줄리언 앤더슨: 시간의 서[Book of Hours] (2004)

이 작품은 중세 미술의 걸작 두 가지에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는데, 현재 파리 중세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그리고 태피스트리 ‹귀부인과 일각수›(La Dame à la licorne)이다. 두 부분으로 된 이 곡은 중세 미술 작품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음악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다만 음악의 분위기, 화성, 선율, 음색 등이 이들 작품에서 유래했다. 또한 이 곡의 형식은 '시간의 서'처럼 되어 있다. 즉 여러 일과가 시간순으로 엮여 있으며 각각의 일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옮긴이 주: '시간의 서'는 중세 기도서의 일종으로 성무일도서에서 분리되어 여러 다른 텍스트가 덧붙으며 발전했다. 시도서(時禱書) 또는 소시간경 전례서(小時間經 典禮書)라고 번역되기도 하며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가 일종의 '시간의 서'이다.] 

이 곡에서는 한 가지 통합적인 아이디어, 즉 장조 음계의 첫 네 음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 음정들 자체가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이다. 나는 이를테면 장2도, 완전4도 또는 완전5도 음정으로부터 무엇이 나올 수 있는지, 이런 소리가 어떤 식으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재발견하고자 했다. 때로는 전자음향이 나오는데, 이것은 앙상블 소리에 색채를 더하기 위한 것이며 마치 중세 필사본에 금박을 입히는 것과 비슷하다.

이 작품을 이루는 두 부분은 성격적으로나 화성적으로 매우 다르며, 나는 그 사실이 곧바로 분명히 인지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두 부분은 같은 음악으로 시작하며, 단지 둘째 부분이 마치 허술하게 제작되어 지직거리는 33 ¹/₃회전 음반[즉 LP 음반]에서 나는 소리처럼 시작되는 점이 다르다. (이런 음반은 아마도 동구권에서 만들어졌을 것인데, 나는 폴란드, 러시아 또는 루마니아의 최신 현대음악을 듣고자 런던의 'Collets'에서 그런 음반을 구입하던 일들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 이후 둘째 부분은 마치 첫째 부분을 '빨리 재생'한 것처럼 이어지고, 결국 두 부분은 전혀 다른 길로 갈라져 나아간다.

이 작품에는 때때로 중세 음악의 선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나오기도 하는데, 다만 중세 음악을 그대로 흉내 내거나 인용하지는 않는다. 전자음악으로 된 카덴차가 꽤 길게 나온 뒤, 코다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등장하는 가운데 이따금 앞선 부분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시간의 서(書)›는 제휴작곡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일부로서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버밍엄 컨템포러리 뮤직 그룹의 위촉을 받아 작곡되었으며, 마이클 바이너 트러스트(Michael Vyner Trust)와 버밍엄 컨템포러리 뮤직 그룹 음향 투자 계획에 따른 여러 투자자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또한 전자음향과 관련해 도움을 아끼지 않은 람베르토 코치올리, 그리고 버밍엄 컨템포러리 뮤직 그룹 연주자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도와준 재키 뉴볼드 및 스티븐 뉴볼드에게 감사 말씀을 전한다. 올리버 너센과 버밍엄 컨템포러리 뮤직 그룹 같은 비르투오소 음악인들이 있었기에 이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시간의 서(書)›는 존경하는 배리 개빈에게 헌정되었다. 

(줄리언 앤더슨 / 김원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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