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제가 군 복무할 때 훈련소 동기 가운데 프로 당구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당구 1,000점을 놓게 되면서 프로가 되었다는데, 그때 만난 선생님이 기초 자세부터 완전히 새로 가르치더라네요.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학계에서 대가로 존경받는 교수님과 논쟁 비슷한 걸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가 별생각 없이 쓰던 기초 용어 두 가지의 차이를 물으셨을 때, 저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무협지에서는 주인공이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무협 세계의 어느 대문파 제자가 되어 있어서, 배운 기억이 없는 기초 무공을 처음부터 새로 익혀야 했습니다. 그랬더니 문파 최고수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가 혀를 차며 이렇게 말합니다. "기초부터 새로 익히는 제자가 있다기에 크게 될 놈인가 했거늘!"
기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대가일수록 기초를 강조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기는 쉽지 않지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 자비네 마이어, 동료 연주자인 라이너 벨러 · 볼프강 마이어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강조한 것이 바로 '기초'였습니다.
개인별 맞춤형 교육인 '마스터 클래스'는 구경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지루한 감이 있었지만, 기초적인 내용을 반복해서 지적하는 대목이 흥미로웠습니다. 단체 교육인 '워크숍'에서는 두 음만으로 리듬을 달리해 반복하는 쉬운 음형을 연습하면서 기초가 중요함을 피부로 느끼게끔 하는 교육방식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마스터 클래스는 신청자 가운데 어리고 뛰어난 학생을 엄선해 진행한 덕분에 다들 실력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마치 걷는 자세를 새로 배우면 오히려 걸음이 우스꽝스럽게 꼬이는 것처럼, 단순한 음형을 연주하면서 기초를 새로 다질 때 처음에는 저마다 소리가 엉망이 되었다가 차츰 좋아지곤 했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전율이 일었습니다.
어떤 악기를 배우든 선생님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지요. 힘을 빼라. 릴랙스(relax). 클라리넷을 연주할 때에는 당연히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여야 하겠지만, 그보다 숨 쉴 때 힘 빼는 법을 설명하는 대목이 신기했습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소리를 내기 직전 아주 짧은 순간, 배에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 생기는 압력을 목구멍이나 입이 막아버리면 그만큼 힘을 낭비하게 된다고요. 소리를 내기에 앞서 급하게 숨을 들이쉬지 말고 자연스럽게 호흡하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밖에 기억나는 가르침으로는, 테크닉은 10%만 신경 쓰면 된다, 나머지는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이다, 성악가가 노래하듯 클라리넷을 연주해야 한다, 혀는 끝 부분만 움직이고 다른 곳은 힘을 빼라, 셈여림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음색이 핵심이다, 피아노(여리게)는 따듯한 음색으로 공간을 부드럽게 감싸라는 뜻이다, 연주법이 바뀔 때 일관된 음색을 유지하도록 신경 써라, 등이 있었습니다.
느낀 바를 곱씹다가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과학과 공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수학이고, 그중에서도 미적분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 이른바 '수포자'(수학 포기자)를 구제해야 한다며 미적분 교육을 사실상 무력화시키자는 주장이 '수포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지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사실은 그 '수포자'입니다만, 대학 시절 의외로 전공 공부에 수학이 필요해 새로 공부하려고 발버둥 쳐본 경험도 있어서 '기초'를 허물자는 선동이 참 걱정스럽습니다. (그때 공부했던 것들은 음대로 진학하면서 다 잊어버렸긴 합니다.)
"미적분을 모른다는 것은 지난 300년간 인류의 기술 문명을 추동해온 지성의 흐름으로부터 소외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트위터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미적분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마차 타고 촛불 켜고 살았을 겁니다. 미적분이라는 현대 문명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철학자이자 수학자이기도 했던 라이프니츠와 고전물리학을 완성한 뉴턴입니다. 그 기초를 바탕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기차와 비행기가 발명되었고, 서양이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옛말 하나 인용할게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