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6일 화요일

2009.12.22. 라벨 피아노 협주곡 / 《스페인 랩소디》 /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 조성진 / 정명훈 / 서울시향

2009년 12월 22일(화)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 : 정명훈
협연 : 조성진

Ravel, Rapsodie espagnole
Ravel, Piano Concerto in G major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Op.14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조성진은 지난 11월에 만 열다섯 나이로 하마마쓰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한 천재다. 이 콩쿠르는 생긴지 얼마 안 되었으나 지난 우승자가 가브륄리크, 블레하치 등 매우 화려해서 이번 우승은 대단한 사건이다. 덕분에 많은 기대를 모은 이날 연주회에서 조성진은 앳된 얼굴과는 너무도 다른 훌륭한 라벨 피아노 협주곡을 들려주었다.

조성진이 천재인 까닭은 자연스러운 프레이징과 루바토, 세련된 셈여림 따위로 음악을 다스릴 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 구조와 흐름을 이해하고 음 하나하나가 그 흐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테크닉만 앞세우면 기계처럼 딱딱해지게 마련이고,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루바토를 써 봐야 유치해질 뿐이다. 그러나 조성진은 음악에 끌려가지 않고 다스릴 줄 아는 경지에 벌써 올랐다. 그 '다스림'은 19세기 음악 패러다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했는데, 덕분에 이날 2악장이 참으로 멋졌다. 다만, 1·3악장에서는 좀 더 현대음악 느낌을 살렸으면 하는 욕심이 들 때도 더러 있었다. 음색을 제법 다채롭게 쓸 줄은 아는 듯했으니 오케스트라 협연 경험이 더 쌓이면 음색을 빚어내는 솜씨도 같이 늘어나리라 기대된다.

라벨 《스페인 랩소디》는 화려한 음향효과로 가득해서 지휘자가 소리를 얼마나 멋지게 다듬느냐와 오케스트라가 지휘자를 얼마나 따라가느냐가 중요한 곡이다. 이날 연주는 정명훈서울시향 이름에 걸맞게 참으로 멋졌다. 무엇보다 트럼펫 수석이 눈에 번쩍 띄었는데, '트럼펫' 하면 생각나는 금빛 눈부시게 번쩍이는 바로 그 소리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옛 수석이었던 가레스 플라워스가 떠난 자리가 제법 커 보이던 마당이라 이 연주자가 더욱 반가웠으며, 음색만큼은 플라워스보다 나은 듯해서 베를리오즈를 기대하게 했다.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은 영화에 빗대자면 B급 영화라 할 수 있다. 기괴한 4·5악장이 아니더라도 악보를 보면 음표 하나하나가 신경질을 부리는 듯한 느낌이 들며, 길고도 처절하게 궁상맞은 ― 차마 속된 말을 쓰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 ― 3악장은 이어지는 악장을 헤아리게끔 한다. 이러한 'B급' 정서는 음반으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잦은데, 정명훈은 바스티유 오페라와 함께 녹음한 음반에서 아예 불편한 정서를 싹 발라내고 세련된 음악으로 만들었으며 4·5악장은 사악한 느낌이 없으면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화끈하다.

이날 서울시향 연주 또한 음반과 비슷했다.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첫 음을 살짝 늘여서 티 나지 않게 아첼레란도를 쓴 듯한 효과를 노렸으며, 첫 템포는 악보에서 지시한 ♩= 56보다 훨씬 느린 ♩= 36쯤으로 꿈처럼 어른어른한 느낌을 살렸다. 마디 17을 비롯해 이 곡에서 자주 나오는 지시어인 'animando'(생기있게)는 맥락을 보면 아첼레란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명훈은 제대로 살리면 매우 신경질적인 이 지시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러우나 무디지 않은 템포 변화를 주었다. 2악장 마디 43 등에 나오는 기괴한 바이올린 글리산도는 포르타멘토처럼 살짝만 미끄러져서 세련된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3악장에서는 이 악장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들릴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맑고 잔잔한 프레이징이 돋보였다.

4·5악장에서는 코넷과 트럼펫 따위를 너무 앞세우지 않고 모든 성부가 또렷이 들리게끔 균형을 맞추었다. 음반을 들어보면 무엇보다 5악장 '마녀의 론도'(Ronde du Sabbat)에서 정명훈만큼 음 하나하나를 잘 살린 녹음도 없는 듯한데, 이날은 튜바 따위가 좀 더 힘을 내었으나 코넷·트럼펫과 균형이 제법 잘 맞으면서도 좀 더 화끈했다. 4악장 코넷·트럼펫 선율은 보통 음 하나하나를 끊어(마르카토) 연주하나 정명훈은 제법 부드러운 논 레가토(non legato)로 다스렸다. 그러나 큰북과 팀파니 등이 힘껏 두드려대어서 화끈함을 잃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음반과 뚜렷하게 다른 곳도 있었다. 이를테면 2악장에서 음반에서는 썼던 코넷을 이날은 쓰지 않았다. (2악장 코넷 성부는 베를리오즈가 나중에 자필 악보에 덧붙였으나 그냥 빼고 연주할 때가 잦다.) 1악장 마디 167에 있는 도돌이표 또한 음반과 달리 생략했다. 1악장 마디 198에서는 악보에 없는 아첼레란도를 썼는데, 이날은 음반처럼 가파르지 않고 아주 살짝만 빨라졌다.

라벨 《스페인 랩소디》에서 멋진 트럼펫 연주를 들려주었던 수석 연주자가 이번에는 코넷을 야무지게 연주했고,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은 장식음과 트릴로 가득해서 어렵기로 소문난 5악장 독주부를 음반과 거의 같은 빠른 템포로 나무랄 데 없이 연주했다. 3악장에서는 제임스 버튼이 연주한 잉글리시 호른과 이미성이 무대 밖에서 연주한 오보에가 마치 《라 트라비아타》 1막처럼 사랑스러운 선율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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